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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Jan
전쟁과 시장[45] - 정지룡과 누르하치
작성자:
한국의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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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시장[45] - 정지룡과 누르하치
-중국 권력교체의 핵심, 변경의 거상들, 정지룡과 이성량등 중국의 변방과 해상을 지배했던 무역상인은
막강한 군벌로 성장해 중앙권력에 도전하거나 권력을 전복시켰다
명나라가 해금(海禁)의 빗장을 풀었다(1570년). '한 조각의 판자라도 바다에 띄워놓는 것을 불허한' 해금령이었다. 왜구에 대한 좋지 못한 기억을 가진 명 왕조는 중국인이 일본에 내항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 틈을 타고 거대한 이익을 올린 것이 포르투갈이다.
1542년 포르투갈이 일본 연해에까지 진출하면서 중국과 일본 사이의 중개무역에서 나오는 이득이 동인도의 향료를 서유럽으로 운송해서 얻는 이득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포르투갈은 홍해를 봉쇄하여 경쟁자 베네치아의 향료무역을 막고 동남아에서 산출되는 향료를 유럽에 독점판매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은 연해 해적과 달리 평화롭게 교역활동을 하면서 중국 관리들의신임을 얻었다. 공을 들인 대가로 1557년에 명나라 정부로부터 광동의 마카오 정착이 허용됐다. 마카오는 광동성의 거대한 비단 시장을 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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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오 시내 전경. 포르투갈은 평화로운 교역으로 명나라의 신임을 얻어 1557년 이곳에 정착하기 시작한 후 일본 나가사키항까지 확보해 해상 무역의 황금기를 열었다.
1570년 일본 규슈(九州)의 기독교인 다이묘(大名) 오무라(大村)가 자신의 영내에 있는 나가사키항을 포르투갈인들에게 항구적으로 허용했다. 일본에 생사, 비단, 약재 등을 판매한 무역의 이익은 500%에서 1000%가 됐다. 마카오-나가사키 노선을 확보한 포르투갈 무역의 황금기였다.
포르투갈의 독주는 오래가지 못했다. 17세기가 시작될 무렵 경쟁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등장했다. 그들은 향료의 산지인 인도네시아와 몰루카제도를 장악하여 포르투갈 베네치아 터키 페르시아의 향료무역 자체를 붕괴시켰다. 칼 마르크스는 야수와 같은 네덜란드인들의 등장을 '자본론 1권'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말레카를 손에 넣기 위해 네덜란드인들은 포르투갈 총독을 매수하였다. 총독은 네덜란드인들이 시내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황급히 총독의 집을 향했고, 가차 없이 그를 죽였다. 약속한 매수금액 2만1875파운드를 절약하기 위해서였다."
중국 내 거점을 가지지 못한 네덜란드는 무역을 위한 거점으로 대만에 주목했다. 1624년 중국 본토의 풍부한 상품을 확보하기 위해 섬의 남쪽 대남(臺南)에 제란디아성을 구축했다.
동남 연안의 미니국가
당시 중국의 동남 연안에는 많은 해상집단이 때로는 명 관헌에 저항하고 때로는 손을 잡아 라이벌 집단을 토벌하면서 무역의 이익을 둘러싸고 경쟁하고 있었다. 명 정부의 입장에서 보자면 국가의 지배를 거스르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지방 지배를 보면 미니국가라고 할 만한 다양한 기구의 싹이 보인다. 광동성 조양현 사람 임대춘은 16세기 연안해적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배의 왕래에 통행허가증을 발급해서 상인의 화물로부터 하나하나 정해진 비율의 세를 취한다. …남의 곡물을 탈취하는 관리의 돈을 빼앗아 빈민을 구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빈민은 기꺼이 앞 다투어 해구(海寇)의 세력하에 들어간다. …또 사방의 망명자를 모아 조금은 문장을 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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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공
수 있는 자를 참군(參軍)으로 하고 해구의 두목은 큰 배에서 거주하면서 왕과 같은 생활을 하며, 종자들을 끌고 읍내에 출입한다."('해구론')
명 조정의 입장에서 무법지대였지만 거친 해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해구는 불완전하나마 지역에 질서를 가져와 자신들을 보호해주는 존재로 비쳤다. 그들은 명왕조의 지배를 파먹어 들어갔다. 그 중 가장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 정지룡이다. 그는 다른 해상집단을 습격하여 세력 확대를 했고, 명 관헌이나 네덜란드 선단과도 격렬한 해전을 벌였고, 1000척이나 되는 선단을 이끌고 중국연안을 지배했다. 그러자 네덜란드도 그와 손을 잡고 중국 상품의 입수를 꾀하였고, 1628년 명 조정은 그를 제독에 임명했다. 관군이 된 정지룡 세력은 중국연안을 완전히 장악했다.
양날의 칼 -북방군벌
당시 강대한 군사력을 가지고 독립왕국처럼 세력을 쌓아 가던 군벌이 명나라 북방에 있었다. 여진인의 피를 받은 이성량의 집안은 요동에서 무관을 세습했다. 1570년 그는 9만 명을 지휘하는 요동총병관의 자리에 올랐다. 그의 무력의 기초는 자신의 가정(家丁·사병)이었다. 가정은 투항해온 여진족을 장군의 집안에서 부양하는 병사들이다. 그들은 장군을 아버지라고 생각했다. 이성량은 몽골, 여진에 관한 모든 것을 훤히 알고 있었고, 그의 사병들은 목숨을 걸고 오랑캐와 싸웠다. 그가 요동지방을 지키는 것은 그의 집안을 지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성량의 집안이 있는 한 요동은 평화를 보장받았다. 이 씨의 강대함은 요동에 토착해서 혈연적 준혈연적인 끈으로 지탱된 그 기반의 안정성에 있다. 그의 일족이나 가정들은 요동의 각급 무관에 임명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 총수로 파견된 사람이 이성량의 장남 이여송이었다.
이 씨 집안의 토착성은 명 조정에게 양날의 칼이었다. 맡겨두면 평안한 대신 그가 요동에서 독립왕국처럼 세력을 떨치는 것을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실제로 명나라 조정이 요동에 투입한 경상군비 은(銀) 수십 만량의 절반을 횡령하고 또 시장에서 거래되는 말 가격이나 소금세, 상세 등으로 사복을 채우고 모든 요동 상민의 이익을 모두 자기의 농 속에 넣었다('명사' 이성량전). 이 씨는 이러한 수입으로 화려한 생활을 즐겼고, 돈의 일부는 북경의 고관들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이 씨의 전공은 조정에서 부풀려지기 일쑤였다.
변경시장에 움튼 신흥국가의 싹
요동에 대한 명 조정의 거대한 군비의 투입은 전쟁특수라고도 해야 할 변경호황을 가져왔다. 요동에서 당시 최대의 상품은 담비모피와 인삼이었다. 모피는 조선북부와 북경에서 겨울에 귀가리개로 대량 수요가 있었다. 한편 인삼은 백두산 부근의 산악지대에 자생했고, 그것을 채취하기 위해 여름 2, 3개월 동안 산중에서 맹수를 막아가며 집단생활을 할 필요가 있었다.
인삼은 중국에서 은의 중량과 필적하는 가치를 가졌다. 여진인이 수집한 인삼은 그 수장에게 공급돼 권력의 기반이 되었다. 청태조 누르하치(1559~1626)는 북만주에서 요동으로 이어지는 특산품 루트를 장악하여 상업적 이익을 취했다.
군벌 이성량은 요동의 시장을 지배해서 누르하치의 상업활동을 보호하고 이익의 일부를 가졌다. 이성량은 누르하치의 후원자이며, 양자는 공생관계였다. 누르하치와 여진인들이 수렵과 채집을 주로 하는 생활을 했다고 하지만 그들은 소박한 자급자족적 경제가 아니라 국제교역을 위한 특산품을 얻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그들은 변경의 시장에서 단련된 상업자본가였다.
1644년 5월 누르하치의 손자 순치제가 청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명나라의 수도 북경을 점령했다. 순치제는 자금성에서 황제 즉위식을 가졌다. 청 왕조는 명 왕조를 이은 중국의 정통왕조라는 것을 새삼 공표했다. 변경의 인삼과 모피 장사에서 출발한 누르하치의 손자가 중국을 지배하게 되었다. 여기에 정 씨가 반발했다. 명나라의 부활이라는 슬로건 아래 정지룡의 아들 정성공은 동남의 중국해 교역에서 얻은 풍부한 자금을 기반으로 무장선단을 조직해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 남경을 위협했고, 해전에 익숙하지 않은 청의 여진군대를 괴롭혔다. 나아가 5차례에 걸쳐 도쿠가와 막부에 사람을 보내 원병을 요청했다.
시장파괴의 위력
그렇다면 정 씨 세력을 명나라를 부흥하려는 충성스러운 세력, 만주인들의 침략에 대항하는 한족(漢族) 민족주의자들로 볼 수 있을까. 그들은 동남연안에서 명나라의 공권력을 파먹던 자들로, 필요하다면 어제의 적과 손잡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기회주의자들이었다. 정 씨도 청 왕조도 16세기 이래 활기 넘치고 항쟁으로 가득 찬 변경사회에서 단련되고 지위가 올라간 집단인 것이다. 그러한 신흥국가의 싹이 명 왕조의 지배를 파먹어 들어간 것이 16~17세기였고, 1660~1680년대는 두 신흥세력의 결승전 시기였다.
정 씨 세력을 말살하기 위해 청 왕조가 취한 조치는 무식했다. 무역이 바로 정 씨라는 물고기가 노는 물이라는 것을 간파한 청은 발해와 복건, 광동을 중심으로 하는 연해 주민을 20㎞ 이상의 내지로 강제 이주시키고 무인지대로 만들었다(1656년). 철저한 초토화는 정 씨 일가를 파멸로 몰아갔고, 동아시아에 장사를 하러 온 네덜란드 포르투갈 스페인 등을 물러가게 했다. 현재 미국 금융시장의 붕괴는 무역 의존도가 높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누르하치(奴爾哈赤·1559~1626)
만주의 무순 동쪽 건주여진의 추장이었다. 누르하치는 명나라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으로 성장할 때까지 철저하게 명나라에 복종했으며 1583년 처음으로 독립을 위한 군사를 일으켜 수년 사이에 건주여진을 통일하고, 1587년 소자하 상류에 흥경로성을 구축하였다. 명에 대해서는 계속 공손한 태도를 취하여 1589년 명으로부터 도독첨사로 임명되었으며, 1595년 용호장군의 칭호가 수여되었다.
조선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가 조선을 원병하는 기회를 이용해 1599년에 해서여진의 합달을 멸망시키고, 이어 1607년에는 휘발, 1613년에는 오랍 등을 병합하여 여진의 대부분을통일하였다. 1618년부터 명과 전쟁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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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동인도회사
1602년에 결성된 이 회사는 정부로부터 동양무역의 독점권이 부여된 이외에도 동양 여러 나라와의 조약 체결, 성새(城塞) 축조, 군대 편성, 문관(文官) 임명 등의 권한을 받아 이른바 정치적·경제적·군사적 국가 권력의 대행기관이 되었다. 몰루카섬의 향료를 독점한 네덜란드는 희망봉에서 대만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거점을 확보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 회사는 자바섬의 바타비아(자카르타)에 근거지를 만들어 포르투갈의 세력을 내쫓는 한편 영국 세력을 누르면서 향료무역과 식민지 경영에 성공, 네덜란드가 동양무역의 황금시대를 맞이하는데 한몫 했다.
DCN 국방시민연대 전쟁사위원회 연구위원 서영교(충남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