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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Dec
이일의 상주 북천 전투
작성자:
한국의 산하
IP ADRESS: *.39.120.17 조회 수: 7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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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변사 이일의 상주 북천 전투
-유리한 지형을 확보하였지만 병력집중과 비정예병이 문제였다. -보병 전술(집총 사격)로 승기를 잡고, 기병 전술로 완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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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주읍성과 주변지형
상주는 조선 건국(1392년) 이후 임진왜란 발발(1592) 때까지 201년간 경상도 감영이 있던 곳이다. 상주읍성은 북쪽으로 노음(악)산과 천봉산, 남쪽으로 갑장산을 품고 있으며, 상주 3악이라 한다. 천봉산 남쪽 자락에는 자산이 있으며, 자산의 능선을 따라 자산산성紫山山城이 축조되어 있다. 이 산성에서 글씨가 적혀진 기와가 출토되었는데, 통일신라시대 때부터 이 산성이 존재해 왔음을 추정할 수 있다. 성의 전체 길이는 1,800여 미터에 달한다.
상주읍성에 대한 정보는 『삼국사기』와 『상산지商山誌』(상주읍지), 『해동지도』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687년(신라 31대 신문왕 7년)에 사벌주를 설치하고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에 존재했던 읍성이 그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상산지에는 임진왜란 때 왜병들이 이 성을 14개월(실제로는 6개월 정도임, 4월 25일 함락, 11월 23일 탈환)이나 점거하면서 성 둘레에 해자를 파고 성 밖 서남쪽에 토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7년전쟁 이후 상주읍성은 황폐화되었다. 수축과 관련된 기록에는 1869년(고종 6년) 목사 남정학이 수축하다 이임되자 1870년 부임한 민치서 목사가 4개의 대문을 중수하고 4면의 성벽을 고쳐 쌓았다(동문 돈원문, 서문 진상문, 파로문, 남문 홍치구루, 북문 현무문). 그 다음 해인 1871년에 부임한 조병로가 계속 수축하였다. 《상주읍성도》에는 읍성 내에 태평루, 상산관 등의 건물이 그려져 있고, 읍성 밖에도 많은 건물들이 들어서 있음을 볼 수 있다. 태평루와 상산관은 이전하여 현재 상주임란북천전적지에 소재해 있다. 상주읍성의 규모는 일제시대인 1910년에서 9년에 걸쳐 일본인이 측량한 상주시가지 지적도를 통해 알 수 있다. 성의 둘레는 약 1,525m이며, 폭 5~7m, 남북 길이 약 511.2m, 그리고 동서 길이 약 397.9m의 장방형의 구조를 가진 석성이다. 해자는 성벽에서 약 20~23m 떨어진 거리에 수축했는데, 폭이 2.5~3m 정도이며 둘레는 약 1,659m이다.
상주읍성은 일제시대 때인 1912년 상주시가지와 도로를 건설하기 위해 성첩과 문루가 모두 헐리고 해자는 모두 메워졌다. 1924년에는 남문인 홍치구루가 파괴되었다. 상주문화원은 1991년 7월 일본인이 측량한 상주시가지 지적도를 통해 4대문의 위치를 확인하고, 그 터에 표지석을 설치했다.
상주는 북으로 노음(악)산과 천봉산이, 남으로는 갑장산이 둘러싸고 있다. 상주 시민들은 이들을 상주 3악이라 부른다. 천봉산 남쪽 자락에는 자산이 있고, 능선을 따라 1,800여 미터의 자산산성紫山山城이 축조되어 있다. 산성에서는 글씨가 적힌 기와가 출토되었는데, 통일신라시대부터 존재해 왔음을 알려준다. 산성 아래를 흘러가는 물길은 북천이다. 임진왜란 당시 북상하던 일본군을 맞아 이일 순변사가 이곳을 사수하다 대패하고 조선군은 전멸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상주시에서 상주임란북천전적지를 건립하였다. 상주읍성을 중심으로 낙원역과 낙동역(현 의성군 단밀면 낙정리)이 있다. 이 역은 현재 의성군의 안계역과 쌍계역, 그리고 함창읍의 덕통역과 함께 유곡역(문경시 유곡동) 관할이었다. 영남대로에서 이 구간을 유곡도幽谷道라 부르며, 유곡역에는 유곡도 내의 역을 총괄하는 도찰방都察訪이 주재하였다. 또한 읍성 남쪽에는 소산봉수와 서산봉수가 있다. 해동지도에는 소산봉수가 갑장산 능선에 위치한 것으로 그려져 있는데, 현재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서산봉수는 청리면 하초리 서산(509.1m) 자락에 위치해 있다. 지금은 그 자리에 분묘가 있어 봉수대 흔적은 볼 수 없다고 한다.
일본군 제2군 가등청정 부대가 상주읍성으로 진격해 올 때 장천 근처(현 낙동면 승곡리 214-3)에는 상주 지역의 의병장이자 『임란일기』의 저자 인 조정이 양진당을 짓고 살고 있었다.
◈ 전역戰役(Campain)
☞ 전역적 상황
◈ 북천 전투
이일은 조정에서 4월 17일 순변사에 임명되었다. 한성을 수비하는 병사들을 이끌고 남하해야 했지만, 일본군의 침공 소식을 접한 한성 백성들은 궁궐을 빠져 나와 도망치기 시작했다. 지방에서 올라와 공직에 있던 공무원들도 하나 둘 고향으로 줄행랑치고 있었다. 이일이 순변사에 임명된 후 3일 정도 지나서야 한성에서 출발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끌고 갈 병사들이 없었던 것이다. 20일경에 한성에서 출발한 이일은 60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일본군이 상주에 진격해 오기 하루 전인 4월 23일, 상주읍성에 도착한 이일은 어떤 생각이 스쳐갔을까? 성을 사수해야 할 목사 김해는 일본군의 침공 보고를 받자 산 속으로 도망친 뒤였다. 판관(현재의 부시장) 권길과 호장(재정담당관) 박걸은 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다. 이일은 권길에게 병사 소집 명령을 내렸다. 권길은 그 다음 날 800여명의 병사들을 소집시켰으나 대부분이 향군(지방 농민으로 구성된 비정규군)이었다. 이일은 북천가에 있는 진영으로 나가 군사들에게 훈련을 시켰다. 개령(현)에 거주하는 사람이 이일에게 적군이 진격해 오고 있음을 보고했다. 4월 24일, 이 날은 일본군 선봉대가 이미 장천으로 진격해 들어와 주둔하고 있었다.
북천과 임란북천전적지
▼ 병력 규모와 사상자 규모
▼ 조선군과 일본군의 지휘체계
사근: 경남 함안군 소재 주의: 이순신 난중일기 5월 2일 기록에는 이일을 '삼도순변사'로 기록되어 있으나 정확한 명칭은 '순변사'이고, 오기인 듯 하다. 이일이 북천 전투에서 패하고 문경에 도착하여 조정에 보고서를 올릴 때, 다른 지역으로도 공문을 보낸 것 같다. 또한 북천 전투와 관련하여 조방장 변기가 이 전투에 참전하였는지는 공식 기록이 없다. 다만, 종사관 이경류가 이 전투에서 전사했기 때문에 조방장 변기 역시 북천 전투에 참가했을 것이다. 이일과 함께 퇴각한 뒤 문경에 도착하여 이일은 변기에게 조령 방어 명령을 내리고 충주로 향한 것 같다.
▼ 전투 경과
4월 25일,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한치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안개가 자욱했다. 멀리 포성이 들렸다. 이일은 일본군이 죽현까지 진격해 들어온 것을 느끼고 북천으로 이동하였다. 북천으로 이동하기 전, 이일은 전날 적 침입보고를 한 개령(현) 사람을 처형하였다. 북천으로 이동한 이일은 전투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성 내에 군사들이 없음을 알고 상주성을 점령하였다. 이일은 농민군으로 구성된 800여명의 군사들로는 상주읍성을 방어할 수 없을 것이라 판단한 것 같다. 대군이 사방에서 포위해 들어오는 상황에서는 읍성이 오히려 방해물이 된다. 유리한 지형을 확보하여 일본군을 저지시키는 전략을 선택하였으리라 보여진다. 전투는 공격이 시작된 후 단시간내에 끝이 났으며, 날이 저물 무렵에 종료되었다. 이는 일본군 본대가 장천에 도착한 것은 아침 무렵이고, 읍성 점령은 오전 중이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상주읍성에서 전투준비를 갖춘 다음 오후에 총공세를 가하였으리라.
▼ 이일과 소서행장
이일은 부산성과 동래성이 수성전에서 함몰되었다는 것과 그 이후의 지역(양산, 밀양, 청도, 대구, 선산)에서 지휘관들이 성을 비우고 퇴각하였다 것, 그리고 적 병력이 대규모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병력 규모와 화력 규모를 확인한 상태에서는 상주성을 비우고, 강을 앞에 두고 언덕 위에 부대를 배치시킨 다음 전투 태세를 갖추는 것은 바람직하다 하겠다. 이일은 탄금대 전투 후 일본군과의 전투에 대한 의견을 제시한다. 그리고 평양성 방어 전투 때 평양성 외곽 남서 방향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낸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일은 그렇게 무능한 지휘관은 아닌 듯 하다. 다만, 무관은 한번 실패하면 중용되는게 어려웠고, 문관이나 중신들은 몇 번 실패해도 거듭 중용되는 시대 상황을 고려하면, 이일은 7년 전쟁 동안 불운한 지휘관으로 남게 된 것 같다.
소서행장은 밀양의 작원관 전투에서 사용했던 우회 기습 작전을 북천 전투에서도 활용하고 있다. 북천 역시 작원관과 마찬가지로 조선군이 유리한 지형을 선점한 상태였다. 정면 공격을 하면서 우회하여 기습하는 전술이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전쟁 방법이라는 것을 소서행장은 잘 알고 있었다. 이 전술은 탄금대 전투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 지휘관 이일과 조선 병사들에 대한 논란
이일과 관련된 논란은 정찰병 배치 문제와 보고자 처형 문제이다. 이 두 문제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평가할 수가 없다. 문헌에서는 단순히 정찰병을 1명도 배치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구체적인 것은 기술하지 않고 있다. 후대의 임진왜란과 관련된 대부분의 저서에서 한결같이 이일이 초병을 세우지 않은 것은 군사상의 기본 상식인데도 이를 하지 않았다며 이일을 무능한 지휘관으로 몰아가고 있다. 보고자 처형 문제는 '민심 현혹죄'라는 것을 적용할 수 있다. 개령(현) 사람이 이일에게만 보고하고 병사들과 백성들에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면 보고자 처형은 분명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일 외에 병사와 백성들 앞에서 큰 소리로 떠들었다면 이는 군중 혼란죄에 해당될 수 있다. 이러한 경우 이일은 병사들과 백성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서 보고자를 처형할 수도 있는 것이다.
북천 전투를 기술한 어떤 문헌에서는 이일 휘하의 정찰병이 4월 25일 아침에 일본군 정찰병을 발견했는데도, 개령(현) 사람이 참수 당하는 것을 보고 보고하지 않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이일로 하여금 병력을 재배치할 수 있는 시간을 갖지 못하게끔 만든다. 이일은 상주성에서 연기가 피어 오르는 것을 보고서야 군관을 보내어 확인하게 하였다 한다.
참고문헌 프로이스 일본사, 유성룡 징비록, 조경남 난중잡록, 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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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N 국방시민연대 전쟁사위원회 위원장 권순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