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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44

07

2010-Jan

전쟁과 시장[48] - 일본이 전해준 철포(鐵砲·텟뽀-조총)

작성자: [레벨:16]한국의 산하 IP ADRESS: *.39.120.17 조회 수: 6127

전쟁과 시장[48] - 일본이 전해준 철포(鐵砲·텟뽀-조총)

-돈 없이 전쟁 할 수 없는 군비경쟁의 시대를 연 '조총'

-새로운 무기와 이를 취득할 경제력의 차이는 전투력의 차이를 극명하게 벌려놓았다

-조선의 왕과 문인 관료들은 그 효용을 과소평가해 가공할 무기를 창고에 처박아버렸다

 

정체 불명의 선박 한 척이 1543년 8월 25일 일본 규슈 남단에 위치한 다네가시마(種子島)에 표착했다. 남중국 광동을 출항한 그 배는 길이가 45m에 달하는 대형선이었다. 돛줄이 끊어지고, 노가 부러지고, 선창도 크게 손상을 입어 수리하자면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으로 예상됐다. 승선자 108명은 항만 인근 시온지(慈遠寺)에 출항 때까지 기거하게 됐다. 여기에는 포르투갈인 2명(제이모트와 몬카)이 있었다.

 

준수한 모습의 소년 토키타카가 시온지에 나타났다. 소년은 다네가시마의 도주(島主)였다. 토키타카는 포르투갈인과 매일 만났다. 어느 날 그는 포르투갈인이 가지고 있던 철봉이 무엇인지 물었다. 포르투갈인은 위력을 보이겠다고 했다. 토키타카는 시온지 뒤편 언덕에 올라갔다. 말뚝을 세우고 그 위에 큼직한 조개껍데기 하나를 올려놓았다. 철봉에다 검은 가루와 둥근 구슬을 집어넣은 다음, 불끈을 끼웠다. 철봉과 조개껍데기의 거리는 50보였다.불이 철봉의 끝에서 뿜어져 나오고 조개껍데기가 산산이 부서졌다. 토키타카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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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포, 상품으로 출시

 

토키타카는 철포(조총)를 잠시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 기능과 조작법을 열심히 배웠다. 12일째인 1543년 9월 9일, 토키타카는 철포 시사(試射)를 자원했다. 조준을 했고, 발사와 동시에 표적은 두 개로 갈라져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토키타카는 그동안 궁술을 연마해 왔지만 아직은 미숙한 상태였다. 그런데 철포는 달랐다. 단 한방에 깊은 감명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여기서 철포가 가진 전술적 가치를 간파했다.

 

토키타카는 포르투갈인에게 철포 양도를 요청했다. 총 2자루 값으로 2000냥(현재 가치 1억 엔가량)을 지불했다. 그 돈을 포르투갈인들이 섬에서 가지고 나갈 수는 없으리라. 배 수리비와 시온지에서의 숙박 비용은 무료라고 볼 수 없었다.

다네가시마에서는 철포의 국산화를 위해 섬의 모든 기능이 집중되었다. 일본도를 만들어 온 경험, 감(感), 솜씨는 소용이 없었다. 제1의 난관은 80㎝ 길이의 총열 제작이었다. 결국 짧은 통(筒)을 깎고, 그것을 용접해 하나로 붙였다. 제2의 난관은 총신의 통저(筒底)를 수나사와 암나사로 막는 것이었다. 그러나 암나사 깎는 법을 알지 못해 총열의 뒤 마개를 그냥 붙였다. 화약 찌꺼기의 제거가 곤란했다. 도화공(導火孔)이 잘 막혔고, 연사(連射)할 때는 화약재가 타다 남아 불발되거나 폭발의 위험까지 있었다. 결국 포르투갈인에게 아름다운 신부(若狹)를 주고 나사의 구조와 제조방법을 알아냈다.

1544년말 다네가시마에서 약 50정의 철포를 만들어 규슈에 수출을 한다. 최강 사쓰마번의 시마즈(島津)는 화력시범을 한다. 시마즈는 또 이를 쇼군 아시카가(足利)에게 바친다. 토키타카는 샘플을 먼저 돌려 구매력을 확보해놓은 셈이다.

 

돈 없이 전쟁할 수 없는 시대

 

1545년 다네가시마에 체류하고 있던 사카이의 상인이 철포의 구조와 제조법 등을 습득한 후 돌아갔다. 원래 사카이에는 주물사들이 집단 거주하고 있어 철포의 양산 체제를 만들 수 있었다. 겨우 2~3년 사이의 일이었다.

철포는 돈 없이 전쟁을 할 수 없는 군비 경쟁의 시대를 만들었다. 이전에야 조그만 영주들도 '깡'으로 버틸 수 있었겠지만 이후에는 엄청난 가격의 철포로 무장한 부대를 갖출 만큼의 경제력을 가진 부자 영주가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새로운 무기와 이를 취득할 수 있는 경제력의 차이는 전투력의 차이를 극명히 벌려놓았다. 철포는 고가였다. 그 대량생산의 기술과 시스템이 완성된 도요토미(豊臣)의 시대조차 철포는 쌀 9석의 가치였다.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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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가 젊었던 시기에는 그 3~4배의 가격이었을 것이다. 1590년 3월 한양. 대마도의 도주 소오 요시토시(宗義智)가 조선 조정에 나타났다. 선조에게 철포를 진상했다. 조선과의 교역에 사활을 걸고 살았던 그는 일본의 조선 침략이 이익이 될 리가 없었다. 철포를 가지고 온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무텟뽀(無鐵砲)의 조선

 

하지만 조선의 왕과 문인 관료들은 그 효용을 전혀 몰랐다. 철포를 시험 발사한 그들의 평은 이렇다. "발사음이 크고 탄환이 200m쯤 날아갔지만, 50m의 지근거리가 아니면 치명상을 가하지 못한다. 더욱이 비 오는 날이나 습도가 높으면 화약의 조합이 어렵고, 발사까지에 시간이 너무 소요된다는 약점이 있다. 반면 조선의 활은 200m 상거한 적의 가슴을 꿰뚫을 수 있으며 20~30발의 화살을 계속 날릴 수 있다. 철포보다는 연사가 가능하고 숙달된 조선의 활이 더 우수하다."

유성룡의 '징비록'에 따르면 요시토시가 선조에게 진상한 철포는 그 후 군기사(軍器司) 창고에 처박혀 버렸다고 한다. 조선의 왕과 관료들은 일본의 철포를 과소평가했다. 일본인들이 철포를 대량으로 생산하고 보유한 것은 병사들의 훈련시간이 짧았기 때문이며 철포의 보급으로 인해 단기간에 대병력의 양성이 가능했다. 기존의 활은 숙달된 기예를 가지기 위해서는 수년 이상의 기간이 걸린다.

 

높은 적중도 유지에는 더 긴 세월이 필요하다. 빨리 병력을 보충하고 전투에 배치해야 할 군사 지도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철포는 혁신적인 것이었다. 기존의 '활+백병전'에서 급속도로 집단 화력전으로 이행됐다. 일본에서 5할이 철포부대였다. 물론 당시 일본의 철포는 세계에서 가장 명중률이 높은 병기가 돼 있었다. 전래 50년 만에 유럽 수준을 능가하는 철포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요시토시는 거듭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한다는 정보를 전했다. 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들고 수군을 정비한 것도 이러한 정보들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왕은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무고와 선조의 과대망상이 만들어낸 정여립의 난으로 1000여 명 이상을 학살하는 대참극을 연출한다. 당시 선조는 요시토시가 무려 9개월간이나 서울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잊었다.

 

침략을 받고서 도입된 철포

 

요시토시는 조선의 왕과 중앙의 관료들이 일본의 침공을 실감하지 않자 1592년 초 마지막으로 경상도관찰사에게 공문을 보낸다. "일본군의 조선 침략이 임박했습니다." 그해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했다. 가토 기요마사의 우선봉장이던 어느 왜장이 휘하의 철포부대 500명과 함께 경상도병마절도사 박진에게 귀순했다(4월 20일). 사야가(沙也可·김충선)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철포와 화약 제조법을 조선군에 전수했다.

 

"소장이 화포와 철포 만드는 법을 알고 있으니 이 기술을 군중에 널리 가르쳐 전투에 쓴다면 어떤 싸움엔들 이기지 못하리까?" 귀화를 선언한 직후 사야가 김충선이 절도사에게 보낸 서신이다. 다음은 이순신 장군이 보낸 서신에 대한 김충선의 답신이다. "하문한 조총과 화포와 화약 만드는 법은 전번에 조정에서 내린 공문에 의해 벌써 각 진에 가르치고 있는 중이옵니다. 총과 화약을 대량으로 만들어서 적병을 전멸시키기를 밤낮으로 축원하옵니다."

 

병리적 이념과 시장의 상극

 

임진왜란이 끝나고 11년 후 광해군은 일본과 외교를 재개했다. 조선과 교역에 목을 매는 대마도주의 역할이 컸다. 하지만 그것은 급변한 국제정세 때문이었다. 만주에서 누루하치가 후금(청)을 건국하고 명나라에 압력을 가했다. 임진왜란을 직접 지휘한 광해군은 현실주의자였다. 일본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하고, 철포부대 1만 명을 양성했다. 이때가 조선 화력의 최절정기였다.

 

하지만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밀려나고 조선에 비현실적인 정권이 들어섰다. 그들은 임진왜란 당시 축적된 소중한 전쟁 경험을 모두 사장시켰다. 유능한 자들을 숙청하고 말 잘 듣는 무능한자들을 등용했다. 노골적인 반청숭명(反淸崇明)의 구호를 외쳤다.

 

1636년 12월 9일 압록강을 도하한 청군이 16일 만에 인조가 숨어있는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20만의 병력이었다. 이듬해 1월 30일 인조는 세자 등 500명과 함께 성문을 나와 삼전도에 설치된 수항단(受降壇)에서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례를 했다. 그리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끌려갔다.

 

철포는 분열된 일본을 통일시키고(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안정된 나라를 만들어냈다(도쿠가와 막부). 하지만 조선은 임진왜란을 경험하고 또 다시 능욕(병자호란)을 당해야 했다. 그리고 이미 사라진 명나라를 숭상하는 병리적인 유학자들이 계속 조선을 지배했다. 무인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신무기는 변화를 가져오지만 유학자들의 조선에서는 임란 이후 320년 동안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유학적 이념과 시장은 상극이기 때문은 아닐까? 지금 북한은 어떠한가.

 

▶정여립(鄭汝立·1546~1589)

 

전주에서 태어났다. 1570년(선조 3)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1583년(선조 16) 예조좌랑을 거쳐 이듬해 수찬이 되었다. 처음에는 이이와 성혼의 문하에 있으면서 서인에 속하였으나, 이이가 죽은 뒤 동인에 가담하여 이이를 비롯하여 서인의 영수인 박순·성혼을 비판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 이후 진안군의 죽도에 서실을 세워 활쏘기 모임을 여는 등 사람들을 규합하여 대동계를 조직했다. 1587년(선조 20)에는 손죽도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쳤다. 1589년(선조 22) 황해도 관찰사 한준 등이 정여립 일당이 한양으로 진격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고발하였다. 관련자들이 차례로 잡혀가자 정여립은 아들과 함께 죽도로 도망했다가 관군에 포위되자 자살했다. 동인인 이발 이호 백유양 등이 정여립과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처형되었다(기축옥사). 그가 대동계를 조직해 무력을 기른 것은 이이의 십만양병설에 호응하였기 때문이었다.

 

▶다네가시마(種子島)

 

일본 규슈(九州) 남단 오스미(大隅) 반도 동남쪽 바다에 떠 있는 섬이다. 동서는 4~10㎞에 불과하지만 남북은 72㎞이나 된다. 면적은 475㎢. 제주도보다는 작지만 거제도보다 큰 섬이다. 현재의 인구는 약 3만5000명.

 

 

 

DCN 국방시민연대 전쟁사위원회 연구위원 서영교(충남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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