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 종묘 2
▣ 정전正殿(국보 제227호)
종묘는 조선 역대 국왕과 그 비妃의 신위를 모신 곳이며, 정전과 영녕전 2곳이 있다. 정전은 종묘의 중심 건물로 영녕전과 구분하여 태묘太廟라 부르기도 한다. 종묘에는 모두 왕과 왕비 49분, 조천되신 왕과 왕비 34분이 각각 정전과 영녕전에 19실과 16실에 나누어 모시고 있다.
태조 이성계는 1392년에 조선왕조를 일으켜 세웠다. 1394년(태조 3) 8월, 한성을 조선왕조의 도읍지로 정하고, 이 해 10월 28일 고려의 옛 도읍지 개경에서 천도를 결정하여 터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다음 해인 1395년(태조 4) 9월 29일에 새 궁궐과 함께 종묘도 준공된다. 준공된 종묘는 대실大室 7칸인데, 대실 안에는 석실石室 5칸을 만들고. 좌우에는 익랑翼廊을 각각 2칸씩 이어 지었으며, 그 외에 별도로 공신당功臣堂 5칸, 신문神門 3칸, 동문 3칸, 서문 1칸 규모의 건물을 지은 다음, 이 건물 주위를 빙 둘러 담을 쌓았다. 그리고 담 밖에는 신주神廚 7칸, 향관청享官廳 5칸, 좌우 행랑行廊 각각 5칸, 남쪽 행랑 9칸, 재궁齋宮 5칸을 지었다. 종묘가 완성되자 태조는 날을 받아 1395년(태조 4) 10월 태조의 4대조인 목조穆祖와 효비孝妃, 익조翼祖와 정비貞妃, 도조度祖와 경비敬妃, 환조桓祖와 의비懿妃의 4대 신주를 개성에서 옮겨와 봉안하였다.
종묘는 제3대 태종대에 이르러 건축 형식이 정착하게 된다. 태종은 종묘 정전 건물 양끝에서 직각으로 앞으로 꺾여 나온 동·서월랑東西月廊을 신축하고, 종묘의 담 바깥 서남쪽 모퉁이에 있는 공신당을 종묘 담 안 묘정廟庭 아래, 즉 동쪽 계단 아래로 옮기고, 또 제기고祭器庫와 재생방宰牲房 등 부속건물을 지어 종묘의 제례 기능을 정비하였다. 또 태종은 향관이 재계하는 처소를 재전齋殿 동남쪽 낮은 곳으로 옮기게 하여 건축물 상호간의 위계를 확립하고, 둘레담과 하마비를 세워 종묘건축의 격식을 갖추게 만든다.
정전은 제13대 명종 때에 이르러 종묘 정전의 부족한 감실을 해결하기 위해 4칸이 증축되어 그 규모가 모두 11실(칸)으로 된다. 그 후 종묘는 1592년 7년전쟁(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었다. 재건에 대한 구체적인 작업이 진행되지 못하다가 마침내 1608년(선조 41) 1월에 재건 공사를 시작하여 5개월 후인 광해군 즉위년에 제1∼11실을 완공하였다. 그 후 1726년(영조 2)에 제12∼15실, 1836년(헌종 2)에 제16·17실, 그리고 1870년(고종 7)에 제18·19실을 이어서 증축하였다. 현재 정전은 한국에서 가장 긴 목조건물로 남아 있다.
정전 일원은 네모나게 담으로 둘러 싸여 있고, 묘정을 중심으로 남쪽 담 중앙에 신문神門, 동·서쪽에 제례 때 제관이 출입하는 동문과 악공樂工과 종사원이 출입하는 서문이 각각 나 있다. 신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서 이중량二重梁을 한 5량가五樑架이고, 초익공이다. 각 칸에는 두 짝의 판문을 달았고 상부는 홍살로 되어 있다. 정전 동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 초익공의 5량가 가구架構로 신문과 거의 동일한 법식과 크기로 되었다. 다만, 기단 높이가 차이를 보인다. 정전 서문은 정면 1칸, 측면 2칸의 초익공 5량가 건물로 두 짝의 판문이 나 있으며, 상부에 홍살을 달았다. 남신문, 동문과 달리 임진왜란 후 광해군 때 재건 당시의 건물로 추정되며, 남문·동문과 달리 기둥에 약한 배흘림이 있다.
신문을 들어서면 동서 109m, 남북 69m가 되는 넓은 묘정 월대가 펼쳐 있다. 이 공간은 제관들이 제사를 드릴 때 대기하는 공간으로, 헌가軒架가 자리잡는 공간으로 사용된다. 묘정 월대는 단壇의 일종인데, 지면으로부터 단을 높여 다른 공간과 성격이 다르게 천상天上으로 이어지는 공간임을 암시한다. 궁궐의 정전 앞에 돌로 깔고 단을 올리지 않은 것과 대조가 된다. 묘정 월대의 중앙에는 남북을 잇는 신로神路가 신문에서 상월대 아래까지 연결되어 있다. 신로와 접한 동쪽 한 곳에는 전塼을 깐 방석 모양의 부갈위판簿喝位版을 두었고, 동문 밖과 동월랑 남쪽 아래 묘정에는 사각형으로 된 전하판위殿下版位와 세자판위世子版位가 각각 자리를 달리 하며 위치하고 있다. 묘정 월대는 장대석으로 쌓아 끝을 두르고, 그 상면은 박석薄石을 깔았고, 신로는 전塼을 깔았으며, 곳곳에 차일遮日 고리가 박혀 있다.
상월대 위 기단에는 길이가 101m인 정전 건물이 서 있는데, 정전은 매 칸마다 신위를 모신 감실 19칸, 그 좌우의 협실 각 2칸, 그리고 협실 양끝에서 남으로 직각으로 꺾여 나온 동·서 월랑 5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묘정 월대 남쪽 아래에는 동·서에 공신당功臣堂과 칠사당七祀堂이 각각 서 있고, 서북쪽 뒤에는 제향후 축祝과 폐弊를 불사르는 망료위望燎位라고도 하는 예감이 있으며, 동문 북으로 수복방守僕房이, 둘레담 밖 서북쪽으로는 전사청典祀廳과 제정祭井이 있다. 그리고 정전 서남측으로는 악공청樂工廳이 있고, 정전 서측 북으로는 영녕전 일곽이 있다.
기단은 장대석 바른층 쌓기로 하였으며, 그 위에 주좌柱座를 둥글게 다듬은 초석을 놓고 원기둥을 세웠다. 전면 반 칸은 퇴退 모두 개방하였고, 기둥 위에는 주두를 놓고, 이익공으로 결구하였으며, 처마는 홑처마에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다. 툇간과 각 실 바닥은 강회다짐이고, 천정은 넓게 방형으로 귀틀을 짜고 그 위에 판장으로 천장을 설치해서 칸이 넓은 우물천장이 되었다. 측면과 배면은 모두 전으로 두껍게 벽체를 쌓았으며, 처마는 홑처마에 지붕은 맞배지붕을 이루었다. 용마루와 기타 마루에는 양성을 하고, 취두鷲頭와 잡상雜像들을 늘어놓아 장식하였다.
정전 전면前面은 각 칸마다 두짝씩 판문板門을 달아 안으로 열고 닫히도록 하였으며, 중앙 칸에는 밖으로 빗장을 달았다. 문하방 좌우에는 신방목이 있고, 신방목 머리에는 삼태극이 조각되어 있다. 문 외부에는 발을 칠 수 있게 되어 있어, 제향 때에 판문을 열고 발을 널어 뜨리고 제의를 행한다. 내부는 전체를 벽체로 칸막이를 하지 않고 하나의 공간으로 되어 있으며 후퇴칸에는 각 칸마다 신주를 모신 감실을 두었다. 감실에는 신주가 서측에 왕, 동측에 왕비의 위치로 봉안되어 있고, 감실 전면에는 신탑神榻이 있어 제향 때 신주를 모시도록 하였다.
종묘 정전 감실은 서측을 상上으로 하여(以西爲上) 제1실인 서쪽 첫 번째 칸에 태조의 신위가 모셔져 있고, 동쪽으로 차례로 태종(3대), 세종(4대), 세조(7대), 성종(9대), 중종(11대), 선조(14대), 인조(16대), 효종(17대), 현종(18대), 숙종(19대), 영조(21대), 정조(22대), 순조(23대), 문조(추존), 헌종(24대), 철종(25대), 고종(26대), 순종(27대)과 각 왕의 비妃를 합쳐 모두 49위의 신위가 19감실에 모셔져 있다.
이곳에 모시지 않은 왕의 신위는 이 건물 서쪽에 있는 영녕전永寧殿(보물 821)에 봉안되어 있다.
▶ 정전 동문
전사청 앞 마당에서 본 정전의 동문. 전사청에 딸려 있는 상생위와 천막단. 그리고 정전을 관리하는 수복방과 정전 동문 앞의 단이 보인다.
정전으로 들어갈 때 왕과 세자가 대기하는 단.
동문에서 본 정전의 동월랑. 좌측으로 정문인 신문이 보인다.
▶ 정전 정문
동문에서 돌아 나와 정문으로 가는 길. 담이 길게 쳐져 있다.
정전의 정문에서 본 재궁 건물과 악공청 건물. 배수구가 보인다.
정전의 정문인 신문. 그 너머로 정전이 보인다. 신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되어 있다.
▶ 정전 내부
좌(서), 우(동), 전면(남)에서 본 정전. 지붕의 색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양쪽 날개 건물을 제외하고 본 건물의 회랑은 19칸으로 되어 있다. 돌로 깔
아 놓은 넓은 마당은 하월대라 하고, 건물이 있는 기단은 상월대라 한다. 상월대는 101m이고, 하월대는 109m이다. 좌측에서부터 제1대 태조의 신
위가 시작된다. 중앙으로 검은 색 길이 보이는데, 신로이다. 신로 우측(동쪽)에는 전塼을 깐 방석 모양의 부갈위판簿喝位版이 있다. 왕 혹은 왕비가
죽으면 궁궐 내에 설치된 혼전에서 3년상을 치르고 이곳으로 신위를 모시고 와서 의식을 치른 다음에 정전에 모시게 된다. 이때 의식을 행하는곳이
부갈위판이다.
좌(서쪽), 우(동쪽)에서 본 상월대.
동쪽에 있는 동문과 익랑 및 월랑, 서쪽에 있는 서문과 익랑 및 월랑. 월랑의 경우 동쪽과 서쪽이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정전의 19칸 회랑 모습.
정전에서 정문으로 본 모습. 정문을 들어서면서 우측에는 배수구가 있다.
종묘 정전의 배수구의 모습.
서쪽에서 동쪽으로 본 칠사당七祀堂과 공신당功臣堂. 칠사당은 토속신앙과 관련된 일곱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사명司命·호戶·조·문門·여·
행行·중류의 신들이 있다. 이 가운데 사명과 여를 제외한 다섯 신은 따로 오사五祀라고 한다. 사명司命은 삼명三命의 감찰을 주관하고, 호戶는 출입
을 주관하고, 조는 음식을, 문門은 출입을 주관하고, 여는 살상과 형벌을 주관하고, 행行은 도로의 행작行作을 주관하고, 중류는 거처를 주관한다.
공신당은 국가와 왕실에 공을 세운 신하들을 기리고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임금의 생존 시에 공로가 큰 신희들의 신위를 해당 임금의 묘
정廟庭에 함께 모셨다. 태조의 공신 조준趙浚(1346~1405년)을 비롯하여, 제27대 순종의 공신 서정순徐正淳(1835~1908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19분의 왕 신위에 배향된 83위의 공신이 모셔져 있다.
공신당.
종묘 정전 뒤편의 모습.
▶ 정전 서문
정전 서문. 일반인들이 드나드는 문이다.
▶ 정전 악공청
정전 악공청.
▣ 영녕전永寧殿(보물 제821호)
영녕전은 1421년(세종 3)에 6칸 규모로 건립되어 그 해 12월 목조穆祖의 신주가 제1실에 옮겨진 이래 170여 년을 내려오다가 1592년 7년전쟁(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맞이하여 소실되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영녕전 10칸으로 중건되었고, 1667년(현종 8)에 다시 12칸으로 중건되었으며, 1836년(헌종 2)에 16칸으로 개수되었다. 현재 정면 16칸, 측면 4칸이다.
조선에서는 국왕이 승하하면 종묘 정전에 모시었다가 5세의 원조遠祖가 되었을 때 영녕전으로 옮기어 모시게 되어, 영녕전을 천묘遷廟한다는 뜻의 조묘祖廟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지금 이곳에는 태조 선대의 4조祖인 목조·익조翼祖·도조度祖·환조桓祖를 비롯하여 정종·문종·단종, 기타 추존된 왕과 왕비, 그리고 1973년 의민황태자(영왕) 등 34위의 위패를 16실에 봉안하고 있다.
영녕전의 정문.
영녕전 정문 밖에서 본 영녕전과 악공청.
좌(서쪽), 우(동쪽), 정면(남쪽)에서 본 영녕전.
영녕전의 악공청.
DCN 전쟁사위원회 권순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