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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21

04

2009-Apr

[발해사] 발해사 관련 원문

작성자: [레벨:16]한국의 산하 IP ADRESS: *.208.195.249 조회 수: 6292

[발해사] 발해사 관련 원문

[사료를 중심으로 알아보는 발해건국에 대하여...]

『舊唐書』(『舊唐書』卷199下, 渤海靺鞨傳)

[1] 渤海靺鞨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

  발해말갈의 대조영은 본래 고려별종이다.

[2] 高麗旣滅 祚榮率家屬徙居營州

  고려가 멸망하자 조영은 가속(가족무리)을 이끌고 영주로 옮겨와 살았다.

[3] 萬歲通天年 契丹李盡忠反叛 祚榮與靺鞨乞四比羽 各領亡命 東奔保阻以自 固

  만세통천 연간에 거란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키자 조영은 말갈 걸사비우와 함께 각각 무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망명, 요해땅를 차지하여 수비를 굳혔다.

[4] 盡忠旣死 則天命右玉鈐衛大將軍李楷固 率兵討其餘黨 先破斬乞四比羽 又 度天門嶺 以迫祚榮

  이진충이 죽고 측천이 우옥검위대장군 이해고에게 병사를 이끌고 그 여당(남은무리)를 토벌토록 명령하니, 먼저 걸사비우를 무찔러 베고, 또 천문령을 넘어 조영을 바짝 뒤쫓았다.

[7] 祚榮合高麗靺鞨之衆 以拒楷固 王師大敗 楷固脫身而還

  조영이 고려·말갈의 무리를 합하여 이해고에게 항거하니, 王師(당군)이 크게 패하고, 이해고는 겨우 탈출하여 돌아왔다.

[8] 屬契丹及奚盡降突厥 道路阻絶 則天不能討 祚榮遂率其衆 東保桂婁之故地 據東牟山 築城以居之

  마침 契丹(거란)과 奚(선비족)가 突厥(돌궐)에 귀속함으로서 도로가 끊기자, 측천은 토벌을 할 수 없었다. 조영은 마침내 그 무리를 거느리고 동으로 가서 계루의 옛 땅을 차지하고, 동모산에 웅거하여 성을 쌓고 살았다.

[9] 祚榮驍勇善用兵 靺鞨之率及高麗餘燼 稍稍歸之

  조영이 굳세고 용맹스러우며 용병을 잘하자, 말갈의 무리와 고려유민 이 점점 모여 들었다.

[10]聖曆中 自立爲振國王 遣使通于突厥 (其地在營州之東二千里)

  성력 연간에 스스로 진국왕에 올라 돌궐에 사신을 보내어 통교하였다.

  『舊唐書』는 발해 건국 과정에서 대조영의 주도적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高麗別種이라는 대조영이 최종적으로 聖曆연간에 자립하여 振國王으로 즉위하기까지 많은 세력의 연합 및 합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五代會要』(欽定四庫全書本 『五代會要』卷30, 渤海傳)

[1] 渤海靺鞨 本高麗種

  발해말갈은 본래 고려종이다.

[2] 唐總章中 高宗平高麗 徙其人 散居中國 置州縣于遼外 就平壤城 置安東都 護府 以統之

  당 총장연간 고종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그 사람들을 중국에 흩어져 살게 하고, 료외에는 주현을 설치하고, 평양성에 나아가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다스렸다.

[3] 至萬歲通天中 契丹李萬榮反 攻陷營府 有高麗別種大舍利乞乞仲象(大姓 舍利官 乞乞仲象名也) 與靺鞨反人乞四比羽走保遼東 分王高麗故地

  만세통천 연간에 이르러 거란 이만영이 반란을 일으켜 영부를 공격하여 함락시키자, 고려별종인 대사리 걸걸중상(大는 성, 舍利는 관명, 乞乞仲 象은 이름이다.)이 있어, 말갈반인 걸사비우와 요동으로 달아나 고려의 옛 땅을 나누어 왕이 되었다.

[4] 則天封乞四比羽許國公 大舍利乞乞仲象震國公 乞四比羽不受命 則天命將 軍李楷固臨陳斬之

  측천이 걸사비우를 허국공에, 대사리 걸걸중상을 진국공에 책봉하였으나, 걸사비우가 명을 받아들이지 않자, 측천은 장군 이해고에게 그를 죽이도록 명령하였다.

[5] 時乞乞仲象已死 其子大祚榮繼立 倂有比羽之衆 勝兵丁戶四十餘萬

  이때 걸걸중상이 이미 죽고, 그 아들인 대조영이 이어 서서 걸사비우의 무리를 아우르니 승병정호가 40여만 이었다.

[6] 保據挹婁故地 至聖曆中稱臣朝貢

  읍루의 옛 땅을 차지하고, 성력 연간에 이르러 신하를 칭하며 조공하였다.

  『五代會要』의 기록에는 『舊唐書』에 비해 내용상의 축약과 함께 새로운 내용도 눈에 띈다.『五代會要』의 기록에서는 성력 전에 요동의 고구려 옛 땅에서 걸사비우와 함께 걸걸중상이 즉위하고, 대조영은 걸걸중상의 아들로서 2대가 됨을 전하고 있다. 아울러 요동의 건국지에서 이해고의 토벌군을 격퇴하고 걸사비우의 잔당을 아우른 뒤 읍루의 옛 땅으로 이동한 듯이 서술되어 있다.

『新唐書』(『新唐書』卷219, 渤海傳)

[1] 渤海 本粟末靺鞨附高麗者 姓大氏

  발해는 본래 粟末靺鞨로서 고려에 부속되어 있었으며, 성은 대씨이다.

[2] 高麗滅 率衆保挹婁之東牟山 地置營州東二千里 南比新羅 以泥河爲境 東 窮海 西契丹 築城郭以居 高麗逋殘稍歸之

  고려가 멸망하고, 무리를 이끌고 읍루의 동모산을 차지하니, 땅이 영주 동쪽 2천리 떨어져 있었으며, 남쪽은 신라와 泥河로써 경계를 이루고, 동쪽은 바다에 닿고, 서쪽은 거란과 접하였고, 성곽을 쌓고 사니, 고려유민이 점점 모여 들었다.

[3] 萬歲通天中 契丹盡忠殺營州都督趙顪反 有舍利乞乞仲象者 與靺鞨酋乞四 比羽及高麗餘種東走 度遼水 保太白山之東北 阻奧婁河 樹壁自固

  만세통천 연간에 거란의 이진충이 영주도독 趙顪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舍利 걸걸중상이란 자가 있어 말갈의 추장 걸사비우 및 고려의 나머지 유민과 동쪽으로 달아나, 요수를 건너서 태백산의 동북을 거점으로 奧婁河에 의거하여 성벽을 쌓고 수비를 굳혔다.

[4] 武后封乞四比羽爲許國公 乞乞仲象爲震國公 赦其罪 比羽不受命 后詔玉 鈐衛大將軍李楷固中郞將索仇擊斬之

  무후가 걸사비우를 허국공으로, 걸걸중상을 진국공으로 책봉하며 그 죄를 면해주었으나, 걸사비우가 명을 받아들이지 않자, 무후는 옥검위대장군 이해고와 중랑장 索仇로하여금 그를 쳐서 죽이도록 명하였다.

[5] 是時仲象已死 其子祚榮引殘痍遁去

  이때 걸걸중상은 이미 죽고 그의 아들 조영이 남은 부상병들을 이끌고 도망쳐 달아났다.

[6] 楷固窮躡 度天門嶺 祚榮因高麗靺鞨兵拒楷固 楷固敗還

  이해고가 끝까지 쫒아 天門嶺을 넘자, 조영이 고려·말갈병로서 이해고를 패퇴시키니, 이해고는 패하여 돌아갔다.

[7] 於是契丹附突厥 王師道絶 不克討 祚榮卽幷比羽之衆 恃荒遠 乃建國 自號 震國王 遣使交突厥

  이에 거란이 돌궐에 붙어 王師(당군)가 길이 끊겨 토벌할 수 없게 되자, 조영은 곧 걸사비우의 무리를 합병하고, 거칠고 먼 것을 믿고 이에 나라를 세워 스스로 진국왕이라 부르며, 사신을 보내어 돌궐과 통교하였다.

  『新唐書』의 기록은 종래 알려진 바와 같이 시간상, 내용상『舊唐書』나『五代會要』에 비해 혼동된 점이 적지 않다.

  즉 첫째~둘째 단계는 발해와 건국과정을 총괄적으로 기술한 것이고, 그 이하는 이 내용을 설명한 부분이나 전후의 문맥이 통하지 않는 부분이 많다.

  걸걸중상과 걸사비우가 營州에서 달아난 지역이 太白山 동북의 奧婁河인데, 걸사비우를 죽인 뒤 계속된 이해고의 토벌군이 天門嶺을 넘었다고 하여 天門嶺이 太白山 동북, 奧婁河의 동쪽에 있는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또한 天門嶺 전투 후 근거지 이동 없이 건국하였다면 둘째 단계에서 말한 읍루의 東牟山이 태백산 동북, 奧婁河에서 다시 天門嶺을 넘어 다시 존재하는 것이 된다.

『삼국유사』 (『三國遺事』 卷1, 紀異1, 渤海靺鞨)

[1] 通典云 渤海 本粟末靺鞨 至其酋祚榮立國 自號震旦[國] 先天中(玄宗壬 子) 始去靺鞨號 專稱渤海 開元七年[己未] 祚榮死 諡爲高王世子襲立 明皇賜典冊襲王 私改年號 遂爲海東盛國 地有五京 十五府 六十 二州 後唐天成初 契丹攻破之 其後爲丹所制

  『통전』에 이런 말이 있다. 발해는 본래 粟末靺鞨이다. 그 추장 조영에 이르러서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진국이라 불렀다. 先天(당 현종 임자 년) 무렵에 와서야 비로소 말갈이란 이름을 버리고 오로지 발해라고만 불렀다. 開元 7년[719] (기미년)에 조영이 죽으니, 시호를 고왕이라 했다.

  세자가 뒤이어 왕이 되자, 明皇은 그를 책봉하여 왕위를 잇게 하였는데, 사사로이 연호를 인안(仁安)이라 고치고 드디어 해동의 큰 나라가 되었다. 그 땅에는 5경 · 15부 · 62주가 있었다. 후당 천성(天成) 초에 거란이 이를 쳐서 깨뜨렸으므로 그 후에는 거란에게 지배 되었다.

[2] (三國史云 儀鳳三年 高宗戊寅 高麗殘孽類聚 北依太伯山下 國號渤海 開 元二十年間 明皇遣將討之 又聖德王三十二年 玄宗甲戌 渤海靺鞨 越海侵 唐之登州 玄宗討之

  『삼국사』에 이런 말이 있다. 의봉3년 당나라 고종 무인년에 고구려의 잔당이 그 무리를 모아 북으로 태백산 아래에 웅거하여 국호를 발해라 했다. 개원 20년경에 명황이 장수를 보내어 발해를 쳤다. 또 신라 성덕 왕 32년, 현종 갑술년에 발해·말갈이 바다를 건너 당나라의 등주를 침범하니 현종은 이를 쳤다.

[3] 又新羅古記云 高麗舊將祚榮 姓大氏 聚殘兵 立國於太伯山南 國號渤海

  또 신라『古記』에 이런 말이 있다. 고구려의 구장(舊將) 조영의 성은 대씨(大氏)인데 남은 군사를 모아 태백산 남쪽에서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발해라 했다.

[4] 按上諸文 渤海乃靺鞨之別種 但開合不同而已

  위에 적은 여러 글을 살펴보면 발해는 말갈의 별종인데 다만 분리 통합 함이 같지 않았을 뿐이다.

[5] (按指掌圖 渤海在長城東北角外)

  『指掌圖』를 살펴보면 발해는 (만리)장성 동북쪽 밖에 있었다.

[6] 賈耽郡國志云 渤海國之鴨綠 南海 扶餘 橻城四府 竝是高麗舊地也

  가탐(賈耽)의『郡國志』에 발해국의 압록·남해·부여·추성 4부는 모두 고구려의 옛 땅이라 했다.

[7] 自新羅泉井郡 (地理志 朔州領縣有泉井郡 今湧州) 至橻城府 三十九驛

  신라의 천정군 (『地理志』에는 삭주의 영현에 천정군이 있으니 지금의 용주라고 나와 있다. )에서 추성부에 이르기까지 39역이다.

[8] 又三國史云 百濟末年 渤海 靺鞨 新羅 分百濟地

  또 『三國史』에는 백제의 말년에 발해·말갈·신라가 백제의 땅을 나누었다고 한다.

[9] (據此 則渤海又分爲二國也)

  이것에 의하면 말갈과 발해가 또 나누어져서 두 나라가 된 것이다.

[10]羅人云 北有靺鞨 南有倭人 西有百濟 是國之害也

  신라인들은 북쪽에는 말갈이 있고, 남쪽에는 왜인이 있고, 서쪽에는 백제가 있으니 이것이 나라의 해가 된다고 했고,

[11]又靺鞨地接阿瑟羅州

  또 말갈은 그 땅이 아슬라주(阿瑟羅州)에 연접해 있다고 했다.

[12]又東明記云 卒本城地連靺鞨(或云今東眞) 羅第六祗摩王十四年(乙丑) 靺鞨兵大入北境 襲大嶺柵 過泥河

  또 『東明記』에는 졸본성은 땅이 말갈(혹은 지금의 동진이라 한다)에 연접되었는데, 신라 제6대 지마왕(祗摩王)14년(을축년)에 말갈의 군사가 많이 북쪽 경계에 들어와서 대령(大嶺)의 성책(城柵)을 습격하고 泥河를 지나갔다 했다.

[13]後魏書 靺鞨作勿吉 指掌圖云 挹婁與勿吉 皆肅愼也

  『後魏書』에는 말갈을 물길(勿吉)이라 했고,『指掌圖』에는 읍루와 물길을 숙신(肅愼)이라 했다.

<참고논문>

암성선, 「발해의 지배세력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사학위논문, 1997년

송기호, 「대조영의 출자와 발해의 건국과정」, 1989년

박남훈, 「발해건국집단의 지배계층검토」, 『중앙사론 제9집』

정복헌, 「발해사 사료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고려시대의 사서에 실린 발 해 기사를 중심으로」

<사료>

『舊唐書』

『五代會要』

『新唐書』

『三國遺事』

DCN 국방시민연대 전쟁사위원회 연구위원 최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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