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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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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Dec

서울 금천구 830년 은행나무와 정조대왕 시흥행궁 터

작성자: [레벨:16]한국의 산하 IP ADRESS: *.39.120.17 조회 수: 6963

금천구 시흥행궁

 

-정조대왕과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머물던 자리, 은행나무 사거리

-금천현, 시흥현 관아 동헌 터에는 830년 역사의 현장이 있다.

 

 

 

 T_1.jpg

 

 

 

◈ 정조의 화성(수원성) 행차길(능행길)

 

정조의 궁 밖 나들이는 재위 24년간 66회였다. 1년 평균 약 3회를 기록했다. 이 중에서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소를 참배하기 위해서 나선 나들이가 절반을 차지하였다. 왕들이 궁 밖으로 나들이를 나가는 것은 특이한 일은 아니지만, 정조는 그 어떤 왕들보다 궁 밖 나들이가 많았던 임금이다. 국왕의 능행과 원행은 일반적으로 1년에 1회 내지 2회 정도였다.

 

왕이 궁 밖 나들이를 할 때는 보통 거둥, 혹은 행행行幸이라 하고, 특히 왕과 왕비의 무덤인 능陵에 행차(행행)하는 것을 능행陵幸, 왕의 후궁이나 세자의 무덤인 원園에 행차하는 것을 원행園行이라 한다.  

 

정조는 양주 배봉산에 있는 사도세자의 묘소를 1789년에 지금의 화성시에 있는 화산으로 이장하여 현륭원顯隆園이라 했다. 엄격하게 따지면,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장헌세자)의 무덤인 원을 방문했기 때문에 능행이 아니라 원행이 된다. 그 후 정조는 해마다 1월 혹은 2월에 신하들을 거느리고 현륭원을 참배하였다.

 

정조의 능행은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가장 큰 목적이었지만, 능행하는 동안 여러 가지 부수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현지 백성들의 민원을 처리하는 기회와 대규모 도로 건설이라는 기회가 주어졌다. 또한 대규모 군사를 동원해야 했기 때문에 국방 체제의 점검과 함께 병사들의 훈련을 점검하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화산으로 이장한 후 그 다음 해인 1790년에 화산 밑에 있었던 신라시대 사찰인 갈양사(854년, 신라 문성왕 16년)를 용주사로 개창하였다. 능사陵寺인 그곳에서 선친인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었다. 수원에 화성이 건축된 것은 1794년(정조 18년)이다. 화산으로 이장한 후 4년이 흐른 뒤였다. 수원 화성은 2년 후인 1796년에 완성하였다. 현재 우리들이 많이 접하고 있는 정조대왕의 행차 그림은 1795년(정조 19년)에 이루어진 것이다.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경축하기 위한 나들이었다. 이 해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구갑도 겹쳐 있었다. 화성 행차 8일 동안 아버지 묘소를 참배하고 화성에서 잔치를 벌였지만, 화성에서 돌아온 뒤 6월 18일에 연희당에서 다시 회갑연이 열렸다.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치른 1795년이 을묘乙卯년이므로 흔히 을묘원행乙卯園行이라 불린다.

 

윤건릉 및 용주사

 

수원 화성 1

 

수원 화성 2

 

정조의 화성 행차길은 두 갈래이다. 서울에서 경기도 수원을 가기 위해서는 사당동에서 남태령을 넘어 과천 방향으로 가는 길이 하나이고, 또 다른 길은 대림동에서 금천구를 거쳐 안양으로 가는 길이다. 정조대왕이 처음 수원으로 가는 길을 택한 것은 사당동 경유 과천 방향이었다. 후에 대림동 경유 금천, 안양 방면이었다. 정조대왕은 왜 길을 바꾸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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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갔던 영의정 김상로의 형 좌의정 김약로(1694, 숙종 20년~1753, 영조29년)의 무덤이 갈현동 찬우물 마을에 있어 그 앞을 지나기가 싫었기 때문이라 한다. 김약로의 무덤은 경기도 과천시 갈현동 산19-1에 위치해 있는데, 200m 근처에 가자加資우물(찬우물)이 있다. 가자우물과 김약로의 무덤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갈현동 삼거리를 찾으면 된다. 그곳에서 우측으로 가자우물이 있고, 이곳에서 우측 200m 지점에 김약로 묘소가 있다. 찬우물이 가자우물이 된 것은 정조임금이 이 근처를 지나다가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신하가 가져 온 우물을 마시고 물맛이 유난히 좋다 하여 이때부터 이 우물에 당상(堂上) 품계의 벼슬을 제수했다는 일화가 전해 온다.

 

 

◈ 830년을 지켜온 금천구 은행나무와 정조대왕 행궁터

 

현재의 금천구는 삼국시대 잉벌노현, 통일신라시대 곡양현, 고려시대 금주衿州로 불리어 오다가 조선시대 때인 1413년(태종 13년)에 금천현衿川縣이 되었다. 1795년(정조 19년)에 시흥현始興縣으로 변경되었다.

 

금천구 은행나무 사거리에 있는 은행나무는 고려시대부터 한강을 바라보며 우리의 역사를 지켜왔다. 임진왜란 당시도 행주산성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둔 권율 장군을 응원했으리라! 행주산성에서 전투를 지휘한 권율은 행주산성에 입성하기 전에 선거이 장군(이순신 장군과 막역한 사이)을 금천구에 있는 호암산성에 주둔하게 하였다. 이는 한성에 주둔한 일본군이 한강을 건너 남쪽 방향에서 진입하는 것을 차단시키는 역할을 했다. 선거이 장군 역시 이 은행나무를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200년이 흐르고 난 이후 이곳 은행나무사거리는 정조대왕과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수원 화성으로 행차하던 도중 머물렀던 장소가 된다. 정조대왕은 이곳에 머문 뒤 안양에 있는 만안교로 향해 갔다.

 

▼ 은행나무 사거리 전경

 

금천구에 있는 '은행나무 사거리'이다. 은행나무 사거리에서 북쪽 방향(관악산 방향에서 한강 방향)을 바라본 사진이다. 시흥현령 선정비 4기가 서 있고, 은행나무 2그루가 보인다. 우측에 있는 은행나무 옆으로 30m 들어가면 또 한그루의 은행나무가 있다. 이곳은 예전 금천현, 시흥현 관청이 있던 자리로 추정된다. 또한 조선 정조대왕이 수원 화성으로 행차할 때 머물고 간 자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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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 사거리에서 호암산성(남동 방향)을 바라보았다. 관악산 서쪽 끝자락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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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 사거리에 있는 현령 선정비이다. 현(현재의 면에 해당)에는 현령 혹은 현감이 주재한다. 현 중에서도 규모가 더 큰 지역에는 현령을 파견한다. 현령은 종5품이고, 현감은 종6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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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현령 선정비다. 현령 김병이, 이장혁, 방천용, 조용구 순으로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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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와 그 주변을 찍은 전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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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에 있는 은행나무 옆으로 들어가면 또 한그루의 은행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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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안쪽에 위치한 은행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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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시엔 권순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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