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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Nov
2부 세계1차대전, 그 위대했던 전쟁
작성자:
조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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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대전의 대 격전지, 솜강전투에서는 총 두번의 총공세가 있었다.
1차는 1916년, 2차는 1918년이었다.
독일이 베르뎅요새를 무력화시키는데에 실패한 이래, 영불연합군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서 독일군진지를 공략하려는 역공세를 펼쳤는데, 그 지역은 바로 솜강(river) 이었다.
처음으로 공격을 한것은 영국군의 보병부대였다. 영국보병 부대들이 드디어 독일군 진지를 향해 착검하며 돌격전을 감행하였는데 영국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고, 실패로 돌아갔다. 하루에 1만 9000명의 전사자와 약 4만 2000명의 부상자를 냈다. 그러나 영국은 이런 보병들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서 영국 기병부대가 독일군 진지를 향해서 다시 대규모 돌격을 감행했으나 독일측의 기관총 사격을 받고 깔끔하게 사라져버렸다.
영국군은 이런 엄청난피해에 경악을 금치 못했고 영국은 전세를 뒤엎기 위해서 신무기를 개발했는데 그것은 바로 '탱크' 였다.
사실 1차대전의 탱크라고 하면 고철덩어리에 총이나 포신몇개 단게 전부였다. 탱크랄것도 없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영국군은 9대의 탱크를 솜강전투에 투입을 시켰다.
그러나 이런 기대에도 불과하고 독일군 전선을 돌파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탱크는 아직 너무 미숙했고, 고장이 많았다.
그리고 장갑이 얇아서 기관총같이 강력하고 빠른무기가 이 고철덩어리를 향해 계속해서 발사할경우, 장갑이 뚫려버려 탱크 승무원이 어이없게 총을맞고 즉사하거나 부상당하는 일이 빈번했다.

△ (맨위) 영국군의 탱크 모습 (가운데) 1차대전말의 독일군 탱크. (맨아래) 국적은 불분명하나 영국탱크로 추정된다. 엄청난양의 철조망에 걸려있는 탱크. 피격을 당한건지 아니면 철조망을 부수고 있는것인지 알수가 없다.
4개월간의 전투에서 영국군은 42만, 프랑스군 19만 5000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약 10km밖에 전진하지 못했다. 그에 반면 독일군의 사상자는 65만이라는 굉장한 숫자에 달하였다.
한편, 솜강전투에서 양측모두 기진맥진해있을때, 평화롭기만 보였던 알프스 산맥에서는 피터지는 지옥의 전투가 이미 진행중이었다.
이름하여 '알프스전투' 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이탈리아간의 알프스산맥을 끼고 벌인 전투인데, 이역시 무시할수없는 큰 전투이다. 여름인데도 1M 까지 쌓이는 엄청난 눈은 오스트리아제국군이나 이탈리아군이나 난감하기 마찬가지였다.
1915년, 이탈리아가 연합군측으로 섬에 따라서 알프스를 국경으로 쓰고있던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는 전쟁을 피할수가 없었거니와, 이탈리아의 산악부대를 담당하고 있던 각사령관들은 '인스브루크' 를 점령하고싶었던 꿈이 있었다.
알프스에 있는 무궁무진한 산중에서 형성되었던 전선은 베르넬 산, 메초디산, 마르몰라다산, 시에프산, 콜디라나산, 카스텔로산, 토파나산, 필차레고산 이었다.
알프스전쟁의 특징은 사망, 아니면 실종이었다.
부상같은것은 없었다.
적의 총에 맞아죽는일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은 낙석에 의한, 엄청난 크기의 낙빙에 의한, 아니면 실족사였다. 그것도 아니라면 눈사태때문에 순식간에 파뭍혀 죽은것이다. 실종이 되는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눈사태에 파뭍혀서 시체조차도 찾을수 없게 된것이 바로 실종이다.
알프스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은 정규군이었고 오스트리아군은 대부분 징집병이었고 극소수만 근위병들이었는데 이들은 자신의 국가, 고장을 수비하겠다는 굳은 마음하나만 가지고 이탈리아군과 싸웠다.
이탈리아는 알프스 산맥에 진지를 쳐두고 눈속에서 계속 포를 오스트리아군 진지로 발사를 시켰는데, 정상에서 시작된 조그만한 눈사태는 비탈길을 내려오며 엄청나게 커졌고, 그 크기는 몇십배로 점점 불어나면서 나중에는 시속 300Km에 도달할때까지
탄력을 더해갔다.
눈더미보다 먼저 불어오는 폭풍을 훨씬더 치명적이었는데 이 폭풍은 왠만한 야포가 발사하는것보다 훨씬 강력해서, 참호들이 깨끗이 사라졌고 막사들은 휩쓸려 내려가고, 병사들은 산 아래로 날라갔으며 배치해두었던 야포들역시 공중분해되버렸다.
오스트리아군은 처음에는 계속해서 열악한 무기와 함께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럴때마다 군가를 부르면서 항상 이겨냈다.
「 적군이 우리의 땅을 밟으면,
악마라 할지라도
우리 총이 가만 있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모두 죽을 때까지..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산악군대 군가)
오스트리아군은 굉장히 용감하게 싸웠고, 이는 이탈리아의 정규군을 격파시킬만큼 사기가 솟았다.
이들은 필사적으로 이탈리아 정규군에 대항하여 싸웠지만, 결국 콜디라나 산 전선이 눈사태와 낙빙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콜디라나 산 전선의 오스트리아 산악대대의 약 300명 되는 군인들은 이탈리아군의 포격에 이은 눈사태와 낙석,낙빙, 그리고 군사들이 머물던 동굴이 순식간에 무너져서 안에 있던 모든 부대원들이 전부 사망하였다.
그러나 살아남은 사람은 이 대대의 대대장을 포함하여서 전투불능의 20명정도였다. 이윽고 이탈리아군들이 마구 몰려오기 시작했고, 이 20명은 맨주먹과 삽, 그리고 몽둥이로 싸우다가 오후3시쯤에 마지막 한사람이 쓰러지면서, 전투가 끝났다.
이탈리아군이 이곳을 점령하면서, 알프스 전쟁에서의 끝을 맺으려던 찰나 오스트리아군의 황제저격수 부대와 수비대, 그리고 산악군대에 의해서 다시 점령당했다.
이 알프스전쟁은 1918년, 1차대전이 끝날때까지 끝나지 않았고 결국 양측모두 얻은것 없이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고 말았다.
거의 양측모두 엄청난수의 군인을 잃어버렸고, 자연앞에서 인간은 무기력하다는것을 증명하게 되었다. 현재, 평화로워보이는 이 알프스 산맥에서는 1차대전때의 시신발굴이 이루어지고있는데 매달 몇십명의 병사들이 썩지도 못한채 발견되고 있다고 한다.
한편, 1916년 전쟁과는 상관이 없는 나라인 이베리아반도의 작은나라 포르투칼에서는 반 독일기세가 보이면서 항구에 정박해있던 모든 독일상선을 나포하는 일이 생겼다. 독일은 이에 강경대응을 하면서 포르투갈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때가 1916년 3월9일이었다.
1917년 6월에 포르투갈군이 처음으로 독일군과 전투를 벌였는데 당시 포르투갈군은 너무 약체여서 금방금방 포르투갈군은 독일군에의해 박살이 나고 있었다. 그러나 포르투갈군은 격렬하게 저항했었다. 상황이 좋지않자, 포르투갈군은 영국사령관의 지휘를 받게 되었고 이프르 전투때 또다시 투입이 되었다.
포르투갈-영국 연합군과 독일군이 싸운 이 전투는 이프르전투였는데 독일군은 독가스와 중포발사, 그리고 10만명의 지원을 받으면서 공세를 펼쳤는데 이때 포르투갈군과 영국군은 엄청난 타격을 받게된다 . 포르투갈군은 2사단이 완전전멸되었고 327명의 장교와 7,098명의 병사를 잃었는데, 유효 전투력의 35%에 해당했다.
이때 생존자들은 영국부대로 소속이 되고말았다.

△ (맨위) 북프랑스에서 독일군의 포로가 되버린 포르투갈군대. (아래) 이프르전투가 시작되기 직전, 독일군의 침공에 대비하고 있는 포르투갈군. 그러나 이들은 머지않아 엄청난 독일의 침공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1917년 6월 29일.
독일이 아직까지 승승장구 할때였다. 독일은 영국을 굶겨죽이려는 속셈에 '무제한 잠수함작전' 을 썼는데 영국을 봉쇄하려는 노력은 영국으로 오는 모든 상선을 전부 잠수함으로 부수기까지 이렀다.
미국은 이때까지 중립이었는데, 사실 미국인 자체가 원래 영국에서 온 사람들이라서, 미국인들은 영국에게 은근슬쩍 군사물품을 팔고 지원도 가는등, 적극적으로 영국을 지원해주자, 화가난 독일이 미국의 상선을 잠수함으로 부수었는데, 이것은 결국미국의 참전을 불러일으켰다.
3화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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