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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華城) 수원 화성 시리즈 Ⅲ : 융릉과 건릉, 용주사, 반차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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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 시리즈 Ⅰ : 남문(팔달문)~서장대~서문(화서문)~북문(장안문) 수원 화성 시리즈 Ⅱ : 북문(장안문)~북수문(화홍문)~동장대(연무대)~동문(창룡문)~남문(팔달문) ■ 수원 화성 답사 시리즈 Ⅲ을 시작하며 수원화성 답사 시리즈 Ⅰ, Ⅱ는 수원 화성 성곽 전체를 남문(팔달문)에서 시작하여 시계방향으로 서문(화서문)~북문(장안문)~동문(창룡문)~남문(팔달문)까지 답사한 것이었다. 수원화성 시리즈 답사 Ⅲ은 성곽은 아니지만 좀 더 깊은 역사적 이해를 위해 수원화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융릉과 건릉, 용주사, 반차도를 살펴본다. 답사는 정조가 행한 시기별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융릉(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묘)과 건릉(정조와 부인 묘)은 한 공간 내에 있고 용주사는 융건릉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위치에 있지만, 여기서는 융릉과 건릉을 개별적으로 다룬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는 1762년 7월 23일 현재의 남양주 배봉산 자락에 묻혔다가 1789년 10월 7일 수원의 현재 위치로 이장하였다. '융릉'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 것은 1899년이다. 수원 화성으로 이장하면서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1790년에 용주사를 짓고, 아버지의 능을 참배하러 오는데, 기록에 나와 있는 반차도는 1795년에 그려졌다. 피부병과 과중한 업무 스트레스에 시달린 정조는 1800년 49세의 나이로 승하한다. ■ 수원 화성과 주변 역사 문화재 위치도 ■ 융릉·건릉 배치도
▼ 융릉 정조(조선 22대 임금)(1752년~1800년)의 아버지 사도세자는 영조(조선 21대 임금)의 2번째 아들이었다. 영조가 곧 정조의 할아버지가 된다. 영조의 첫째 아들이 1728년(영조 4년) 1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둘째 아들인 정조의 아버지가 1736년(영조 12년)에 왕세자로 책봉되고 1749년(영조 25년)에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왕의 업무를 대리하게 된다. 그러나 그 당시의 소론과 노론의 당쟁에 휘말려 1762년(영조 38년) 윤 5월 13일 세자에서 물러나게 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명을 내렸으나 듣지 않자 뒤주 속에 가두어 버렸다. 뒤주 속에서 굶주리다 1주일 뒤인 윤 5월 21일 28세의 젊은 나이로 한많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동년 7월 23일 현재의 남양주 배봉산 자락에 묻혔다. 시호를 사도세자라 하고, 묘 이름을 수은묘垂恩墓라 하였다. 여기서 사도思悼는 '잘못이 있어 일찍 죽은 것을 애도한다'라는 뜻이고, 수은垂恩은 '그래도 은혜를 베풀어 준 무덤'이라는 뜻이다. 억울하게 죽은 것도 한스러운데, 죽은 뒤에조차도 세상 인심은 매우 박했음을 알 수 있다. 후에 정조가 되는 사도세자의 아들은 이 때 10살이었으며, 어머니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와 동갑인 28세였다. 당쟁의 무서움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까지 가는 것인가 보다. 15년이 흐른 1776년(정조 즉위년) 3월 20일,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 이름을 '수은묘'에서 '영우원永祐園'으로 고치고, 존호尊號를 사도思悼에서 장헌莊獻으로 고쳤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1789년(정조 13년) 8월 9일 묘 이름을 '영우원'에서 현융원顯隆園으로 하였으며, 동년 10월 7일 구舊 수원부水原府 객사客舍 뒤 화산花山으로 옮겨져 장사지냈다. 현재 우리들이 알고 있는 '융릉隆陵'은 110년이 흐른 1899년(광무 3년)에 고쳐지게 되었다. 당쟁으로 인한 나라의 고통이 130여년이나 계속된 것이다. ① 융릉과 건릉의 갈림길 ② 능의 구조 무덤의 유형은 능, 원, 묘가 있으며, 능의 유형은 단릉, 쌍릉, 삼연릉, 동원이강릉, 합장릉이 있다. 능陵은 황제· 황후· 왕· 왕비의 무덤이고, 원園은 세자와 세자빈, 세손과 세손빈, 대원군(왕의 아버지)의 무덤이며, 묘墓는 대군, 공주, 옹주, 후궁,귀인, 폐위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한다. 단릉單陵은 왕이나 왕비 중 한 분만을 매장하여 봉분이 하나인 능이고, 쌍릉雙陵은 왕과 왕비를 하나의 곡장 안에 모셔 봉분을 2개로 조성한 능이다. 삼연릉三連陵은 왕, 왕비, 계비 등 세분을 각각 봉분 3개로 조성한 능이고,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은 왕과 왕비의 능을 정자각 뒤 좌우 언덕에 각각 조성한 능이며, 합장릉合葬陵은 왕과 왕비의 관을 함께 매장하여 하나의 봉분으로 조성한 능을 말한다. 아래의 능의 구조도(상설도)는 건원릉을 예로 든 것이며, 다른 능 역시 능의 구조는 대동소이하다. 출처: http://blog.naver.com/chunpa0162(건원릉) ③ 융릉의 전체 모습 앞에서부터 홍살문, 판위, 참도(돌로 깔아 놓은 길), 정자각, 비각(정자각 우측), 사도세자의 능이 보인다. 홍전문紅箭門(홍살문)은 홍문紅門이라고도 하며, 궁전이나 능, 원, 관아 등의 앞에 세우며, 이곳은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문으로 붉은 칠을 한 둥근 기둥 2개를 세우고 위에는 살을 밖아 놓는다. 살대는 법도의 곧고 바름을 의미하며 국가의 위엄을 상징한다. 판위版位는 배위拜位라고도 하며, 홍살문 옆에 평평한 사각형 모양의 돌을 깔아 놓은 곳이다. 왕이 제사를 지내려고 왔을 때 홍살문 앞에서 내려 이곳 판위에서 절을 하고 들어가며, 수릉관, 헌관, 향축을 올리는 신하들은 이곳에서 절을 네 번 한 후 들어가고, 나올 때도 이곳에서 네 번 절을 하고 나온다. 평소 능을 참례하는 신하들은 이곳에서 절을 드렸다. 참도參道는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폭 3미터 정도로 돌을 깔아 놓은 길인데, 가운데 약간 높은 곳은 신이 다니는 길이라고 하여 신도神道라 부르며, 임금이 다니는 길은 어도御道라 하며 약간 낮다. 제관들은 참도의 오른쪽으로 들어갔다가 나올 때는 왼쪽으로 나온다. 정자각丁字閣은 제향을 올리는 곳으로 황제는 日字 모양으로 침전을 조성하고, 왕은 丁字 모양으로 정자각을 조성한다. 대들보의 태극 모양은 하늘과 땅의 이치를 표현한 것이다. 정자각은 丁字 모양을 하고 있다 하여 이름이 붙여졌으며, 중국에서 보았을때 조선이 丁方에 있다고 하여 丁字形으로 하였다고 한다. 정자각에 오를 때는 동쪽으로 오르고 내려올 때는 서쪽으로 내려오는데 이것을 동입서출東入西出이라 한다. 비각碑閣은 비석이나 신도비를 안치하는 곳이다. ④ 융릉의 정자각과 융릉 ⑤ 융릉 사진 좌측부터 담장, 망주석, 문인석, 무인석, 석마가 보이고, 우측에 장명등이 보인다. 장명등 앞 왕릉 자리에 혼유석이 보인다. 담장은 바람의 영향으로부터 왕릉을 보호하기 위하여 삼면을 담으로 두른 것인데, 이를 곡장曲墻이라 한다. 망주석望柱石은 혼이 놀러갔다가 망주석을 보고 찾아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무덤 양옆에 세운 돌기둥으로 혼이 망주석에 새겨진 도룡뇽을 타고 봉분 안으로 드나든다고 한다. 왕릉에는 망주석의 2/3지점에 세호細虎라는 작은 호랑이 형상을 새겼으나, 사대부의 망주석에는 세호 대신 도룡뇽의 모양을 새겼는데 한쪽은 올라가고 한쪽은 내려가는 모양을 하고 있다. 또한 후손들이 많이 번성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세운다고 한다. 문인석文人石은 문관이 언제든지 왕명에 복종한다는 자세로 양손으로 홀忽(왕을 만날 때 양 손에 쥐고 있는 물건)을 쥐고 서 있다. 무인석武人石은 무관이 왕을 호위하며, 왕이 위험에 처했을 때 신속하게 대처한다는 뜻에서 장검을 짚고 위엄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문관과 무관은 각각 말을 타고 다니는데, 그것을 형상화 해 놓은 것이 석마石馬이다. 장명등長明燈은 왕릉에 불을 밝히기 위한 것이며, 귀신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불이기 때문에 잡귀의 접근을 막는 뜻으로 세웠다. 일반인의 묘에는 '상석'이라 하여 제물을 차려놓는 곳인데, 왕릉에서는 이를 혼유석魂遊石이라 한다. 정자각에서 제를 올리므로 혼령이 앉아 노는 곳이라 한다. 혼유석의 받침돌은 고석鼓石이라 하며, 사악한 것을 경계하는 의미로 귀면鬼面(귀신의 얼굴 모양)을 새겨 놓았는데, 황제의 능에는 5개, 왕의 능에는 4개를 받쳐 놓았다. ■ 용주사 용주사龍珠寺가 세워진 자리는 원래 신라 854년(문성왕 16년)에 창건된 갈양사葛陽寺의 옛터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갈양사의 창건에 관해서는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없어 정확하지는 않으나 신라말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제2세였던 염거화상廉居和尙이 창건했던 것은 분명하다. 용주사의 범종(국보 제120호) 오른쪽 옆면에 새겨진 명문의 내용을 보면, '연기緣起 성황산成皇山 후신 화산花山의 갈양사 후신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 5월에 창건되었고, 동시에 이 범종을 주조하였다. 불기 2950년 7월 주기 석釋 송굴松屈 대련大蓮'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기록은 1923년 당시 주지였던 강대련姜大蓮(1875~1942) 스님이 적은 것으로 염거화상이 생존했던 신라시대에 범종을 조성하면서 명문을 함께 새겨 넣었다는 기록이다. 또 다른 범종 뒷면에는 창건주 염거스님의 명문도 새겨 있는데, '성황산成皇山 갈양사 범종 한 구를 석釋 반야般若가 2만 5천근을 들여 주성鑄成하였다. 금상今上 16년 9월 0일 사문 염거廉居' 라는 명문의 내용을 보면 염거화상이 생존했던 신라시대에 범종을 조성하면서 명문을 함께 새겨넣은 것으로 되어있지만, 금상십육년(今上十六年)이라는 연기 표현은 신라시대에는 없었던 표기법이고 더우기 범종은 양식적으로 보면 고려초기의 작품으로 명문은 범종이 만들어진 이후 후대에 추각追刻되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염거화상 이후 갈양사가 다시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고려시대에 들어와서인데, 고려 970년(제4대 광종光宗 21년), 혜거국사가 수주부水州府(수원의 옛이름)의 갈양사가 산수가 빼어나 국가대만대의 복지福地를 위하여 국가의 영원한 축원도량으로 삼으라 하여 임금이 이에 따라 갈양사를 고려왕조의 원찰願刹로 승격시켜 국가의 축원도량으로 삼았으며, 혜거국사는 이곳에서 참선수행에 몰입하고 조계종풍을 드날리다 974년 12월15일 입적하였다. 국가의 지원과 보호에 의해 법등法燈이 끊이지 않고, 적지 않은 고승대덕이 배출되었을 것이 분명하나 안타깝게도 갈양사는 잦은 병난의 과정에서, 특히 병자호란 때 소실된 후 폐사되었다가 조선시대 제22대 임금인 정조正祖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1790년 절을 다시 일으켜 4년간의 공사 끝에 완공하여 원찰로 삼았는데, 대웅보전 낙성식 전날 밤 정조가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고서 '용주사龍珠寺'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 용주사 배치도 1번 일주문으로 들어와 5번으로 들어온다. 14번 대웅전 우측 옆에 있는 13번 범종각에 있는 범종이 국보 130호이다. 출처 : http://www.yongjoosa.or.kr/ ① 일주문 ② 삼문 이 삼문에 걸려 있는 글씨는 정조의 '용주사'라는 사찰 명칭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용주사의 첫 입구인 일주문을 지나면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의 삼문이 있다. 마치 양반집 대가 같기도 한 이 건물은 좌우에 줄행랑을 지닌 맞배지붕 양식으로 사도세자 현륭원의 재궁齋宮으로 지어진 절이기 때문에 이러한 건축양식을 지닌 것 같다. 동서의 옆문과 중앙의 대문에 각각 문이 나 있어 삼문이라 부르며 정면 도리 위에는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안순환安淳煥의 글씨로 '龍珠寺'라는 현판이 자리하는데 부드러우면서도 힘있는 글씨가 인상적이며 오른쪽 옆문에는 '中央禪院'의 현판이 세로로 걸려있다. 삼문의 네 기둥에는 '龍珠寺佛''의 네 자를 각각 첫 글자로 한 시구가 걸려있는데 역시 안순환의 글씨다. '용이 꽃구름속에 서리었다가 여의주를 얻어 조화를 부리더니 질문에 이르러 선을 본받아 부처님 아래에서 중생을 제도한다'. 이 내용은 정조가 낙성식 전날 밤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꾼 후 절이름을 용주사라고 하였다는 연기와 상통한다. 삼문 앞에는 화마火魔를 물리친다는 석조 해태상 두 마리가 버티고 서있다. ③ 대웅보전 ④ 대웅보전 뒷편에서(좌측은 호성전, 우측은 천불전, 앞쪽은 천보루이다) ⑤ 범종각(이 안에 있는 범종이 국보 130호이다) ⑥ 국보 130호 범종(비천상과 글씨가 보인다) 종의 정면 아래 부분에 연꽃을 아로새긴 당좌撞座(종을 치는 부분)와 종신의 양쪽 옆에 자리한 비천상이 있다. 고려초기의 범종이라고 하지만 드물게 보는 큰 규모이며 신라시대의 범종 양식을 부분적으로 지니고 있다. 종신에는 비천을 두 곳에 새겼고 그 사이 사이에는 연화좌위에 결가부좌한 삼존불상을 조각하였으며 보살의 천의天衣자락이 하늘을 향하고 있어 마치 천상세계에서 내려오는 듯한 형상을 보여준다. 종신의 비천상과 삼존불상의 사이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854년에 주조된 것이라 하는데, 이는 종의 형태가 고려양식이라는 점에서 일치하지 않고 있다. ⑦ 범종에 그려져 있는 비천상 ㉮와 ㉯는 삼존불상이고, ㉰와 ㉱는 비천상인데, 각기 똑같지만 조금씩 서로 다르다.
⑧ 범종에 새겨져 있는 글씨 '成皇山 葛陽寺(성황산 갈양사) 梵鐘 一口(범종 일구) 釋般若(석반야) 成二萬五千斤(성이만오천근) 今上 十六年 九月 日(금상 십육년 구월 일) 沙門 廉居(사문염거)' 위의 글씨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용주사의 옛 이름은 '갈양사'이며, 용주사가 위치한 산 이름은 '성황산'이다. 범종의 제작 시기는 '신라 문성왕 16년 9월'이며, 주조 원재료 무게는 '2만 5천근'이다. ■ 정조대왕 화성행행반차도正祖大王 華城幸行班次圖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 역시 집안의 대소사를 치를 때는 이웃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사진 촬영, 방문객 명단 작성 등을 통해 기록을 남긴다. 정부의 수장인 대통령 역시 국가의 주요 행사가 있을 때는 의식의 절차, 소요되는 인원, 경비 등을 기록하여 정부문서보관소에 보관한다. 조선시대 때도 마찬가지로 나라에 행사가 있을 때는 행사장면을 기록하는데, 이를 의궤라 한다. 의궤儀軌는 조선왕조에서 유교적 원리에 입각한 국가 의례를 중심으로 국가의 중요 행사를 행사 진행 시점에서 당시 사용된 문서를 정해진 격식에 의해 정리하여 작성한 기록물이다. 같은 유교문화군에 속하는 중국, 일본, 베트남 등에서는 의궤의 체계적인 편찬이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의궤는 조선시대 600여년에 걸쳐 (1392-1910) 왕실의 주요 행사, 즉 결혼식, 장례식, 연회, 사신영접 등 뿐 아니라, 건축물·왕릉의 조성과 왕실문화활동 등에 대한 기록이 그림으로 남아져 있어 600여년의 생활상을 시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희소성을 가지고 있다. 총 3,895 여권의 방대한 분량에 이르는 의궤는 왕실의 주요한 의식이 시기별, 주제별로 정리되어 있어서, 조선왕조 의식의 변화 뿐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의 문화를 비교연구, 이해하는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반차도, 도설 등 행사모습을 묘사한 시각 콘텐츠는 오늘날의 영상자료처럼 당시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생동감 있게 보여준다. 예컨대 정조의 능행도陵幸圖는 전 여정을 15.4m에 걸쳐 표현하고 있다. 업무의 진행 과정을 그림을 통해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반차도班次圖이다. 반班은 나눈다는 뜻이며, 차次는 '비슷한 것'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반차'는 행사의 여러 업무를 업무 담당에 따라 차례로 진행하는 것’을 말하는데, 임금이 돌아가신 아버지나 조상의 묘를 참배하러 갈 경우에는 '능행 반차도'가 된다. 정조대왕의 반차도는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에 실려 있는데, 정조가 1795년(을묘년) 음력 윤 2월 9~16일까지 어머니 경의왕후敬懿王后(혜경궁 홍씨)의 환갑을 기념하여 아버지 장헌세자莊獻世子(사도세자)가 묻힌 화성 현륭원顯隆園으로 행차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며, 1,779명의 사람과 말 778필의 모습을 세밀하게 표현하였다. '을묘년(1795년)에 현륭원顯隆園에 행차한 것을 정리하여 의궤에 기록했다'해서 '원행을묘정리의궤'라 칭한다. ▼ 1795년 화성 능행 반차도 일정 첫째 날(윤2월 9일) 새벽에 창덕궁을 떠나 노량행궁(용양봉저정)에서 점심을 들고, 시흥행궁에 도착해 하룻밤을 묵었다. 둘째 날(윤2월 10일) 시흥행궁을 출발해 청천평에서 휴식을 취했고, 사근참행궁에서 점심을 들었다. 진목정에 이르러 휴식을 취했고, 저녁에 화성행궁에 도착했다. 셋째 날(윤2월 11일) 아침에 화성향교 대성전으로 가 전배한 후 오전에는 낙남헌에서 문무와 별시를 거행했다. 오후에는 봉수당에서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를 예행 연습했다. 넷째 날(윤2월 12일) 오전에는 현륭원 전배를 마쳤고, 오후에는 서장대에서 주간과 야간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다섯째 날(윤2월 13일) 오전부터 봉수당에서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미리 앞당겨(원래는 6월 18일) 치렀다. 여섯째 날(윤2월 14일) 새벽에는 화성 주미에게 쌀을 나누어주었고, 오전에는 낙남헌에서 양로연을 베풀었다. 오후에는 득중정에서 활쏘기를 했다. 일곱째 날(윤2월 15일) 화성을 떠나귀경길에 올랐다. 지지대고개를 넘어 사근평행궁에서 점심을 들었고, 다시 행차를 계속해 저녁 무렵 시흥행궁에 도착했다. 여덟째 날(윤2월 16일) 아침에 시흥에서 백성들과 대화를 나누었고, 용양봉저정에서 점심을 들었다. 배다리를 건너 환궁했다. 행차 뒷마무리(윤2월 21일) 창덕궁 춘당대에서 행차 일정에 참여한 사람들을 위한 잔치(호궤)를 벌였으며, 선별하여 상을 내렸다. 주자소에 의궤청을 설치하고 8일간의 화성행차 전말을 기록하게 했다. 출처 : http://cafe.daum.net/folk5/ ▼ 1795년 화성 능행 반차도 ① 강을 건너는 장면 출처 : http://blog.chosun.com/ ② 청계천에 복원된 정조의 능행 반차도 중앙에 가마가 보이는데,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타고 가는 가마이다. 제일 우측에 말이 보이는데, 정조가 타고 가는 말이다. ③ 혜경궁 홍씨의 가마(자궁가교慈宮駕轎) ④ 정조가 타고 가는 말(좌마座馬) ■ 건릉 정조대왕은 1800년(정조 재위 28년) 6월 28일, 피부병과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로 인해 49세의 젊은 나이에 승하하셨다. 아버지 능 곁에 뭍히길 원해 동쪽 산등성이에 장사지냈다. 정조의 부인 효의왕후가 1821년(순조 21년) 6월 9일, 69세로 승하하셨다. 정조대왕의 능이 풍수지리적으로 좋지 않다고 하여 효의왕후가 승하하자 1821년 능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① 건릉 전체 전경 홍살문 앞에 놓여진 평평한 돌이 판위版位이다. 참도參道 좌측(정자각 아래)에는 수라간이, 우측(정자각과 나란히)에는 비각이 있다.
② 판위版位 ③ 수라간水刺間(제물을 마련하던 집) ④ 비각 ⑤ 정자각丁字閣 정자각 좌측 울타리 바로 밑에 놓여져 있는 돌이 축문을 태우던 장소 즉 예감?坎이다. '예?'는 '묻다'라는 뜻이며, '감坎'은 '구덩이'라는 뜻으로 '예감'은 '묻는 구덩이' 라는 의미이다. 예감의 다른 이름으로는 석함石函, 소대燒臺(소전대燒錢臺), 망료위望燎位가 있다. 현재의 사람들이 제사를 지낼 때 '축문'을 쓴다. 제사가 끝나고 '축문'을 태워버리는데, 태워버리는 곳이 바로 '예감'이다. ⑥ 정자각 좌측에서 바라본 건릉 ⑦ 예감?坎 ⑧ 정자각 우측에서 바라본 건릉(우측 울타리 끝 안쪽에 평평한 돌이 하나 놓여져 있는데, 산신석山神石이다) ⑨ 산신석山神石 산신석山神石은 제례가 끝난 후 산신에게 제를 올리는 곳이다. 예감과 산신석의 위치는 능마다 약간씩 차이가 난다 ■ 화성 답사를 마치며... 수원 화성을 답사하면서 아쉬운 것은 화성 행궁의 전경과 정조가 행궁에서 거행한 군사훈련에 대해 살펴보지 못한 것이다. 이 두 가지를 둘러보는 것이 그 당시의 정조를 이해하는데 조금 더 도움이 될 것이고, 만약 여유가 있어 정조가 걸어왔던 길을 답사해 본다면 그보다 더 좋은 답사는 없을 것이다. 아쉬움을 뒤로 한채 먼 훗날을 기대해 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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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N 국방시민연대 전쟁사위원회 위원장 권순삼 kwonsanha@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