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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Jan
전쟁과 시장[47] - 일본을 부국으로 만든 조선의 기술
작성자:
한국의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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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시장[47] - 일본을 부국으로 만든 조선의 기술
-일본이 모셔간 조선 제련기술, 총칼이 돼 돌아왔다
-정작 자국에선 하찮게 여긴 한 조선인의 은가공 기술이 日로 건너가 히데요시의 강병에 일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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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폭 병풍에 그려진 포르투갈 선박의 나가사키 입항도. 포르투갈은 중국에서 비단 향약 등을 들여와 일본에 팔고 그 대금으로 막대한 은을 받아갔다
"전투에 임하는 자는 개(犬)라고 불리어도 좋고, 축생(畜生)이라고 불리어진다고 해도 좋다. 이기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조창종적화기'·朝倉宗滴話記). 인품의 여하를 막론하고 전투원으로서의 자질이 있는 무사가 제일이었다. 15~16세기 일본은 수많은 나라(國)들로 나뉘어 있었다. 영주, 다이묘(大名)들은 끝이 보이지 않은 전쟁을 계속했다.
장기적인 안목도 가질 필요가 없었다. 오늘 당장 승리하지 않으면 내일이 없었다. 승리의 전제는 강병이었고, 강병의 전제는 부국(富國)이었다. 일본의 영주들은 부국강병의 기반이 되는 온갖 수단을 강구했다. 농업 생산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새로운 경작지를 개발했다. 일본 전역에 94만 정보이던 농토가 전국(戰國)시대 말기에 163만 정보까지 늘어났다. 영주들은 전쟁으로 영지를 늘인 다음 세금인 연공미(年貢米)를 팔아서 돈으로 교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연공미로 전쟁자금을 감당할 수 없었다. 영주들은 은광개발에 경쟁적으로 뛰어들었다.
세계 최대 은광의 발견-이와미긴잔(石見銀山)
혼슈의 시마네현에 대규모 은광이 발견되었다. 하카다(후쿠오카)의 상인 가미야 히사사다는 영주 오우치의 후원 아래 1526년 3월 긴푸산 허리에서 은을 채굴했다. 이와미긴잔(石見銀山)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영주 오우치가 규슈 공략에 눈을 돌린 1530년 지방의 소영주 오가사와라가 은광을 탈취하였다. 오우치 가문이 이 광산을 다시 찾는 데 3년이 걸렸다. 오우치는 광산주변을 요새화하였다.
하지만 광산에서 채굴되는 은광석에 다량의 납이 함유되어 있었다. 광석에서 은과 납을 분리하는 데 너무나 많은 노력과 돈이 들었다. 오우치 영주는 초조해졌다. "은을 함유하고 있는 광석은 무궁무진하다. 하지만 제련하는 기술이 발달되지 않아 생산이 늘지 않아!" 그러던 가운데 조선과 교역을 해왔던 규슈의 하카다(후쿠오카) 상인들이 조선에서 은과 납의 분리법이 이미 개발되었다는 정보를 가지고 왔다.
"조선에 김감불이라는 사람과 그 노비 검동이 소나무재를 이용한 연은분리법(鉛銀分離法)이란 것을 개발해냈다고 합니다."(1503년 연산군 9년). 기술은 1533년 하카다의 거상 가미야가 조선반도로부터 초청한 경수와 종단이란 연금술사에 의해 이와미 은 광산으로 들어왔다. 스페인령 멕시코에서는 수은을 이용한 아말감법이 사용되면서 은의 생산량이 급증한 것처럼 조선의 기술은 일본의 은 생산량을 비약적으로 증가시켰다. 이와미 1개 광산의 은 생산량이 당시 전 세계의 1/3을 차지하였다. 17세기 초 일본 전체의 은 해외 수출량은 연 200t에 달했다('고바타').
오다 노부나가의 용병
현재 도요타자동차 공장이 집중되어 있는 나고야의 '오와리' 지방에 440년 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라는 영주가 있었다. 그는 '돈으로 움직이는 병사'를 만들었다. 이 때문에 영지가 없는 자들도 용병대장으로서 수백을 지휘할 수 있었다. 영주가 농민병을 움직이려면 직위가 높은 신하들이 주변에 포진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합의제가 형성되어 오히려 움직임이 둔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농민병은 농번기에 들어서면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가 씨를 뿌리거나 수확해야 한다. 노부나가 방식의 용병은 씨를 뿌리거나 수확을 하는 농사를 짓지 않아도 된다. 용병은 우범자나 전국각지를 돌아다니는 행상으로 충원되기 때문에 수가 줄어들어도 얼마든지 보충이 가능하다. 문제는 돈이었다.
자유시장-낙시낙좌(樂市樂座)
노부나가는 자신이 점령한 지역 시장에 개혁정책을 폈다. 낙시낙좌(樂市樂座)의 자유시장을 개설했다. 은 생산이 늘면서 일본의 상품 유통이 많아지고 넓은 범위에 걸쳐 물자의 흐름이 생겨났다. 하지만 정상적인 유통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사원과 공가(천황의 신하) 등의 구세력에게 독점적인 판매권을 부여받은 상인조합(座)에 속하는 상인들로 한정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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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노부나가. 포르투갈의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이렇게 평가했다. "노부나가는 명예욕이 강하고 과감한 행동가였다. 전쟁은 썩 잘 하지만, 제멋대로 행동하고 횡포가 심하다. 신불(神佛)은 물론 그 밖의 우상도 모두 경멸하는 자다."
이 좌석(座席)을 갖지 못하면 시장에서 상행위가 불가능했다. 낙시낙좌는 시장의 좌석에 관계없이 누구라도 일정의 자릿세만 내면 자유롭게 영업을 할 수 있는 시장이었다. 구시대의 권위가 부정되었다.
자유시장에는 많은 사람이 모였다. 노부나가의 주위에는 혼돈스럽지만 에너지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들은 또 엄청난 정보원이었다. 노부나가는 정보가 전국 난세를 평정하는 데 중요한 무기라는 것을 숙지하고 있었다. 그의 부하 히데요시(秀吉)는 부랑자 행상 출신이었다.
이후 노부나가는 최후의 거성 아즈치(安土)의 성 아래를 시작으로 오미(近江) 미노(美濃) 이세(伊勢) 호오료쿠(北陸)등에 차례로 자유시장을 열었다. 이어 사카이(界)와 오쓰(大津)의 상업도시를 제압하고 새로운 상업정책을 실시해 막대한 자금원을 창출해냈다. 나아가 그는 사카이, 쿠사츠(草津), 이쿠노(生野)에 있는 은광을 차지하여 부를 쌓았다.
당시 노부나가 소유의 사카이는 일본 최대의 철포 생산지이자 화약의 연료인 초석(硝石)의 수입 항구였다. 초석은 일본에서 생산이 안 되고 중국이나 인도에서 수입했다. 노부나가가 철포대를 투입하여 강력한 다케다(武田)의 기병을 타도할 수 있었던 것은 경제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노부나가가 소유한 철포병은 사격 후 재장전까지의 시간은 10초 내외였다. 완전 수동인 철포를 탄창 단발 화기에 가까울 정도로 훈련을 시켰다. 최대의 숙적 다케다 군과의 전투에서 철포병의 운용은 획기적인 면을 보여 주었다. 3000명을 1000명씩 3줄을 만들어 기마병의 진군 속도에 맞추어 1대가 사격 후 뒤로 빠지고 그 다음 후속대가 사격을 하는 식으로 재장전의 타이밍을 최소화하여 다케다의 1만의 기마부대를 괴멸시켰다(1575년). 이로써 노부나가는 전국시대 일본 통일의 길을 열었다.
일본에서 노부나가가 오와리의 영주자리를 놓고 혈육들과 내전을 치를 무렵 조선에서는 미래의 왕이 될 사람(선조)이 태어났다(1552년). 노부나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같은 떠돌이 장사꾼들을 자신의 수하로 고용하여 거대한 호수(비파호)를 가진 미노국(美農國·오오미)을 점령했을 무렵 그는 왕위에 등극했다(1567년). 노부나가가 돈에 밝은 장사꾼 무리와 무사들을 좋아했다면 선조는 사서삼경을 독파하고 과거에 합격한 독서인(사대부)들을 대거 등용했다.
기술을 경시한 조선
선조가 즉위한 후 사림이 조선의 중앙 정계를 장악했다. 말 많은 지식들은 당(黨)을 만들었고, 조정은 분열되었다. 1590년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온 통신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은 서로 다른 동향보고를 했다. "일본은 조선을 침략할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의 당을 우선시 했지 국가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노부나가의 부하로 그 뒤를 이은 히데요시는 일본의 은광산과 시장을 모두 장악했고, 1592년 4월 조선에 쳐들어왔다. 20만이란 거대한 병력을 동원한 전쟁비용 대부분은 광산에서 나왔다('프로이스'). 조선에서 들어간 기술이 일본을 세계 최대의 은 생산 국가로 만들었고, 조선침략의 먼 원인을 제공한 것은 아이러니하다. 조선은 자국에서 개발된 소중한 기술에 관심이 없었다. '선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조선에선 이미 그 기술을 잊어버린 듯하다. '하찮은' 상놈과 노비가 만들었던 기술이라 전승이 되지 않은 것일까?
올해 황우석 박사가 중국의 희귀종 사자견을 복제하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개 복제에 있어 세계 최고의 권위자인 그는 앞서 줄기세포 사건 후 은둔하고 있다. 현재 당국은 그의 줄기세포연구를 불허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여러 나라에서 그에게 계속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다이묘(大名·대명) = 일본의 막부(幕府)정권 시대에 1만 석 이상의 독립된 영지를 소유한 영주(領主).이들 다이묘는 막부와의 친소에 따라 신판(親藩) 후다이(譜代) 도자마(外樣) 3부류로 나누었다. 그들은 막부가 제정한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를 엄격하게 준수하여야 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성의 신·증축의 금지, 다이묘끼리의 허가 없는 혼인 금지, 500석 이상의 적재선박 건조 금지, 기독교 엄금 등의 조항이 있었다. 1871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폐지되었다.
▶연은분리법(鉛銀分離法)= 납과 은을 분리하는 기술이다. 용로(鎔爐) 밑에 작은 구덩이를 파서 열화(烈火)를 쌓고, 납 조각을 넣은 다음 은 광석을 그 위에 깔고 불을 피운다. 그 위에 소나무를 덮어 불을 붙이면 납이 먼저 녹아 아래로 내려가고 은 광석은 녹다가 갑자기 표면이 갈라져 은(銀)은 위에 모이고 납 찌꺼기(鉛滓)는 재에 스며든다('조선왕조실록' 연산49권 연산군 9년 5월 18일 조).
DCN 국방시민연대 전쟁사위원회 연구위원 서영교(충남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