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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28

08

2009-Dec

경주성 함락과 곽재우의 전략적 방어

작성자: [레벨:16]한국의 산하 IP ADRESS: *.39.120.17 조회 수: 7637

곽재우경상우도 방어와 경주성 함락

 

-진격로 예상 지점에 정찰대와 매복부대를 운영하다!

-사술과 궤모는 명장도 사양하지 않는다.

-병사가 없는 지휘관과 백성들이 없는 수령만 탓할 것인가! 병사들과 백성들은 어디로 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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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우 의병장의 유품 보물 제671호, 장검 보물 제671-1호, 말안장

 

 

 

◈ 일본의 조선 침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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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군(번대) 소서행장은 3월 13일 대마도 대포항에 있었다. 4월 13일 대마도 도주인 종의지의 병력과 합세한 후 함선 700여척에 분승하고 오전 8시에 대포항大浦項을 떠나 오후 5시에 부산 앞바다에 도착하였으며 그날로 부산포에 상륙하였다. 한편 가등청정이 인솔하는 제2군은 조선침략의 전진기지인 명호옥을 3월 초순에 출발하여 대마도에 도착한 다음 제1군의 소식을 기다리던 중 부산상륙에 성공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대마도를 출발하여 18일 부산에 상륙하였으며 그 길로 울산·언양을 거쳐 경주·영천·신령 방면으로 향하였으며, 같은 날 제3군 흑전장정이 인솔한 부대는 죽도 부근에 상륙하여 김해에 이르렀고, 제4군 모리길성과 도진의홍이 이끄는 부대는 김해에서 제3군과 함께 창녕을 점령한 후 성주·개령을 거쳐 추풍령 방면으로 향하였다. 제3군 흑전장정은 그 이후 충청도 영동, 문의, 청주, 죽산을 거쳐 5월 7일 한성에 입성했다. 제5군 복도정칙이 인솔한 부대는 제4군의 뒤를 따라 부산에 상륙하여 제2군 가등청정 부대의 후미를 따라 북상하였고, 제6군 소조천융경이 이끄는 부대는 제7군 모리휘원이 인솔한 부대와 함께 후방을 지키며 북상하였다. 제8군 우희다수가가 이끄는 부대는 5월 초에 부산에 침입하여 서울을 점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을 향하여 북상하였다. 5월 중순에 한성에 도착하여 한성수비를 맡았다. 제9군은 4월 24일에 일기도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침략을 대기하고 있다가 제8군의 뒤를 이어 부산에 침입하였다.

일본군은 일부 수군(해군)을 제외하고는 군(번대)별로 함선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1군이 700여척이라면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1,000여척이 부산에 침입했다 하는 것은 잘못된 정보일지도 모른다. 현재로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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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초기 대응

 

T_4.jpg조선력과 일본력은 하루 차이가 발생하며, 일본력이 하루 빠르다. 일본력이 4월 13이면, 조선력은 4월 14일이다. 지도상에 표시된 날짜는 일본과 조선측 사료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문헌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

 

▼ 경상도의 초기 대응

 

김수는 진주를 출발하여 15일 반성에 도착하여 부산 함락 소식을 듣고 장계를 작성하여 발송한다. 16일 영산에 이르러 양산 통과 소식을 듣고 밀양으로 입성하였다. 그곳에서 영산을 거쳐 초계에 도착하여 전라감사에게 '부산, 동래, 양산이 함락되고 밀양이 적 수중으로 들어가고 있으니 전라도의 군사 3, 4천명과 군관 3, 4명을 지원하라'는 공문을 보내고, 19일에는 합천으로 후퇴하여 그곳에서 '밀양성 함락 후 영산, 성주로 진격 중이며 경상도 각 병영에서는 전라도 남원 운봉으로 공문을 보냈다'는 공문을 보낸다. 4월 20일에는 지례에 있었다. 21일에 일본군은 낙동강 동쪽 지역에 위치한 현풍, 대구, 경주를 점령했다. 제1군이 24일 선산을 점령할 무렵에 김수는 밀양부사 박진과 배설에게 선산에 가서 적 동태를 관찰하라 지시를 내린다. 경상우도와 경상좌도가 서로 소통이 되지 않은 것은 이 무렵부터이다. 23일 제3군과 제4군이 초계, 합천, 거창으로 진군해 왔다. 우척현에는 조경 경상우방어사가 양사준 조방장과 함께 충청도를 경유해 모집해 온 500여명의 군사로 대기하고 있었다. 정기룡은 거창에서 조경부대와 합류하였고, 돌격장이 되었다. 이곳에서 선발대 500여명과 접전을 벌이는 동안 본대가 진군해 오자 추풍령 방면으로 퇴각했다. 조경 부대는 김천(금산)에서 2차 접전을 펼쳤다. 이 때 김수는 400명을 모집하여 조경 부대에 소속시켰다. 정기룡 돌격장이 조경을 구출한 곳이 바로 김천전투이다. 우척현이 무너지자 김수는 지례를 떠나 26일 거창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4월 20일 김해성을 사수하지 않고 도망친 초계군수 이유검을 처형했다. 금산에서 퇴각한 조경 부대는 4월 28일 추풍령(사부리)에서 다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게 된다.

 

김수가 지례에 있을 때 의령에서는 북상해 오는 일본군을 저지하기 위해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켰다. 무기와 식량이 필요했으므로 비어 있는 기강 근처의 관 창고를 열어 조세로 거두어들인 쌀과 의령과 초계에 있는 창고의 곡식을 풀어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행동을 보고 의롭다 하고, 어떤 사람들은 도적질한다고 생각했다. 초계는 합천군 관할이었으므로 군수 전현룡은 곽재우의 행동을 도적질로 보고 김수에게 보고한다. 이것이 후에 김수와 곽재우간에 오해를 낳게 되는 단초가 된다. 오해는 초유사 김성일에 의해 해결된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 초기 대응에 실패 책임을 김수에게 돌리면서 그 근거를 곽재우의 서간문과 장계, 그리고 유성룡의 징비록을 인용한다. 징비록에는 김수의 일별 행동이 나타나지 않는다.

 

'순찰사 김수는 맨 처음 진주에 있었는데 왜변이 일어난 소식을 듣고 동래로 달려오다가, 중로에서 적병이 이미 가까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는 더 앞으로 가지 못하고, 우도로 도로 돌아와서는 어쩔 줄 모르고 다만 여러 고을에 격문을 보내 백성들에게 적을 피하라고 효유하니, 이 일로 도내가 텅 비게 되어 더욱 어쩔 수가 없게 되었다.' 

 

다른 문헌을 보지 않고 이 문헌의 이 글귀만을 본다면 경상도 도내의 마을이 김수로 인해 텅비게 되었다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징비록에는 유성룡이 직접 겪은 황해도와 함경도의 경험 이외에는 거의 모두가 위와 같은 형식으로 기술되어 있다. 어느 하나의 문헌에만 의존할 때 '맹독'이 된다는 것을 이 사례로부터 알 수 있다.

 

김수의 행로를 보면 곽재우가 오해한 측면이 많다. 김수는 일본군의 북상 경로를 따라 이동하였으며, 일본군이 점령하기 전 미리 가 있었다. 그리고 일본군이 밀어닥치자 퇴각한 것이다. 곽재우의 입장에서는 김수가 눈 앞에 보이지 않으니 오해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김수와 곽재우는 비록 오해는 하고 있었지만 자중하고 있었던 듯 하다. 각 지휘관의 막하 부하들간에 서로 다투는 양상이 벌어졌다. 이것이 둘 사이를 더욱 오해하게 만들었다. 김수가 4월 26일 지례를 떠나 거창으로 후퇴한 것은 경상좌우도의 전선이 적의 수중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김성일은 4월 19일에 경상우병영 서쪽 해망원에 도착하여 일본군 선발대를 공격하고 병영성을 탈환한다. 조선정부에서 나포하라는 소식이 전해오자 22일 창원을 출발한다. 창원부사 장의국, 우후(병마사의 직속 부하) 이협이 병영성을 포기한다. 김해성에 주둔하던 본대는 23일 창원을 점령하고 병영을 불사른다. 그 날 칠원으로 진공하여 함락시킨다.

 

제2군은 부산에 상륙하여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좌수영을 거쳐 기장을 점령하고 언양과 울산을 공격한 것 같다. 가등청정군이 언양성으로 진격하자 언양성에 주둔하던 병사들이 전원 경주로 도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동래 소산역에서 동래성을 지원하러 온 경상좌병영 지휘관인 병마사 이각 휘하의 병사들이 후퇴하면서 언양성과 울산성으로 분산된 것 같고, 언양성에 있던 병사들이 다시 경주로 퇴각하여 경주읍성 전투에 임하게 된다. 경주부윤 윤인함이 이각 휘하 500여명을 박의장에게 배속시켰다는 것과 비교해 볼 때 타당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울산읍성과 병영성을 공격한 것은 제2군 이외에는 없다. 4월 20일 기장현에서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을 공격한 사실과 21일 울산 병영성에 집결해있던 경상도 북부지역 13개 고을 병사들이 후퇴하였다는 사실 등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경주에는 21일 들이닥쳤다. 경주부윤 윤인함은 도망하는 군사를 잡기 위해 읍성 서쪽에 있는 서천에 있었고, 읍성에는 경주판관 박의장과 장기현에서 지원나온 현감 이수일이 있었다. 23일 일본군 분대가 장기로 진공해 왔다. 경주성이 함락당하자 장기현감 이수일은 장기로 후퇴하여 장기읍성 밖에서 진지를 구축하였으나 적세를 견디지 못하고 퇴각하고 말았다.

 

▼ 정부의 초기 대응

 

조선 정부는 17일 아침에 경상우수사 박홍의 장계로 침공 보고를 받고 오후 3~5시에 선조에게 보고한 이후 전시체제를 가동시켰다. 전시사령부와 수도방위사령부를 설치하고 야전사령부와 징병모집담당관을 임명했다. 이에 따라 전시사령부의 총사령관은 좌의정 유성룡이 도체찰사가 되었다. 수도방위사령부에는 서울성곽(도성) 안과 밖 모두를 책임지는 경성도검찰사에 우의정 이양원을, 서울성곽 수비를 책임지는 도성검찰사에는 박충간을, 그리고 궁궐 수비를 책임지는 수어사에는 이성중이 임명되었다. 또한 징병모집에는 동서로 호소사라는 명칭으로 정윤복이 임명되었다. 야전사령부에는 먼저 1차 방어선을 경상도에서 구축하기 위해 이일을 순변사로 임명하고, 전략적 요충지를 방어하기 위해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3도에 방어사를 임명했다. 그리고 각 방어사와 병사를 지원하기 위한 조방장을 임명했다.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진입하는 고개는 죽령, 조령, 추풍령이 있고,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진입하는 고개는 우척현, 육십령, 팔량치가 있다. 경상우도방어사는 조경, 조방장은 양사준으로, 경상좌도방어사는 성응길, 조방장은 박종남으로, 전라방어사에는 곽영, 우조방장에는 이지시, 중조방장에는 이계정으로, 좌조방장에는 이계정으로, 충청도방어사에는 이옥, 조방장에는 이세호로 임명하였다. 또한 1차 방어선을 책임지는 이일을 지원하기 위해 조령을 수비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변기가 조방장이 되었고, 죽령을 차단하는 업무에는 유극량 조방장이 임명되었다. 그리고 1차 방어선이 돌파당할 경우 2차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해 신립을 3도 순변사로 임명했다. 그리고 8도 감사(현재의 도지사)에게는 군령권을 행사할 수 있는 순찰사를 겸직하도록 조치했다. 그리고 도내의 지방행정관을 전시체제에 맞도록 교체시켰다. 경상도의 경우 경주부윤 윤인함을 강계부사 변응성과 보직이동을 시켰다(부에는 보통 부사라는 직책이지만, 경주와 전주처럼 아주 특별한 곳에는 부윤이라는 직책을, 그리고 한성에는 판윤이라는 직책을 임명했다).

 

 

 

◈ 경상·전라지역의 상황

 

전라도에서는 전라감사 이광이 경상감사 김수와 기타 여러 경로를 통해 일본군이 침략해 온 사실을 알고, 4월 20일 감영인 전주에서 군사 8,000여명을 인솔하여 공주 방면으로 북상했다. 또한 성균관 학유學諭(종9품의 제일 말단 관직)로 재임하던 도중 한성에서 일본군의 침략 소식을 들은 유팽로는 고향인 전라도 곡성으로 내려와 20일경 의병을 일으키고, 고경명 등에게 공문을 보낸다. 이들은 모두 제1차 금산성 전투(1592년 7월 9일~10일)를 치르다 전사하게 된다.

 

전라좌수영의 이순신 좌수사는 20일 김수로부터 '부산, 동래, 양산이 함락되고 일본군이 북상하고 있으며, 경상도 여러 진에 전선이 전혀 없다'는 공문을 받는다. 또한 이날 조정에 올리는 장계에 '일본군이 한성에 육박할 것 같아 이억기 함대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출전하겠다'는 내용을 담아 발송시킨다.

 

상도에서는 일본군 제1군과 제2군, 그리고 제3군과 제4군이 경상좌우도 남부를 점령한 채 북상하고 있었다. 좌도에서는 현풍, 대구, 경산이, 우도에서는 창원, 함안이 일본군의 점령지가 되었다. 3군 본대는 김해에서 23일 창원으로 진격하여 창원을 함락하고 병영을 파괴시켜 버렸다.

 

전시체제하에서 임명된 경상도 우방어사와 좌방어사는 각각 거창과 의흥에서 북상해 오는 일본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 경주읍성 함락

 

경주읍성 주변 지형과 경주읍성

 

경주읍성은 현재 경주시 북부동과 중부동 일대이다. 읍성의 일부가 남아 있는 동쪽 성벽을 찾기 위해서는 경주역에서 출발하여 계림초등학교를 찾아가면 된다.   

 

경주읍성의 축성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동경통지》에 1378년(고려 우왕 4년)에 개축하였고 높이가 약 4m(12척 7촌)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고려 우왕 이전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지금의 읍성은 조선 전기에 다시 짓고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32년(조선 인조 10년) 경주부윤 김식이 중수하고 성문도 다시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경주읍성에는 조선을 개국한 태조의 어진을 모신 집경전集慶殿과 관아, 그리고 우물 80여 개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동서남북에 망미문望美門, 향일문向日門, 징례문徵禮門, 공진문拱辰門이 각기 있었고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해자도 갖추고 있었다. 남문인 징례문에는 성덕대왕신종을 걸어 매일 시각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성의 둘레는 약 1,200m(4,075자尺)이다.

 

임진왜란 당시 경주에는 조선 개국의 시조인 태조를 모신 집경전이 있었다. 전주에는 '경기전'이라 불렀고, 평양에는 '영숭전'이라 불렀다. 태조의 어진을 모신 지역에는 지방행정관을 '부윤'이라 불렀다. 이 읍성은 또한 이장손이 발명한 비격진천뢰를 사용하여 일본군을 물리쳤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대부분 헐리고 지금은 동부동에 동쪽 성벽 90m 정도만이 옛 모습대로 남아 있다. 해자가 존재했었지만, 성벽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위치인지 명확하지 않아 해자는 그려넣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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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읍성의 남문과 동쪽 성벽, 그리고 북쪽 성벽이 일부 남아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읍성 내부에 존재했던 집경전은 1960년대 초까지 건물 일부가 남아 있었다 한다. 사진은 집경전의 비각으로 추정되며, 현재 경주여중 교정 동편에 집경전 옛터라는 비석이 서 있다. 또한 경주읍성의 남문의 외곽이었던 현재의 노동동 일대의 전경과 봉황대의 전경이다. 성덕대왕신종(에밀레 종)은 봉황대에 있었는데, 1915년대에 경주고적보존회(현 경주문화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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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읍성 남문(징례문) 경주읍성 집경전 비각 추정(1922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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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 성벽 북쪽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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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읍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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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읍성 남문 방향의 노동동 일대의 봉황대 오솔길(1950년대) 봉황대에 있던 성덕대왕신종(에밀레 종) 이전(1915년대)

 

▼ 경주읍성 함락

 

제2군 가등청정 선봉대가 4월 21일 경주성에 도착했을 때, 경주부윤 윤인함은 경상감사 김수로부터 포망장 직책을 임명받았기 때문에 경주성 서쪽 서천에 주둔하고 있었다. 포망장은 도망가는 군사를 나포하거나 사살하는 직책이다. 윤인함은 서천으로 나가면서 언양성에서 적세에 밀려 퇴각해 온 이각 휘하 500여명을 판관(현재의 부시장에 해당) 박의장에게 배속시켰다. 집경전 안에 있던 태조 어진은 옮겨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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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읍성을 함락한 일본군 지휘관은 '휘원'으로 알려져 있다. 선묘중흥지 임진 4월조에  '輝元 分兵 自彦陽間道 進攻慶州府'(휘원 분병 자언양간도 진공경주부)'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일본식 이름은 정확히 알 수 없다.

 

박의장은 정찰대를 파견하였지만 정찰병이 도망하여 일본군이 경주읍성으로 진격해 들어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성 내에 주둔한 군사들은 10리 밖에서 총소리가 들리자 성을 넘어 도주하고 말았다. 성 내에는 얼마남지 않았다. 박의장과 이수일은 적의 병력 앞에 대적할 수 없음을 느끼고 경주읍성을 버리기로 했다. 이수일은 서문인 망미문으로 나가 기장현으로 퇴각하고, 박의장과 수하 부하들은 동문인 향일문과 북문인 공진문으로 퇴각하였다. 일본군이 퇴각하는 이수일군과 박의장군을 추격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서천에 있던 부윤 윤인함과 박의장은 경주부 관내인 기장과 죽장으로 퇴각하여 의병을 모집한다. 이 둘은 경주성 탈환 전투 때 참전하며, 특히 윤인함은 경주성 탈환이 끝날 때까지 포망장으로 있게 된다.

 

경주읍성이 함락당할 때 조선군의 사상자는 1,500여명 이상(조선역)이라는 설과 3,000~4,000여명(정한위략)이라는 설이 있다. 이는 경주성 함락 직전의 진격과정에서의 사상자와 경주성 함락 후의 추격과정에서의 사상자를 모두 합친 숫자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 정치불안정, 민생경제외면, 국방력소홀에 대한 신의 저주

 

경상감사 김수의 전시동원 공문과 기타 공문에 의해 경상도 좌우도 북부지역 행정관이나 군사들이 중로의 거점지역인 대구와 좌로의 거점지역인 울산으로 집결했다. 전라도 역시 경상도에서 보고된 전시동원 공문과 정부에서 발송된 공문에 의해 각 지역 사령관이 임명되고 경상도와 전라도 경계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경상도의 경우 4월 21일 울산병영에 모였던 우도 북부 지역 13개 고을 병사들이 모두 퇴각한 사실과 대구에 집결했던 군사들이 정부에서 보낸 사령관의 도착 지연과 폭우로 인해 해산되었다는 사실로도 충분히 입증된다. 경상좌우도의 육해군 사령관들 역시 초기에는 최전선으로 진군했거나 해당 사령부를 지휘하고 있었다. 문제는 병력집중과 정예병이었다. 이 당시의 군사체제는 중앙에서 파견된 임시의 총사령관이 해당 지역으로 내려와 군을 지휘하는 체제였다. 울산과 대구의 경우 도착 지연이 문제가 된 경우이다. 그 이전에는 해당 지역을 해당 사령관이 방어하는 진관체제였다. 하나의 관내에 있는 모든 군사기지의 사령관과 행정관이 책임을 지고 방어하는 시스템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유성룡이 진관체제를 다시 부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것을 가지고 후대의 사람들은 왜 진관체제로 복귀시키지 않았느냐며 정부 요직에 있던 사람들을 몰아세운다. 그 당시 진관체제로의 복귀는 가능한 체제였을까? 진관체제가 효율성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해당 지역에 사는 백성들이 안정된 생활을 유지해야만 한다. 그리고 군 복무 역시 안정화 되어 있어야 한다. 과연 그러한 사회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다. 이 당시는 남명 조식 선생이 갈파했듯이, 지방의 하급관리들까지 뇌물과 비리로 얼룩진 시기였다. 백성들은 과중한 세금을 견디지 못하고 유랑걸식하고 있었다. 해당지역을 방어할 만한 인력이 해당지역에 거주하지 못했던 것이다. 병사들 역시 유랑걸식하고 있었으며, 퇴계 이황 선생 이후로 조선사회는 주자학의 기초가 학자들에게 깊이 뿌리박혀 있었고, 선조가 재위할 시기에는 '심'의 철학이 관념화되고 사변화되기에 이르렀다. 문무를 겸비해야 한다는 조선초기의 사회 풍조와는 거리가 멀었다. 문관들도 무를 겸비하기 위해 활쏘기와 승마 훈련을 하였지만, 형식적이었고 여흥거리였으며, 오락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러한 사회풍조가 만연하여 군사들 역시 훈련을 게을리하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당시에는 진관체제나 제승방략이나 모두 작동할 수 없는 처지에 몰려 있었다. 일본은 이런 조선사회의 병폐를 꿰뚫고 있었으며, 이 시기를 적절히 이용한 것이다.

 

 

 

◈ 누구에게 역사적 멍에와 굴레를 덮어 씌울 것인가?

 

현재 우리들이 많이 접하고 있는 임진왜란과 관련된 서적 속에는 그 당시 지방의 행정관(현재의 도지사, 시장 및 부지사, 부시장)들이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모두 도망을 쳤다고 기술하면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전달해 주고 있다. 그 당시 경상도는 우도와 좌도가 있었는데, 목·부·군·현 모두 합쳐 67개 행정구역이 있었다. 이 중에서 몇 곳의 행정구역에서 행정관이 도망을 쳤지만, 나머지는 모두 관청을 지켰다. 적군의 수가 너무 많아 훗일을 도모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퇴각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모두 겁을 집어먹고 도망을 쳤다라고 되어 있을까? 그 당시 지역의 총책임자는 자신의 지역 외에는 다른 관원들이나 의병들이 올린 장계를 참조로 하여 정부에 보고서를 올렸기 때문에 선후 설명이 결여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후대의 사람들이 임진왜란을 기술할 때 이러한 기록을 참고하면서 교차분석이 행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상감사 김수와 마찬가지로 경주부윤 윤인함도 그렇다. 윤인함의 경우 초유사 김성일이 올린 보고서에 '경주의 부윤과 판관이 깊은 산 속에 숨었다'고 되어 있다. 경과 설명이 없다. 초유사 김성일의 보고서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다만 후대의 사람들이 인용을 하면서 그 문구 그대로 해석했거나 다른 문헌을 찾아보지 않고 결론을 내려 기술했기 때문이다. 서적을 출판한 그 당시의 사정도 이해할만하다. 원문을 해석해 내야 하는 어려움과 번거로움, 이로 인한 시간의 부족 등으로 인해 많은 문헌을 참고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확정적이지 못한 사실을 열거하면서도 자기의 주장을 극단적으로 몰아간다는 인상을 많이 받는다. 도망친 당사자의 나이가 조금 많으면 나이를 가지고 부정적으로 기술하며, 유약한 성격이면 왜 저런 사람을 지방관으로 임명했느냐고 정부 부처를 몰아부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았을 때 원균 역시 그렇다. 이순신을 영웅시화하는데 원균은 그 대척점이었다. 원균은 지장과 덕장은 되지 못할지라도 적어도 맹장이라고 할 수는 있다. 적이 침공해 올 때 선봉에 서서 방어할 사람이 필요하다. 선봉이 무너지면 후미에 있는 본대 역시 무너지게 되어 있다. 총사령관은 지장과 덕장, 용장을 겸비해야 하며, 행정력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원균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임면권자의 책임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 곽재우의 전략적 방어와 일본군의 전략 실패

 

일본군 제3군 혹은 제4군은 경상우도 남부에 위치한 진주를 점령하고 관할 내의 행정구역을 점령하고 난 뒤에 북상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4월 20일 김해읍성을 함락한 일본군은 창원 방면으로 선봉대를 파견하고 본대는 23일 김해성을 출발한다. 선봉대는 창원 해망원에서 경상우병사 김성일에게 막혀 잠시 퇴각하지만 그 다음 날 다시 창원성을 점령한다. 그 후에 제3군과 제4군은 함안, 칠원 방면으로 진격한다. 남강 건너 의령에는 곽재우가 4월 22일 의병을 일으키고 곳곳에 정찰병과 매복병을 주둔시켜 두고 있었다. 이곳에서 제3군과 제4군은 우도 남부로의 진격이 막혀 버렸다. 결국 할 수 없이 영산 방면으로 방향을 돌려 진격한 뒤 이곳에서 부대를 나누어 우도로 침공해 들어갔다. 한 부대는 성주로 직공하고, 다른 한 부대는 의령 신반, 초계, 합천 방면으로 진군한다. 합천에서 거창 방면으로 진군한 제3군 혹은 제4군의 선봉대가 다시 경상우방어사 조경 부대에게 4월 23일 우척현에서 차단당한다. 일본군은 다시 우회하여 고령, 김천 방면으로 진격하였다.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제3군과 제4군이 경상우도를 점령하지 못한 것이 후속부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더 나아가 전쟁이 경과됨에 따라 가을부터 군량 부족 사태에 직면하는 계기가 되었다. 곽재우의 남강 방어는 단순히 지역 방어가 아니다. 의령 전선을 확보한 조선군의 입장에서는 시간을 벌었던 것이다. 전역적 차원에서 곽재우의 남강 전선 방어는 전략적 방어가 된다.

 

 

 

참고 문헌 및 출처

조선왕조실록, 조경남 『난중잡록, 박의장 『관감록, 이의윤 임진일기, 이노의 용사일기, 최락 경주선생안』

선묘중흥지 권 1 임진 4월조, 해동지도(1750년대), 경주읍내지도(1798년, 정조 22년 이후 무렵 추정), 신증동국여지승람

최효식 임진왜란 영남의병연구

일본참모본부 『조선역, 천구장유川口長孺 『정한위략征韓偉略』

사이트: 일본 위키피디아, 경주문화원

 

 

 

 

DCN 국방시민연대 전쟁사위원회 위원장 권순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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