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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Nov
박진의 작원관 전투
작성자:
한국의 산하
IP ADRESS: *.39.120.17 조회 수: 7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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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원관 전투
-한사람이 문을 지키면, 만 명 병사도 지나갈 수 없다(일부당관만부막개一夫當關萬夫莫開, 이백李白의 시詩, 촉도난蜀道難) -겉으로 험한 벼랑길을 수리하는 체 하면서 몰래 건너가 진창을 공격한다(명수잔도 암도진창明修棧道 暗渡陳倉, 사기, 고조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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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군 편제
국가나 기업, 단체에는 장이 있고,그 밑에는 직위에 따른 업무 영역이 있다. 정부의 경우 지방자치단체는 중앙의 직위와 직책을 그대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지방 고유의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임진왜란 이전 일본의 전국시대 각 지방을 다스리던 번들은 어떤 직위를 가지고 있었을까? 정부의 예산결산을 담당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기를 관리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업무를 담당하기 위해서는 해당 사람에게 직위와 직책(벼슬)을 주어야 하는데, 그것을 '료寮''라 한다. 국가 세수와 예산결산을 책임지는 부서를 '주계료主計寮 '라 하고, 그 총괄담당자를 '두頭'라 한다. 현재적 의미로 본다면 장관長官이다. 제2군 총사령관 가등청정을 '가등주계두'라 하는데, 예산결산과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아래로 차관이 있는데, '조助'이다. 이는 보좌한다는 뜻이다. 그 아래에 또 판관이 있으며, '윤允'을 붙인다. 판관은 감사역이라 이해하면 된다. '마료馬寮'는 기마와 관련하여 마필을 관리하고 말과 관련된 도구를 관리한다. '좌마', '우마'가 있으며, '두'가 붙으면 장관을, '조'가 붙으면 차관을, 그리고 '윤'과 '대부'가 붙으면 판관을 나타낸다. 무기와 관련된 것은 '병고료兵庫寮'이다.
일본의 '직職'(관직을 의미)에는 '수리직修理職'이라는 것이 있다. 궁전 내의 목공(토목사업)과 관련 있다. 장관을 나타낼 때는 '대부大夫'를, 차관을 나타낼 때는 '량亮'을, 판관을 나타낼 때는 '진進'을 사용하지만 '조助''를 사용하기도 한다.
황실 근위대는 '6위부衛府'가 있는데, 이 중 근위부近衛府(황실 경호, 내부 경호), 병위부兵衛府(황실 경호, 외부 경호), 위문부衛門府(황실 경호, 성문 수비)가 중요하다. '독督'은 장관을, '좌佐'는 차관을, '위尉'는 판관을 나타낸다.
▼ 제2군 편제
출처 : 『직무공보直茂公譜』, 기타 문헌, 일본 사이트 주의 : 인물에 따라 임진왜란부터 참전한 군인과 정유재란부터 참전한 군인이 있을 수 있으며, 중복되는 군인도 있을 것이다. 독자 여러분들이 확인해 보기 바란다.
▼ 제3군 편제
① 흑전장정(구로다 나가마사)
② 대우의통(오토모 요시무네)
구저성臼杵城은 대우의통(1558년 출생)의 아버지 대우종린이 1561년에 축성하여 1563년에 완성하였다. 동서 약420m, 남북 100m 정도이지만 사방이 절벽이며 간조 때 섬 서쪽이 조금 육지와 연결될 정도로 방어에 유리하다. 대우의통은 1576년에 집안을 승계하였다. 1586년에 규슈를 제패하기 위해 도진의구(7년전쟁의 제4군 도진의홍의 형)가 진공해 왔을 때 이곳에서 방어했다. 이 때 '국붕國崩'이라 몀명된 대포 2문을 발포하였다. 그 다음 해에 풍신수길이 규슈를 정벌하여 도진의구는 구저성을 정복하지 못했다.
▼ 수군(해군) 편제
■ 전황
☞ 7년 전쟁 초기와 명군 참전 후의 조선의 군령 체계, 초기 대응
▼ 일본군 제2군과 제3군의 진격로 및 조선군의 대응
제2군의 가등청정군과 제3군의 흑전장정군은 1592년 4월 18일(일본 4월 17일) 부산포와 김해에 도착한다. 제1군 소서행장군은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함락시키고 양산을 거쳐 4월 18일 작원관 전투에서 밀양부사 박진과 진주판관 김시민이 이끄는 조선군을 괴멸시키고 밀양성을 무혈입성한다. 제2군은 부산포 도착 후 양산과 언양을 거쳐 4월 20일에는 경주에 진격했다. 기장(현)에서는 4월 20일 오홍이 300명의 의병군으로 일본군 470여명을 사살하는 전투가 벌어지는데, 제2군 가등청정의 분대 중 일부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제3군 흑전장정군은 4월 18일 김해 도착과 동시에 공격하여 다음 날인 4월 19일 김해성을 함락시킨다.
4월 13일 일본군의 침공 소식을 접한 경상도 감사(현 도지사) 김수는 각 관청과 군부대로 전시체제 공문을 발송한 다음 상황을 파악하고 지휘하기 위해 밀양으로 향한다. 이 때 진주판관 김시민에게도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 같다. 왜냐하면 4월 18일에 벌어진 작원관 전투 때 김시민이 참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수와 기타 경로로 공문을 받은 경상좌우도 북부 지역 행정관과 군사들, 그리고 백성들은 일본군을 저지하기 위해 중로의 거점인 대구에, 좌로의 거점인 울산(경상좌도 육군사령부)으로 각각 집결하기도 하였으나 도망하거나 피난하는 곳도 있었다. 이 당시 김수는 군통솔권이 없었고 휘하에 몇 명의 행정관리들만 있었다. 감사가 군통솔권을 가지기 위해서는 조정에서 '순찰사'라는 임시 직책을 받아야 한다. 또한 전시체제였기 때문에 혼란과 혼돈이 가중되었다. 약탈과 방화, 도망과 피난, 내란 등의 염려가 있기 때문에 최고위직의 공무원(관리)이나 군지휘관이 내린 명령이 아니면 의심을 받게 된다. 명령이 여러 곳에서 나오면 병사들이나 백성들의 혼란은 더욱 가중된다. 이러한 일련의 이유들로 인해 김수는 의령에서 일어난 곽재우 의병장과 오해를 사게 되고 급기야는 불신으로 치닫게 된다. 김수의 이동 경로를 보면 일본군의 이동 경로와 나란히 가고 있다. 밀양성에 들어가니 늦봄비가 내려 성벽 자체가 무너져 내렸고 백성들은 혼란속에 빠져 있었다. 아마도 김수는 이곳에서 이순신에게 공문을 보낸 것 같다. 이순신이 4월 20일 접수한 김수 공문에는 '부산, 동래, 양산 함락, 일본군은 부대 를 나누어 육지 안으로 향함, 경상도 여러 진에 전선이 전혀 없음'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김수는 분명 경상우도, 모든 군부대라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혹자들은 경상도에 주둔해 있는 수군(해군)의 함선이 분명 남아 있는데 왜 김수는 '경상우도에 전선이 한 척도 남아 있지 않다'며 정부에 거짓보고를 해서 정부로 하여금 전략판단을 그릇되게 하였는가에 대해 그 책임을 김수에게 돌리고 있다. 그러면서 조선시대 함선 수에 대한 통계를 바탕으로 임진왜란 당시의 함선 수를 추정해 놓고는 김수를 '무능력한 행정관'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조정에서는 4월 17일에 경상좌수사 박홍의 장계(지방의 고위직 관리들이 지방의 중요한 일들을 왕에게 보고하는 글)를 통해 일본침공 소식과 함께 부산포가 함락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즉시 전시체제를 선포하고 총사령관(도원수), 수도방위사령관, 지역방위사령관을 임명한다. 제1군 소서행장군이 밀양성을 접수하고 대구로 출발한 19일, 이일 순변사가 한성에서 상주로 출발했다. 조선은 일본이 침략하리라는 소문을 2~3년 전부터 듣고 있었으며, 그 일환으로 황윤길(병조참판, 국방부 차관)을 정사正使(사절단 단장)로, 김성일(부제학, 학문기관의 실무최고책임자, 현재의 교육과학기술부의 차관보)을 부사副使(사절단의 부단장)로 하는 통신사通信使(외교사절단)를 1589년 11월에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그 다음 해인 1590년 3월에 일본에 도착한다. 일본에서 보여준 황윤길과 김성일의 태도는 완전히 달랐다. 황윤길은 주눅이 들어 외교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반면, 김성일은 당당한 태도로 조선정부의 입장을 관철시켜 나갔다. 통신사가 일본에 있는 동안에도 일본침공 소식은 조선으로 전해졌고, 조선정부와 백성들은 술렁거리고 있었다. 통신사는 1591년 2월에 부산으로 돌아왔다. 한성으로 올라온 황윤길과 김성일은 통신사 귀국 보고에서 '일본의 조선 침략 가능성'에 대해 황윤길은 '침략 가능성이 높음'으로, 김성일은 '침략 가능성이 없음'으로 서로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이런 의견을 제시한 것으로 인해 김성일은 7년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7년 전쟁)의 주범'으로 낙인 찍혀 온갖 오명을 뒤집어 써고 있다. 이런 사람을 선조와 조선정부는 왜 7년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병마사, 육군사령관)로 임명하였을까? '책임을 묻고자 했던 것일까?' 단순히 책임을 묻고자 했다면 궂이 군사작전권을 부여할 필요는 없다. 그가 왜 육군사령관으로 임명되고, 몇 개월 후 경상도 초유사로 재발령이 났는지는 임진왜란 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전시행정능력과 군사조직능력만으로도 충분하다.
김성일은 유성룡보다 5세 더 많지만 동시대인으로 이황의 직계 제자이다. 이 둘은 1564년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였는데, 그 이후의 관직생활은 많이 달랐다. 유성룡은 대부분 중앙관직에 있었고, 김성일은 중앙관직에도 있었지만, 지방관직을 역임했다. 중앙관직에 있으면서도 지방 순시를 많이 했다. 특히 황해도 지방을 순시했을 당시, 조정에 올린 보고서가 남아 있다. 보고서에는 황해도 지방의 행정, 세수, 군 행정에 대한 문제점과 해결책이 제시되어져 있는데, 통찰력이 탁월할 정도이다. 김성일은 또 조선정부의 정책을 과감히 비판하고 왕실의 비리를 탄핵했다. 강직한 성품을 소유한 김성일은 '대궐의 호랑이'로 불려졌다. 이와 같은 성품으로 인해 지방으로 많이 외유한 것은 아닐까?
김성일은 1592년 4월 11일 경상우도 병마사로 임명되어 창원으로 내려오던 도중 4월 16일 충주 단월역에서 침략 소식을 듣는다. 4월 18일경에 의령 정암진을 건너 4월 19일 마산 해망원(창원 병영 외곽)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창원을 점령하고 서쪽으로 진격해 오는 제3군 분대(정찰대인 것 같음)를 저지하고 병영을 수복한다.
원균은 임진왜란 발발 초기에 일본 침공 소식을 듣고 곧장 김해로 진격한 것으로 예상된다. 부하 지휘관에게 명령하여 전함을 침몰시키라고 한 것은 김해성이 함락당하고 퇴각하는 시점일 것이다. 이는 이순신의 장계를 바탕으로 날짜별, 시간별로 분석한 것을 토대로 한 것이다. 원균의 초기 이동 경로와 관련해서는 ☞ 7년 전쟁 초기와 명군 참전 후의 조선의 군령 체계, 초기 대응을 참고하면 된다.
이순신은 4월 17일 경상우도 육군사령관 조대곤의 공문을 접수하고, 18일에는 경상우도 해군사령관 원균의 공문을 접수한다. 조대곤의 공문으로 인해 부산포가 함락되었다는 것을 알았고, 원균의 공문으로 인해 동래성이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18일은 작원관 전투에서 밀양부사 박진 부대가 대패하고 밀양성이 함락된다. 또한 제2군 가등청정군은 부산포에, 제3군 흑전장정군은 김해에 도착한다. 4월 20일 이순신은 김수로부터 밀양성이 함락되었다는 공문을 받는다. 김수는 밀양성 함락 소식 공문을 발송하고 영산 방향으로 퇴각한 것으로 추정된다. 밀양성 함락 후 제1군의 대구로의 출발과 김해성이 함몰된 19일 이순신은 신병 700명을 점검하고 있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가 쓰는 것이라 했던가! 우리는 여러 사람들이 남긴 기록물을 토대로 시간대별, 일별로 교차분석하여 역사를 해석하지 않고, 어느 단편적인 지식만으로, 어느 개인의 문집에 들어 있는 내용만으로 해석하고 있지는 않은가? 임진왜란 발발 후 적어도 1주일까지는 조선의 관료, 군인, 백성들은 최선을 다했다. 현재 많은 오해를 받고 있는 김성일, 김수, 원균도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0년~20년 이전부터 조선정부를 이끌어 온 관료들에게 있다.
울산 함락과 관련해서는 이견이 있다. 어떤 저서에서는 언양과 울산이 17일에 함락되었다고 되어 있으며, 안동지역 의병장 김해의 '향병일기'에는 좌도 고을 수령들이 울산성에서 21일날 공성을 했다고 되어 있다.
▼ 작원관으로 진격하는 소서행장군과 제2군의 전장 확대
울산 함락은 제1군 소서행장군에 의한 것인가? 제2군 가등청정군에 의한 것인가?
동래성 전투가 벌어지기 전 울산에 위치한 경상좌병사 이각과 울산군수 이언함, 밀양부사 박진, 양산군수 조영규는 동래성을 지원하기 위해 소산역으로 달려갔다. 이언함과 조영규는 동래성으로 들어가 조상현 동래부사와 최후를 같이 했다. 이각은 동래성 외곽까지 왔다가 일본군의 병력 우위를 견디지 못하고 소산역으로 퇴각했다. 소산역에서 박진은 전방에 배치되어 있다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았다. 경상좌수사 박홍은 전투가 벌어질 때쯤 지원나온 것 같다. 수영 자체도 방어해야 되기 때문에 미리 수영을 비울 수는 없다. 혹자들은 박홍이 즉각 지원하지 않고 전투가 한창일 때 동래성까지 왔다가 퇴각한 것을 두고 '도망자'로 낙인을 찍는다. 퇴각할 때 무기와 군량을 불사른 것을 가지고 부정적 이미지로 인식시키고 있다. 전쟁터에서 도망이든 퇴각이든 물자는 파괴해야 하는 것은 상식이다. 박홍의 퇴각 방향은 아마 기장현 방향이었을 것이다.
소산역으로 일본군이 진격해 오자 이각과 박진은 좌영병과 밀양으로 퇴각한다. 16일 양산이 떨어졌다. 17일 언양과 울산이 함락되었다는 것은 양산을 점령한 소서행장군의 예하 부대가 언양과 울산 방향으로 약탈을 나간 것이라 보여진다. 제2군 가등청정군은 18일에 부산에 도착하고 곧바로 점령지를 따라 양산을 통과한 다음 언양을 거쳐 20일에 경주에 도착했다. 가등청정군의 본대가 울산과 그 주변을 공격해 들어갔다면 부산 도착 2일만에 경주에 도착하지는 못한다. 20일에는 기장에서 오홍이 주축이 된 의병 300여명이 일본군을 공격하고 47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린다(사라동 전투). 기장을 거쳐 동해안을 따라 북상한 일단의 부대가 울산 좌병영을 공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공격 부대는 아마 제2군 가등청정군 분대이거나 제5군이 아닐까 생각된다. 제5군 복도정칙군이 제2군 후미를 따라 올라가 영천성에 주둔하였기 때문이다.
■ 작원관 전투
① 방어(작원관)
1592년 4월 17일 조선 남부는 화창한 날씨였다. 진달래와 철쭉이 흐더러지게 피어나는 시기이다. 양산을 점령한 소서행장군은 밀양을 향해 북상했다. 박진은 양산으로 퇴각했다가 16일 밀양성으로 후퇴했다. 박진의 능사창군能射槍軍(활과 창으로 무장한 부대) 3개 부대는 작원관 황산잔교에 진을 치고 일본군을 기다렸다. 려旅는 125명으로 구성된 전투단위이다. 진주 판관 김시민은 윤탁, 유숭인과 함께 기병 50여명, 군사 100여명을 거느리고 영산에서 작원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박진 부대와 김시민 부대의 병력은 약 500여명이다.
선조수정실록에 '.....발통전거사發筒箭拒射 적연일부득진賊連日不得進...양산군원출기후梁山君遠出其後.....'라고 기록되어 있어 일본군의 작원관 공략은 16일 혹은 17일에 이루어진 것 같다. 통전(편전, 애기살)을 쏘면서 격렬하게 저항하자 직접공격 대신 우회공격으로 전술변화를 시도하였다. 이 전투는 송포진신松浦鎭信,(마츠우라 시게노부)과 소서(목호)작우위문小西(木戶)作右衛門(고니시(기도) 사쿠에몬=소서주전개小西主殿介)의 지휘하에 이루어졌다. 소서주전개는 소서행장 아버지의 첩에게서 낳은 배다른 형(서형庶兄)이다. 외생질(외가쪽 생질)인 종의지와 함께 양산성을 공략했다.
송포진신은 17일 저녁 한밤중에 매복을 하면서 신불암고개 방향으로 우회한 것 같다. 동국전란사 조선기왜란부조朝鮮記倭亂付條에 '.....적유영재기귀로賊踰嶺載其歸路.....'라고 기록되어 있다. 18일은 안개가 자욱하여 한치 앞을 분간할 수 없었다. 황산잔도 방향으로 방어하고 있는 조선군의 배후를 기습 공격한 것이다. 황산잔도 방향에서는 적장이 높다란 가마 위에서 은색으로 치장한 우산을 받쳐들고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퇴각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조선군은 낙동강변으로 밀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병력과 지리적 우위를 차지한 일본군은 언덕을 내려오면서 탄환으로 맹공을 가해 조선군을 강변으로 거세게 밀어 붙였다. 박진 밀양부사의 군관이었던 이대수와 김효우는 적군의 수급을 베면서 백병전을 펼쳤지만 적 탄환에 맞아 전사하고 말았다. 김시민 부대에 배속되어 참퇴장(도망하는 병사를 사살하는 지휘관) 직책을 맡은 윤탁과 함안군수 유숭인 부대도 모두 붕괴되어 거느린 군사 100여명이 몰살당했다. 김시민은 물에 빠져 헤엄쳐 나오는 유숭인을 발견하고 옷을 입혀 주고는 함께 퇴각했다.
박진 역시 밀양성으로 퇴각 명령을 내렸다. 일본군은 패주한 부대를 이끌고 밀양성으로 퇴각하는 박진 부대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낙동강과 밀양강이 만나는 지점의 북쪽까지 추격해 온 일본군의 기세에 박진 부대는 퇴로를 확보하지 못한 채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② 퇴각과 몰살(종병탄)
밀양강은 예전에 응천강(남천강)이었다. 밀양읍성 남쪽에서 낙동강과 만나는 지점까지를 응천강이라 부른다. 광탄진廣灘津은 삼랑진읍 임천리(예전 금물리)와 용성리, 상남면 예림리와 연금리 사이에 있는 나룻터이다. 광탄진 아래쪽 시목포柿木浦에 있는 강폭이 종병탄鍾柄灘이다.
이곳 종병탄까지 추격해 온 일본군의 기동성에 놀라 수심이 깊은 줄도 모르고 건너다가 퇴각하던 군사 대부분이 익사하고 말았다. 박진은 포위망을 뚫으면서 적의 군사 2명의 목을 베었다.
작원관 방어전 및 종병탄에서의 퇴각로 확보 전투로 인해 약간의 수군(해군)을 포함한 조선군사 500여명이 전사했다. 밀양성으로 퇴각한 박진은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방위할 계획을 세웠으나 대부대의 진격으로 인해 밀양성을 버릴 수 밖에 없었다. 농성을 하던 중 무기창고와 식량창고를 파괴한 다음 퇴각하였다.
밀양읍성 영남루와 나룻배(1910년대), 출처: 다음카페, 송산서원
■ 작원관 전경 사진
길에는 어디든지 역驛과 나룻터(진津)가 있고, 여행자가 편히 쉴 수 있는 편의시설이 있다. 또한 중요한 지역에서는 여행자를 검색하고 조사하는 시설도 있다. 역의 기능을 보조하여 숙식을 제공하는 대표적인 것이 국가관할의 원院과 관館이다. 지금도 일반인이나 공적 업무를 수행하는 하급 공무원이 자주 이용하는 숙박시설이 있는가 하면 고위공무원이나 외국의 사신이 이용하는 숙박시설이 있다. 보통 원은 일반인이나 공무원이 공무로 지방에 출장갈 때 이용하는 것이고, 관은 외교사절단이나 그를 맞이하는 고위공무원이 이용한다. 관關은 국경이나 교통의 요충지에서 통행인을 조사하는 곳이다. 작원관鵲院關은 관關, 진津, 원院의 세 가지 역할을 하던 곳이다. 작원관이 있는 자리에는 예전 작원진鵲院津이 있었다.
처절한 전쟁의 와중에 작원관은 잿더미가 되었지만 육로와 수로의 요충지로서의 역할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종전 이후 육로와 수로의 복구가 필요했다. 광해조(1609~1622) 이후, 옛터에 역원을 다시 세우고 관문과 천도를 복구하였으며, 작원의 포구도 정비하였다.
▼ 북쪽 방향에서 남쪽 방향으로
① 구천산 방향에서 바라본 작원관과 낙동강
사진 왼쪽 낙동강 줄기 따라 산허리가 길게 늘어서 있다. 이곳이 황산잔도이다. 황산잔도 입구에 작원관이 있다. 이 마을이 검세리다. 진주판관 김시민의 참퇴장 윤탁이 전투 중 물에 빠진 곳이 이 지점이 될 것이다.
② 검세리에서 바라본 작원관과 작원 터널
검세리에서 바라본 작원관과 작원 터널이다. 현재의 작원관은 1995년에 다시 세운 것인데 경상남도 문화재 제73호로 지정되어 있다. 예전의 작원관은 조금 더 아래에 있었다. 작원관의 문은 한남문捍南門이고, 누각은 공운루拱雲樓이다. '한捍'은 선조수정실록에 보이는 '한도捍道'에서 비롯된 것 같다.
출처: 다음 카페, 밀양광장 ▼ 남쪽 방향에서 북쪽 방향으로 ① 시루봉에서 바라본 삼랑진읍과 작원관 전투의 현장 검세리 사진 우측이 작원관이 있는 검세리이고, 왼쪽 저 멀리 보이는 평야 지대가 밀양강과 낙동강이 합쳐진다. 이 평야지대를 따라 올라가면 종병탄이다. 이곳에서 퇴각하는 박진 부대의 군사들이 대부분 익사했다. ② 시루봉 아래 낙동강변 철로에서 바라본 터널(황산잔도) ▼ 서쪽 방향에서 동쪽 방향으로 삼랑진읍 낙동강역이 위치한 매봉산 복천사에서 찍은 전경이다. 왼쪽 멀리 산 하단에 흰탑이 보인다. 작원관지이다. 작원관지에서 오른쪽으로 강 옆에 흰 건물이 보이는데, 수위관측시설이다. 작원관 전투 당시 우회 공격은 바로 앞에 보이는 산 너머로 온 것이리라! 배후를 급습당하였으니 낙동강변으로 밀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출처: 다음 카페, 밀양광장 ■ 작원관 전투와 관련한 원문 '賊入密陽境府使朴晉守鵲院江捍 捍道狹晋發筒箭拒射 賊連日不得進 개而賊搒陷梁山君遠出其後 守兵望之皆散 晋馳還府城焚兵庫倉穀而遁'[선조수정실록] '朴晉自梁山遮守黃山棧道 賊將承銀橋長銀傘而進 普力戰斬數級軍官李大樹金孝友中丸而死 賊踰嶺載其歸路 晋馳還本府焚倉庫突圍而走'[동국전란사, 조선기왜란부조朝鮮記倭亂付條] '在今勿里西卽凝川下流 潮汐來往之頭商船所迫之處 下有柿木浦鍾柄灘 壬辰四月十八日府使朴晉領兵遮賊于鵲院 朴爲賊所追不得由大路 避渡此灘江右諸軍末解其淺深 爭先徑渡太半溺死'[밀주구지, 광탄] 참고 문헌 : 조선왕조실록, 이순신 난중일기 및 장계, 김해 향병일기, 학봉집, 난중잡록 4월 17일, 8월 9일 기록, 임진전란사 동국전란사, 밀주구지, 일본사이트 TOK2, 위키피디아 DCN 국방시민연대 전쟁사위원회 위원장 권순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