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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궁궐, 경복궁 4
◈ 향원정香遠亭
향원정은 연못에 섬을 만들고, 그 위에 2층 규모의 기와지붕을 얹었다. 누각의 평면은 정육각형이며, 장대석長臺石으로 단을 모으고, 짧은 육모의 돌기둥을 세웠다. 1·2층은 하나의 나무 기둥으로 세웠으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4분합四分閤을 놓았다. 1867∼1873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바라 본 향원정. 북악산이 보이고, 근래에 복원한 건청궁이 보인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바라 본 향원정. 인왕산이 보인다.
◈ 건청궁乾淸宮
경복궁 안에 있는 궁궐 중 가장 북쪽에 있는 궁궐로 명성왕후가 일본의 낭인들에게 시해당한 곳이다. 건청궁은 1873년 고종이 경복궁 중건을 마무리하면서 국가 재정이 아닌 내탕금(왕의 사비)을 들여 궁궐 안의 가장 깊숙한 곳에 짓기 시작하였다. 이 해에 고종은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종식하고 친정을 선언하였는데, 이 때문에 건청궁 건립은 고종이 대원군의 그늘에서 벗어나 정치적으로 독립하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고 풀이되기도 한다. 고종은 1884년부터 이곳에서 기거하면서 정무를 처리하였다. 1887년 국내 최초로 전기가 가설되었다. 1895년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켜 건청궁 안의 곤녕합坤寧閤에서 명성황후를 시해하였다. 명성황후의 시신은 옥호루玉壺樓에 잠시 안치되었다가 건청궁의 뒷산인 녹산에서 불태워졌다. 고종은 아관파천 후 건청궁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주인을 잃은 건청궁은 1909년 완전히 헐렸다. 광복 후 건청궁 자리에는 국립민속박물관이 세워졌고, 동쪽에 명성황후가 난을 당한 곳이라는 뜻의 '명성황후조난지지明成皇后遭難之地'라는 표석과 함께 당시의 참상을 그린 기록화가 전시되어 있었다. 건청궁은 2007년 복원되었다.
건물 배치는 크게 장안당長安堂(고종 침전)·곤녕합(왕비 침전)·복수당福綏堂(별채)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장안당 서쪽에는 각감청閣監廳이 있고, 남쪽에는 연못과 그 안에 만들어진 섬과 향원정香遠亭 등이 있다. 또 장안당 뒤쪽의 관문각觀文閣은 외국 외교관들을 접대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는데, 완전한 서양식 건물로 지어져 양관洋官이라고도 불렀다.
건청궁 서편에는 고종의 서재로 쓰인 집옥재集玉齎가 있는데, 전통 한옥이 아닌 중국식 벽돌로 지어졌으며, 집옥재 옆에는 전통 시계인 자격루 대신 서양식 시계탑이 들어섰다. 1887년에는 조선 최초로 전등이 설치되었는데, 이는 중국이나 일본의 궁정 설비보다 2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건청궁은 이처럼 신문물을 수용하여 근대화를 도모한 산실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의 근대화 의지가 외세에 의하여 꺾인 곳이기도 하다.
건청궁 밖의 서쪽과 북쪽에서 바라 본 전경. 건청궁 너머로 인공으로 쌓은 녹산이 보인다. 이곳 녹산에서 명성왕후의 시신이 불태워졌다.
건청궁 안의 뒤편인 관문각에서 바라 본 건청궁의 장안당과 복수당 전경.

건청궁의 정문인 건청궁 현판. 문을 들어서면 좌측과 정면에 문이 있다. 좌측문을 들어서면 장안당이, 정면에 있는 문을 들어서면 곤녕합이 있다.

곤녕합坤寧閤의 정문인 함광문含光門이다.
제일 왼쪽부터 곤녕합, 옥호루(남쪽 누각), 모서리 돌아서 사시향루四時香樓(동쪽 누각). 사시향루 옆으로 이어진 건물이 정시합正始閤(침전).
'곤녕坤寧'은 '땅이 편안하다'는 뜻인데, 왕비의 덕성을 드러낸 말이다.
1895년(고종 32)이 해를 을미년이다) 10월 8일 새벽, 이곳은 조선 주재 일본공사인 미우라 고로우(삼포오루三浦梧樓)의 지휘하에 일본군수비대·영사경찰·낭인배 등이 경복궁을 습격하고 건청궁으로 난입해 조선의 왕비인 민비閔妃(명성왕후)를 무참하게 살해하고 그 시신을 불태워 버린 야만적인 장소이다. '을미년에 일본인(왜)에 의해 변이 일어났다'하여 을미사변이라 한다.
명성왕후는 정확하게 어디에서 피살된 것일까? 곤녕합의 방안에서 피살되었는가? 아니면 마당에서 피살되었는가? 그것도 아니면 옥호루에서 그리 되었는가? 당시의 증언이 엇갈리는 가운데, 최근 그 당시의 일등영사였던 우치다 사다쓰지(내전정퇴內田定槌)가 작성한 문건을 시간대별로 정리하면, 먼저 명성왕후는 장안당과 곤녕합 사이의 뜰로 끌려 나와 시해당했으며, 그 다음 곤녕합 동쪽 건물인 옥호루 방 안에 안치되었다가, 마지막으로 시신을 건청궁 동쪽의 인공산인 녹산 남쪽에서 불태워지는 단계를 거쳤다.
곤녕합. 곤녕합의 뒤편에는 별채인 복수당이 있다.
정시각.
녹금당.
복수당과 곤녕합 북행각(북쪽에 있는 담) 사이에서 동쪽으로 바라 본 전경.
장안당. 누각 이름은 추수부용루秋水芙蓉樓이다.
장안당의 북행각(북쪽의 담)인 전기실. 빈 공간은 관문각이 있던 자리다.
건청궁 서편에서 북쪽과 남쪽으로 바라 본 전경. 암문이 있다. 수로가 보이는데, 북악산 물줄기가 이 수로를 통해 경복궁으로 들어온다.
북악산에서 흘러 내린 물이 경복궁 안으로 들어오는 수로. 좌측으로 고종이 서재로 사용한 집옥재가 보인다.
◈ 집옥재集玉齊
집옥재는 경복궁 내의 건청궁 안의 건물이다. 건물 3동이 있는데, 중앙이 집옥재, 왼쪽이 팔우정, 오른쪽이 협길당이다. 원래 이 건물들은 창덕궁 함녕전의 별당으로 지어졌으나, 고종이 1888년 거처를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옮기면서 함께 이전되었다.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 동쪽 아래에 있다.
집옥재는 고종이 서재로 사용하던 곳이며, 선대 임금의 어진御眞을 봉안하고 외국 사신들을 접견하는 장소로도 이용하였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다포맞배집 구조이다. 정면의 월대月臺 중앙에 놓인 계단에는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서수상瑞獸像을 새겼다. 경복궁 내의 다른 전각들과는 달리 당시로서는 신식인 중국풍의 서양식으로 지은 것이 특징이며, 현판도 중국 북송北宋 때의 서예가 미불米芾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만들었다.
팔우정은 팔각형의 2층 정자로 지어졌으며, 집옥재와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이 건물의 용도는 고종의 책을 보관했던 서고였다. 협길당은 고종의 휴식 장소로 이용되었다. 팔우정과 집옥재는 청나라풍 건물인데 반해 협길당은 고유한 조선식 건물로 온돌방을 두었다.
왼쪽부터 팔우정, 집옥재, 협길당.
집옥재. '집옥集玉'은 '보배를 모으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팔우정.
협길당.
임광문. 집옥재 왼편에 있는 문이며, 이 문을 통해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으로 간다. 신무문을 나가면 청와대다. 청와대 방문을 이곳으로 한다.
신무문. 청와대 구경은 이 매표소에서 표를 끊어야 한다. 청와대 경내에는 칠궁七宮이 있다. 칠궁은 조선조 500여년 동안 아들이 왕위에 오른 후궁
7명의 신주를 모셔 놓은 사당이다. 청와대에 예약을 하고 관람할 수 있다.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淑嬪崔氏의 묘, 원종元宗의 어머니 인빈 김씨仁
嬪金氏의 묘인 저경궁儲慶宮, 경종景宗의 어머니 희빈 장씨禧嬪張氏의 묘인 대빈궁大嬪宮, 진종眞宗의 어머니 정빈 이씨靖嬪李氏의 묘인 연우궁延
祐宮, 장조莊祖의 어머니 영빈 이씨暎嬪李氏의 묘인 선희궁宣禧宮, 순조純祖의 어머니 수빈 박씨綏嬪朴氏의 묘인 경우궁景祐宮, 영친왕의 어머니
인 순빈 엄씨淳嬪嚴氏의 신위.
신무문에서 바라 본 태원전. 경복궁에서 마지막으로 가 보아야 할 장소다.
◈ 태원전泰元澱
경복궁에서 왕과 왕비가 승하하거나 왕실의 가족이 돌아가시면 시신은 어디에 안치할까? 경복궁에서 제일 북쪽 서편에 태원전이 있는데, 이곳에 왕과 왕비, 그리고 왕실 가족의 시신이 안치된다. 원래 이곳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시던 건물인데, 나중에는 빈전殯殿이나 혼전魂殿, 영전靈殿 같은 제사와 관련된 전각들이 자리 잡았다. 빈전은 왕실에 돌아가신 분이 있을 때 관을 모셔두는 곳이고, 혼전은 종묘에 모실 때까지 만 2년 동안 위패를 모시는 곳이며, 영전은 돌아가신 분의 초상화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태원전 일대는 궁 안 외진 곳이어서 한적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고종은 태원전 재실齋室(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집)인 공묵재恭默齋에 머물면서 신하들을 만나보는 일이 많았다. 태원전 건물은 20세기 초에 철거되었다가 지금 옛 모습대로 건물이 복원되었다.
태원전 일대는 경복궁의 전체 면적 중에서 20%가 넘는 면적을 차지한다고 한다. 1961년 군사쿠데타 때 출동한 30사단이 주둔하였다가 청와대 경비를 위해 다시 1개 대대 병력이 주둔하였고, 12·12 사태 때는 핵심 인사들이 반란을 모의한 곳이라 한다. 이로 인해 오랫동안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었고, 궁궐은 기형적 구조로 전락하고 말았다. 태원전을 복원할 때 군병력 주둔 당시 군용차량의 출입으로 석유류의 폐유로 인해 태원전과 주변 땅이 오염되어 보수공사가 중단되기도 하였다. 토질 조사를 실시한 후 토양을 복원하면서 태원전 복원공사를 다시 시작하였다고 한다. 결국 태원전을 궁궐 본래의 용도로 되돌리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3년 공사에 64억원을 들여 2009년 1월 24일 개방하였다. 그러나 복원된 태원전 일대는 북궐도에 있는 경복궁 그대로 복원되지는 못했다. 청와대로 진입하는 효자로와 청와대로가 만나는 지점 주변이 도로에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태원전 정문인 달숙문達肅門의 동편에서 바라 본 전경. 왼쪽이 정문이고, 우측 2개의 문을 지나 보이는 전각이 공묵재다.
태원전 정면에서 바라 본 태원전 전경. 정문이 달숙문. 그 다음 문이 경안문景安門. 오른쪽 작은 문 안의 전각이 공묵재.
달숙문.
경안문.
태원전 전각의 태원전 현판.
태원전 오른쪽에 연결된 영사재永思齋. '영사永思'는 '오랫동안 생각한다'는 뜻.
태원전 뒤에 있는 숙문당肅聞堂. 숙문당은 돌아가신 이의 위패를 모시는 혼전魂殿이다. 이 서쪽 일대가 복원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경복궁의 전각들 모두를 둘러 본 다음, 경복궁을 나오기 전 경회루 뒤에서 북악산을 바라보며.
DCN 전쟁사위원회 위원장 권순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