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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Dec
관우의 현신, 동묘
작성자:
한국의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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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의 현신, 동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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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년 전쟁과 명나라
1592년 4월 13일, 일본은 조선과 명나라를 정복하기 위해 조선을 침략했다. 조선과 명나라는 몇 해 전부터 일본의 침략을 예상하고 있었으며, 침략 1년전부터는 방어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1592년(임진년, 선조 25년) 4월,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을 때, 명나라는 여러 경로를 통하여 이미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다는 사실을 접하고 있었다. 일본의 북상이 너무 빨라서 조선이 일본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사신을 파견하기도 했다.
조선의 역사 기록(국가의 공식적인 기록인 조선왕조실록과 그 당시에 활동했던 관료, 의병장, 기타 백성들의 기록인 문집)을 읽어보면, 조선의 사신이 명국에서 명군의 파병을 관철시킨 것을 기대 이상으로 미화시키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명나라는 조선이 소국으로서 의리를 지킨 것과 조선의 사신이 명국에 와서 울며 간청한 것에 대한 답례로 파병을 결정한 것일까?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사신으로 명국에 들어가 있었던 사람도 있었고, 전쟁 발발 후 명국에 들어간 사신도 있었다. 그리고 선조가 피난을 가면서 공식적으로 파병 요청 사신이 가기도 했었다. 명나라가 이러한 사람들의 눈물겨운 요청에 의해서 파병을 했던 것일까? 조선의 역사 기록에는 이러한 사람들의 고군분투가 명군의 파병을 이끌어낸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명나라는 조선의 기록과는 달리 명나라 자체를 보호하기 위해 조선이 일본의 길잡이라는 의심을 품고 있는 상태에서도 이미 6월 2일 조선으로의 파병에 대한 대원칙을 결정해 놓고 있었다. 이러한 결정은 명나라의 동쪽 최전방인 요동성에도 전달되고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왜냐하면 파병 사신(청원사請援使)으로 요동성에 간 이덕형이 요동순무도어사遼東巡無都御史(순무도어사는 황제의 명령을 받고 지방을 시찰하는 중앙 관리) 학걸에게 여섯 차례나 글을 보내고 그의 집 마당에 엎드러 하루를 울며 구원병 급파를 빌어 이에 학걸이 명 조정의 승인을 얻기도 전에 휘하 군사 가운데 5,000명을 임시로 파견하기로 하고 선발대 1,000명을 먼저 보냈기 때문이다.
요동순무도어사가 과연 '명 조정의 승인을 얻지 않은 채' 단순히 이덕형의 간청에 못이겨 증원군을 먼저 보냈던 것일까? 요동지역의 서북방 지역에 위치한 영하寧夏에서는 몽골인 발배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숨을 고르고 있었던 중이었다. 일개의 지방순찰관리가 자기 마음대로 파병을 결정하였을까?
선발대 1,000명을 먼저 보낸 것은 6월 중순경이고, 나머지 4,000명은 7월 초에 압록강을 건넜다. 요동순무어사 학걸에게 파병 대원칙이 전달되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추정할 수 있고, 긴급시 지역 최고 책임자(요동지역에서는 요동순무도어사인 학걸)에게 재량권과 군사 발동권을 부여했으리라 보여진다.
1592년 7월 초, 요동 부총병 조승훈의 병력 5,000명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최초 파병된 이후 명군은 7년 전쟁이 끝난 1598년에 철군을 시작하여 1599년 4월에 대부분 철군하였다.
명군 파병으로 인하여 조선이 기사회생하게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주도하에 유엔군이 진주하여 대한민국을 수호해낸 것처럼 명군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압록강에 임계철선을 설정하고 조선에 진주하여, 결과적으로 조선에게는 조선수호의 든든한 방패막이 되었다.
미군이 대한민국에 진주하여 많은 피해를 입힌 것과 같이 명군 역시 조선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그러한 피해는 대한민국이나 조선이 감당해야만 한다. 그들이 피해를 입힌 것에 대해서는 감정적으로 분노가 있겠지만, 그것은 값싼 감상에 불과할지 모른다.
역사의 엄연한 현실은 모든 국가가 자국의 이익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다. 미군 역시 그러했고, 명군 역시 그러했다. 북한군을 밀어내고, 일본군을 밀어내는 과정에서 대한민국 국민이나 조선의 백성은 많은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은 대한민국 지도자와 리더자, 그리고 조선의 왕과 관료들의 정치 실패로 인한 것과 비교했을 때는 아무것도 아니다.
미군과 유엔군의 참전으로 대한민국이 수호되었다는 감사의 표시로 대한민국 정부는 유엔묘지와 각종 기념탑을 세웠고, 조선은 명나라의 참전으로 조선이 지켜졌다는 은덕의 표시로 명군의 요청에 의해 관왕묘를 세웠다.
1592년의 7년 전쟁(임진왜란과 정유재란), 1950년의 한국전쟁, 358년의 역사적 시간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가? 역사적 사실은 '명분은 신의와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참전하지만, 실리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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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유엔군 참전 기
◈ 동관왕묘東關王廟(동묘東廟)-보물 제142호
서울 동대문(흥인지문. 보물 제1호) 밖에는 동묘가 있다. 원래 명칭은 동관왕묘東關王廟이다. 이는 중국 촉한(221~263)의 유명한 장군인 관우(후에 안무왕安武王이 됨)에게 제사지내는 묘다. 관우는 장비와 더불어 유비의 막하 장수였고, 그 유명한 제갈량도 유비의 참모였다.
관우를 모시는 사당이 지어지게 된 이유는 조선 제14대 왕인 선조(재위 1567년~1608년) 때 정치, 경제, 국방의 실패로 말미암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명군이 참전하게 되면서부터이다. 조선과 명나라가 일본군(왜군)을 물리치게 된 까닭이 성스러운 관우 장군께 덕을 입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역사적 기록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조선의 영토에 관왕묘를 최초로 세운 곳은 남대문(숭례문) 밖 남산 기슭이다. 남관왕묘라 불렀다. 7년전쟁의 마지막 해인 1598년(선조 31년) 4월 명의 유격장 진인陳寅이 그가 머물던 남산 기슭에 관왕묘(남묘)를 세우고 관우와 주창周倉(관우 부하)의 초상을 모셨다. 이것이 관우신앙의 시작이었으며, 이때 남묘를 세우는 데는 명의 양호楊鎬) 등 명나라 장수들이 은銀을 바치고, 조선 조정에서 일부 경비를 보조하였다. 이를 계기로 전라도에는 남원과 강진, 경상도에는 안동과 성주에 관왕묘를 세웠다.
동묘는 1599년(선조 32년)에 짓기 시작했다. 명나라의 신종神宗(만력제, 재위 1572~1620년, 조선 선조와 마찬가지로 초기에는 나라를 다스리는데 힘을 다했지만 중후반기에 황제의 역할과 정무를 내팽개쳐 정치적 혼란을 가중시키고 멸망으로 이끌었다)이 조선에 출정出征한 장병들을 위하여 1600년(선조 33년) 금 4000냥과 왕이 직접 액자를 쓴 편액을 만세덕萬世德 편에 칙서와 함께 보내 건립한 것이다. 선조 역시 대신을 파견하여 돕도록 했으며, 3년 공사 끝에 1601년에 완성하였다.
현재 건물 안에는 관우의 목조상과 우측에 그의 친족인 관평關平과 부하 조루趙累, 좌측에 부하 주창周倉과 옥보(玉甫)를 배치하였다. 동묘의 정전은 정면 5칸, 옆면 4칸으로 앞쪽에 정면 5칸, 측면에 1칸의 배례청이 부설되어 있다. 공포控包는 익공계翼工系이며 겹처마이고 지붕은 '丁'자형인데 기와골에 막새와 마루의 양성이 있고, 위치에 따라 취두鷲頭·용두龍頭·잡상雜像이 장치되어 있다. 평면의 특징은 앞뒤로 긴 직사각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과 옆면과 뒷면의 벽을 벽돌로 쌓았다는 점이다. 또한 건물 안쪽에는 화려한 장식이 돋보이는데, 이와 같은 특징들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한국의 다른 건축들과 비교해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문화재청)
지역
명칭
위치
창건
주창자(관련자)
비고
참고
한성
남관왕묘
숭례문 밖
(도동1가 1번지, 현 동자동)
1598. 4 유격장 진인
최초의 관왕묘, 한국전쟁으로 피해,
사당동으로 이전
동관왕묘
흥인문 밖
1601년
3년 공사, 중국의 관왕묘를 그대로 모방
강진
고금도
수군제독 진린
1684년 개수, 이순신과 진린을 별사에 배향
안동
안동읍성 안
1598년
진정영도사 설호신
1609년 서악의 동대로 이전
남원
남원읍성 서문 밖
(남원시 왕정동 51번지)
1599년 도독 유정 남원 관왕묘 성주
성주읍성 서문 밖 1598년 모국기 1727년(영조 3년) 현재의 자리로 이전 성주 관왕묘 개성
평양
한성
북관왕묘
종로구 명륜동1가 2
1885년
(무녀 진령군 이씨)
1885년 중건, 1913년 동묘에 합사
서관왕묘 서대문구 천연동 98
1902년 엄귀비 전주
관성묘
(관제묘)
전주시 완산구 동서학동
2가 613
1885년
남고산성 별장 이신문, 전라감사 김성근
하동
◈ 동묘 답사
동묘는 서울 종로구 숭인동에 있다. 이곳 동묘에는 동묘의 담을 따라 벼룩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고서점, 잡화점, 길거리 음식, 노점상 등이 담을 따라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한마디로 풍물거리다. 문화재를 보호한다는 관점에서는 이러한 노점상의 모습이 썩 어울려 보이지는 않는다. 온갖 쓰레기와 오물들이 쌓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초들의 삶의 터전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문화재의 가치는 훨씬 더 낮아 보인다.
동묘를 찾던 날도 어김없이 민초들은 담을 따라 노점을 차려 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동묘의 정문에도 노점상이 있어 사진을 제대로 찍지 못했다. 정문을 들어서니 동묘의 정전을 수리하는 중이어서 중문 앞에는 철망이 처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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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문 앞에서 정문 안쪽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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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 안쪽에서 동묘 전체 모습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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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구멍 사이로 보이는 비둘기의 모습이 참으로 한가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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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문 앞 좌우측에는 '대소인원개하마'와 '금잡인'이라는 비석이 서 있다. 하마비는 덕수궁에도 있다. '잡상인 출입 금지'라는 비석이 조금은 우습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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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문에서 동묘의 정전과 좌우에 배치된 배례청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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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N 국방시민연대 전쟁사위원회 위원장 권순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