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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Jan
전쟁과 시장[44] - 정치권력과 조폭의 결합(權暴癒着·권폭유착), 중화제
작성자:
한국의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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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시장[44] - 정치권력과 조폭의 결합(權暴癒着·권폭유착), 중화제 -중국 관리들에게 폭력과 연결된 부패는 유서깊은 문화일뿐 -명 왕조대 밀무역 왜구와 결탁한 관료들 銀 대량 축재…민생 도탄 -낮의 총통 장개석 밤의 황제 삼합회 두월생 부적절한 공생 -워싱턴포스트 "중국 관리들의 조폭 이용한 착취와 치부는 현재진행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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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은의 대량 유입은 중국의 은 부족을 해결하였을까. 하지만 많은 16세기말 중국의 지식인들은 은 부족을 개탄하고 있다. "지금 천하는 흉년이 계속되는데도 곡물 가격은 점점 더 내려가고 민은 갈수록 굶주리고 있다. 그 이유는 곡물이 많아서가 아니라 은이 부족해서이다. 은이 부족하면 곡물을 싸게 팔아서 마련할 수밖에 없다. 곡물을 싸게 팔면 남은 곡물이 적어지고 민의 생활은 어려워질 뿐이다."(전곡의·錢穀議)
신대륙에서 생산된 은이 16세기 유럽에서 물가 폭등을 일으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 세계 은의 종점인 중국에서 물가가 상승되는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물가는 하락했고, 은의 부족은 만성적이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조폭과 결탁한 상인과 부패한 관료들이 놀라울 정도로 은을 축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당량의 은이 지속적으로 그들의 금고에 잠겨 빛을 보지 못했다.
당시 명나라는 은에 대한 수요가 절박했지만 외부로부터 은의 유입을 불법으로 간주했다. 은의 흐름은 명 왕조가 만든 댐에 제도적으로 막혀 있었다. 하지만 은의 기압 차이는 바람을 일으켰다. 이 댐을 무너뜨리려는 세찬 바람이 무장 밀무역 집단인 왜구였다.
왜구의 중국인 두목 왕직(王直)
절강 연안의 쌍서(雙嶼), 복건 남부의 장주 월항(月港)이 밀무역의 거점이었다. 여기서 유명한 왜구의 중국인 두목들이 말레카의 포르투갈인이나 일본 후쿠오카 상인들을 끌어들여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그 중에서도 대 왜구시대를 이끈 거물은 왕직(王直)이었다. 휘주의 흠연 사람인 그는 호탕하고 그릇이 컸다. 당시 중국해안의 밀수 조직 두목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중국의 법령은 엄격하여 자칫하면 금법에 걸린다. 차라리 해외에서 마음껏 날개를 펴는 것이 낫지 않은가." 왕직은 광동에서 아주 큰 배를 건조하여 유황이나 비단생사 등 금지된 물품을 싣고 일본에서 태국·동남아 서부 제국까지 이르는 무역을 한 지 6년 만에 거금을 모았다. 자금력은 그 휘하에 유명한 중국인 협객들을 모여들게 했고, 왜구의 우두머리들도 따르게 했다. 가도다로(門多郞) 지로(次郞) 요쓰게(四助) 시로(四郞) 등이 수하 집단이 되었다. 그는 일본 열도 남쪽의 고도(五島)에 본거지를 차렸다. 여기에는 수백 척의 배가 드나들며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 등과 일본의 은이 교역되었다. 왕직은 휘왕(徽王)이라 칭하면서 그 무역을 좌지우지했다. 중국연안의 밀수업자들과 관리들이 그와 동업을 했다. 많은 관리들은 관의 배를 이용하여 업자들의 물건을 운반해주었고, 관의 정보에 대해 다 알려주었다. 사실 업자들은 자신들이 거주하는 지역의 민들의 소장을 접수하여 특정 사람을 마음대로 고문을 하고 제멋대로 고시(告示)를 내어 관을 업신여겼다. 1547년 왜구 박멸을 명받은 주환은 단속을 엄격히 하려 하였으나 밀수업자들과 연루된 다른 관리들의 방해로 모두 무산되었다.
업자들은 중앙 관료들에게도 거금의 돈을 정기적으로 상납했다. 주환의 단속으로 업자들로부터 들어오는 용돈을 받지 못하게 될까 우려한 중앙관료들은 모략을 꾸몄고, 그를 실각시켰다. 3년 후 실의에 빠진 주환은 "왜구와 결탁한 자들이 관을 능가하는 실력을 휘두른다"라고 한탄하며 자살했다. 밤의 황제 두월생(杜月笙)
손문에게 국민당 정권을 물려받은 장개석도 범죄 조직과 공생했다. 1926년 7월, 국민당군이 북벌을 시작할 때 장개석은 총사령관을 역임하였다. 국민당군은 북양군벌(北洋軍閥)을 정벌하고, 호남성 호북성 강서성 복건성을 수복한 다음, 하남성 안휘성 강소성 절강성으로 진군해 갔다. 1927년 장개석은 상해를 점령했다.
그는 상해에 있는 공산당원과 당내의 반대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범죄조직 삼합회의 두목 두월생과 협약을 체결했다. 장개석은 두월생에게 별 둘을 달아주고 '무임소 장군' 대우를 하면서 수만에 가까운 두월생의 세력을 사병화하는 데 성공했다. 국민당에서 삼합회 폭력조직에 엄청난 자금이 흘러들어갔고, 장개석은 두월생의 부하를 국민당 비밀경찰 '남의사(籃衣社)'로 대거 영입하여 남녀 5000명 이상을 살해했다(4·12정변).
중화민국에서 장개석이 '낮의 총통'이었다면 삼합회 두목 두월생은 '밤의 황제'였다. 이후 노동조합은 완전히 두월생과 그의 부하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들은 조합의 간부로서 쟁의나 파업 때에는 독립행동을 했고, 언제나 직공 전체의 노임을 공장주로부터 받아 일부를 갈취했다. 공장주에게선 보조금을 받고 노동자에겐 아편을 강제로 팔았으며, 노동자의 자녀를 노예로 구입하여 따로 돈벌이를 시켜먹었다.
장개석과 두월생 사이에 아편 유통에 대한 밀약도 맺어졌다. 삼합회는 국민당 정부로부터 아편 전매권을 따냈다. 중국 전역에 아편이 유통되었고, 그 이익금의 상당 부분이 장개석과 국민당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이 부패한 돈은 정권을 유지하는 원동력인 동시에 치명적인 독이었다. 그것은 장개석에게 쫓기던 모택동을 기사회생케 하는 토양이 되었다. 국민당이 뿜는 악취에 중국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들이 돌아섰고 민폐를 끼치지 않는 공산당에 희망을 걸었다. 어느 순간 모택동이 역공을 펼치기 시작했고 대륙 곳곳에서 국민당의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가 내려지고 공산당의 오성홍기가 휘날리기 시작했다. 1947년 국민당의 패배가 분명해졌고, 2년 후 장개석과 그 잔당은 대만으로 쫓겨났다. 상해가 공산당에 함락되던 1949년 4월 두월생은 모택동에게 "상해를 중립 지역으로 하자"고 제의했으나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이를 계기로 중국의 공산화는 곧 우익 테러 세력에 대한 사형 선고임이 분명해졌다. 그러나 32년 후 삼합회는 공산당의 중국에서 부활했다.
중화제국 역사의 원죄
1981년 등소평이 중국을 개방한 이후 홍콩과 대만의 삼합회가 대규모의 자본을 중국으로 유입시키고 중국 권부 내의 실력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삼합회는 중국 내의 급속한 산업화로 이농 현상이 진행되자 이들을 조직원으로 포섭하여 세력을 키웠다.
1992년 중국의 공안 부장인 도사구가 "삼합회라고 다 나쁜 것은 아니다"라는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이익을 위해 국경도 이념도 영역도 구분하지 않는 삼합회는 중국공산당 핵심구성원들에게 막대한 돈을 뿌렸고, 그들에게 '애국자'라는 말까지 듣게 되었다. 중국경찰의 바지선에 실려 각지로 팔려나가고 있는 홍콩의 도난 고급승용차들은 그들의 유착관계를 말해준다. 이보다 수백년 앞서 어느 명나라 관리는 말했다. "장주와 천주 관리들의 배는 바로 밀수업자들의 날개였다."(벽여잡집)
관과 범죄조직의 결탁은 유구한 중국역사의 전통이요, 신 왕조가 들어설 때의 원죄였다. 한나라의 고조 유방은 논두렁 깡패의 두목이었으며, 명태조 주원장도 종교결사 출신이었다. 신 왕조는 항상 비합법 조직의 도움을 받고 일어섰다. 청나라가 멸망의 길로 들어서던 19세기 초, 중국에는 수없이 많은 비밀 결사체가 협객을 자처하며 활동했다. '홍문'과 '청방' 등이 멸만흥한(滅滿興漢)의 기치를 내걸고 세력권을 넓혀갔다. 중화민국 건국의 아버지 손문은 홍방에 소속된 비밀 결사원이었다. 손문은 각각의 협객 조직을 규합해 거대조직인 '동맹회'를 결성한 후 신해혁명을 일으켜 청나라를 전복하고 중화민국 건국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건국(1912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협객들은 국민당 정부의 막강한 후원을 받게 되었고, 장군이라는 직책과 함께 아편장사와 매춘업을 공식적으로 보장받았다. 중국 관리들에게 부패는 부끄러운 범죄가 아니라 유서 깊은 문화일 뿐이다. 현재도 중국 관리들은 폭력조직을 동원하여 농민들의 땅을 빼앗아 개발업자들에게 팔고 있다고 한다(워싱턴 포스트).
▶중화민국(中華民國)
1912년 중국 (中國) 역사상 최초의 공화제 국가로 성립하여, 1928년 이후로는 중국의 거의 전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민당의 중화민국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중화인민공화국(중국 공산당)과의 내전에서 패배하여 1949년 중국 대륙의 영토를 상실하고 타이완 섬 (대만)으로 후퇴, 철수하였다. 타이완 섬으로 후퇴한 이후로도 중화민국(대만)은 '중국의 정통 정부'를 자칭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중화민국(대만)은 세계적으로 중국의 정통 정부로 승인되지 않는 미승인 국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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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N 국방시민연대 전쟁사위원회 연구위원 서영교(충남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