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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Nov
정문부의 장평 전투
작성자:
한국의 산하
IP ADRESS: *.39.120.17 조회 수: 6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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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부의 장평 전투
-서전緖戰을 완전한 승리로 장식하라! -전쟁은 정正으로 병력을 움직이고 기奇로 운용함으써 승리한다! (범전자凡戰者 이정합以正合 이기승以奇勝-손자병법孫子兵병세편法兵勢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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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문부 선생의 행적과 일본군 제2군의 진격로
▼ 정문부 선생의 행적
정문부가 북평사로 임명된 것은 1591년 7월 30일이었다. 2일 후인 8월 2일 한성 동대문을 출발하여 포천, 철원, 김화를 지나 한달 뒤인 9월 2일 강원도 회양에 도착한다. 9월 중에 임지인 행영에 도착하여 북도 여러 진을 순행하였다.
7년 전쟁이 발발한 1592년 부산성이 함몰된 4월 13일 이후 정문부는 행영에서 4월 29일 부산성 함락 소식을 듣게 된다. 16일만에 조선 전역에 일본군 침공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5월 1일에는 동래성이 함락되고 송상현 부사가 전사한 사실이 전해지고, 5월 6일에는 울산과 양산이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는 것을 듣게 된다. 이날 행영을 출발하여 회령을 거쳐 5월 9일 경성에 도착한다. 이날 선조의 피난 소식이 전해지고 다음 날에는 임해군(제1왕자)과 순화군(제5왕자)이 연변에 도착한다. 왕자들을 모시라는 감사(함경도 도지사)의 지시에 따라 정문부는 정예병 3백을 옥련 만호(만호는 현재의 중령에 해당)에게 귀속시켜 지휘하게 하고, 평양에는 수성찰방(찰방은 현재의 대위 혹은 중위에 해당) 최동망을, 연변에는 경성판관(판관은 현재의 부군수 혹은 부시장에 해당) 이홍업을 보낸다. 그리고 경상도 청송부사(부사는 현재의 시장에 해당)로 있는 아버지에게도 서간을 보낸다.
5월 11일에는 신립이 패전한 소식을 듣게 되고, 6월 초순과 중순 사이에는 철령을 지키던 조선군사가 일본군에게 함몰되어 6월 12일 일본군이 철령을 넘었다는 비보를 받게 된다.
▼ 일본군 제2군의 진격로
일본군 제2군은 22,800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등청정은 10,000명, 과도직무는 12,000명, 상량뇌방은 800명이었다. 이들은 4월 17일 부산에도착하여 18일 언양, 20일 경주, 21일 영천, 신령, 비안을 점령하고 의성, 예천, 문경을 거쳐 28일 충주에서 제1군 소서행장과 결진한 뒤 다시 길을 나누어 죽산, 용인을 거쳐 서울로 진격하여 5월 3일 한성 숭례문(남대문)을 점령했다. 이후 5월 10일 선봉대로 임진강에 도착하여 5월 27일 임진강을 건넌다. 개성을 거쳐 6월 초순 평산(부) 안성역(일본측 사료에는 황해도 금교역, 현 서흥군)에서 소서행장과 길을 나누어 곡산(군)을 지나 노리현을 넘어 철령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6월 12일 철령을 통과하고 7월 15일 단천에 도착한다. 이 시기에 임화군과 순화군은 일본군을 피해 북으로 피난을 계속하고 있었다. 7월 17일 함경남도와 함경북도를 가르는 북관인 마천령(단천과 길주 사이에 있는 고개)에서 함경북도 육군지휘관 한극함을 패퇴시키고 해정창에서 조선군대를 함몰시킨다. 7월 18일에는 경성을 점령하고 22일 고풍산을 넘어 23일 회령성을 공격한다. 순화군을 보필하던 황정욱·황혁 부자의 노비들이 가는 곳마다 민가에 피해를 입혀 임해군과 순화군이 포로가 되는 길을 앞당겨주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8월 초순 일본군 1,000명을 호위대로 하여 임화군과 순화군을 경성으로 보내고 자신은 여진족을 공격한다. 그 이후 종성, 온성, 경흥을 거쳐 8월 하순에는 임화군과 순화군을 데리고 경성을 출발하여 남하한다. 9월 5일에는 북청에, 7일에는 함흥을 통과하여 안변에 주둔하게 된다.
일본의 사료에는 갑산지역까지 침공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갑산지역으로 일본군이 진격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 지역에 사는 백성들이나 관료들의 증언에 따라 갑산부사가 일본군이 아니라 조선인에 의해 살해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후치령까지 진격해 오는 일본군을 피해 갑산지역으로 피신하다 그렇게 되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 1592년 11월~1593년 8월까지 제2정부(광해세자)의 활동 지역 현황
▼ 일본군 제2군의 편제
참고: 일본 야후의 야후 지식, 일본 위키피디아, 일본 각 지자체, 기타 일본 사이트
■ 전역적戰域的적 상황(1592년 6월~1592년 10월)
1592년 6월 20일 기록(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선에 파병된 명군 중에서 최초로 압록강을 건넌 지휘관은 광녕 유격廣寧遊擊 왕수관과 원임 참장原任參將 곽몽징이다. 이들은 병사 506명, 말 779필을 거느리고 6월 17일에 압록강을 건너 조선땅에 들어왔고, 2일 후인 6월 19일에는 부총병副摠兵 조승훈祖承訓이 병사 1,319명, 말 1,529필을 거느리고 조선땅에 도착했다. 8월에 심유경이 '유격'이라는 칭호로 들어와 8월 29일 평양에서 소서행장과 화의회담을 하고 50일 이내로 명으로 돌아가 화의조건을 가져오겠다고 하고는 11월 14일까지 일본군을 묶어둔다. 12월에 이여송을 총지휘관으로 4만 3천여명의 군사가 조선에 진군한다. 중국의 사료에 따르면, 날짜가 약간 상이하다.
평안도 지역에 전시체제 사령부를 둔 조선정부는 6월 13일 선조가 영변(부)에 도착하여 제2정부를 발족시킨다. 이날 선조는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로 피난하기로 최종적으로 결정을 내렸다. 명나라로 피신하겠다는 논의는 신립의 탄금대 전투 패배 후인 5월 1일 임진강에서 최초로 논의되었다. 이 논의에서 이항복 도승지(현재의 대통령 비서실장에 해당)는 의주행을, 윤두수와 영의정(현재의 국무총리) 유성룡은 북도행을 주장했다. 임진강 방어선 실패 후 평양에서 2차 논의가 있었고, 평양성 방어 실패 후 영변에서 최종 결정을 내린 것이다. 다음 날인 6월 14일 선조는 의주로, 제2정부를 이끄는 광해세자는 강계(부)로 향한다. 광해세자는 평안도 서북쪽 지역인 강계로 간 다음, 서남쪽 지역으로 길을 돌려 7월 9일 강원도 이천(현)(현재 철원군 위쪽 지역)에 도착했다. 7월 28일까지 이천에 머물고 서북쪽 지역인 곡산으로 출발한다. 곡산을 거쳐 평양 동쪽에 위치한 성천(부)에 도착한 것은 8월 4일이었다. 8월 29일 심유경의 56일간의 임시휴전으로 인해 평양성에 주둔한 제1군 소서행장군은 11월까지 발이 묶이게 된다.
강원도는 4군 모리길성에 의해 차츰 함락되어 간다. 1592년 5월 18일경 일본군 4군 도진의홍, 도진충풍, 모리길성은 강원도 철원(부사 김협) 김화에 진격하였다. 모리길성부대는 6월 5일 회양성(부사 김연광)을 함락시키고, 철령을 거쳐 안변부에 진격한 다음, 동해안을 따라 남하한다. 통천(군수 정구), 고성, 간성을 지나 양양에서 주력부대는 강릉으로 남하하고 일단의 예하부대는 인제현으로 향한다. 춘천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역사적 사실로 보아 이 예하부대가 춘천으로 향한 것 같다. 여주 조방장 원호가 6월 10일 여주 후(구)미포에서 일본군을 방어하다 강원도 감사(현재의 도지사)의 명을 받고 김화에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해 춘천을 경유하여 김화로 향한다. 김화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해 진격하다 6월 19일 김화 갈동지구에서 일본군에게 괴멸당한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김화에 주둔한 일본군 혹은 모리길성의 예하부대 중 어느 하나의 부대에 의해 기습을 당하거나 협공을 당하였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 원호 장군의 전투(여강전투, 후미포전투, 갈동전투)
강릉으로 남하한 주력부대는 삼척에서 다시 일선 예하부대를 두타산성으로 진격시키고 주력부대는 다시 울진, 평해로 진격한 것 같다. 삼척부에서 두타산성을 함락하고 다시 삼척으로 복귀하여 전부대가 남하한 것인지, 아니면 예하부대는 두타산성을 거쳐 정선, 평창으로 향하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영해부에서 영해부사 한효순에 의해 차단당하자 일본군은 봉화로 향한다. 봉화에 진입하기 직전 유종개에 의해 다시 차단당한다. 8월 25일 모리길성 주력부대는 영원산성에서 원주목사 김제갑을 괴멸시킨다.
모리길성(승신)毛利吉成(勝信[모리 요시나리(가쓰노부)](?~1611년)는 원래 성은 모리(森)이고, 이름은 요시나리(吉成)라고 알려져 있다. 오와리 국 출신이며 아들은 모리승영(모리 가쓰나가)가 있다. 1592년 임진왜란때 2천 군사를 이끌고 일본군 제4군지휘관으로 시마즈 요시히로, 다카하시 모토타네, 아키츠키 타네나가, 이토 스케타카, 시마즈 도요히사 등과 함께 조선에 건너왔다. 시마즈 요시히로 등의 규슈 남부세력과 함께 강원도로 진군하였다. 또 조선 남부에 주둔 중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가하였으며, 명과의 강화 교섭 중 임랑포성을 쌓아 조선 남부에 주둔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아들 가쓰나가를 따라 출진하였고, 가토 기요마사 등과 함께 황석산성을 공략했다. 전주회의후 충청도에서 전라도로 진군했고, 이후 정읍회의에 참석한 좌군의 여러 장수의 건의에 따라 모리 가쓰노부는 부산으로 자리를 옮긴다. 부산으로 귀환하던 중 가쓰노부는 사천 선진리왜성을 축성하였고, 성은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넘겨주었다. 그 후 가쓰노부 자신은 부산에 진을 폈다. 제1차 울산성 전투에서 궁지에 몰린 가토 기요마사를 구원하였고, 이후 서생포왜성에 머물렀다.
한성과 경기도 일대는 6월 5일 전라감사 이광, 충청감사 윤선각, 경상감사 김수 등 3도 연합군이 근왕을 하기 위해 북상하던 도중 경기도 용인에서 일본군에게 완전히 괴멸당한다. 이 전투로 말미암아 일본군은 경상도에서 충청도, 경기도를 거쳐 황해도, 평안도 평양까지 보급로를 확보하게 된다. 제7군으로 편제된 입화종무는 6월에 한성에 도착하여 숭례문(남대문)에 배치되었다. 일본군은 전라도를 공략하기 위해 6월말경부터 한성과 경기도 일원, 그리고 충청도와 경상우도에 있던 일본군을 재배치하기 시작하였다.
☞ 1592년 7월 이후 경성 및 경기 남부 지역의 일본군 배치 현황
평안도 영원군수로 있던 고언백은 평양성 전투에 참가한 뒤 7월 25일 양주목사로 부임한다. 수도 한성에 집결해 있는 일본군 사령부와 예하부대는 한성을 기점으로 동북지역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양주목사로 부임한 고언백은 8월 8일, 9월 10일에 양주지역으로 약탈하러 나온 일본군을 기습공격하면서 태릉과 강릉을 보호한다. 9월 15일에는 일본군 600여명이 약탈, 방화하는 것을 추격하여 62명을 참획하는 전과를 올린다.
충청도의 청주와 충주는 내륙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이자 교통로이다. 경상도에서 보급되는 전쟁물자는 경상도 문경에서 조령을 경유하여 충주로, 김천에서 추풍령을 경유하여 청주로 수송된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일본군은 청주와 충주에 대규모로 주둔시키면서 한성으로의 물자보급을 원활히 수행하면서 충청도 동부 일대와 강원도 원주 일대, 그리고 전라도 일대를 점령해 들어가기 위한 전초기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전라도는 예나 지금이나 식량공급지이다. 임진왜란(7년 전쟁) 당시에는 전쟁물자의 보급기지 역할을 하였다.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식량조달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전라도를 공략하지 않을 수 없었다. 6월부터 8월까지 일본군은 전라도를 공략하기 위해 경상우도와 충청도의 전선에서 전라도로 공략해 들어간다. 6월 25일 운암전투(양대박-금산성 전투 일환)를 시작으로 7월 8일 이치, 웅치 전투(권율), 7월 9일 1차 금산성 전투(고경명, 유팽로)가 그것이다. 경상우도 남부 해안에 주둔한 일본해군도 전라도로 진격해 들어갔다. 6월과 7월에 전라좌도 해군사령관 이순신에게 괴멸당하는 수치를 당하고 만다.
경상도에서는 일본군의 거점지역 확보가 점차 축소되고 있었다. 낙동강 주변으로 거점을 확보한 일본군은 전라도를 공략하기 위해 경상우도 남부에 위치한 진주와 북부에 위치한 성주를 중심으로 집중 공략에 들어갔다. 김성일 초유사招諭使(난리가 났을 때 임금의 명을 받고 해당 지역으로 내려가 백성들을 의와 예로 타이르고 설득하는 관리, 임시 벼슬)를 중심으로 조선군은 낙동강 서안에 전선을 구축해 놓고 있었다. 진주로 진격해 들어가는 의령, 영산에는 곽재우 의병장이, 합천을 통해 전라도로 가기 위한 교두보인 초계에는 정인홍이, 그리고 거창을 통해 전라도로 가기 위한 우척현에는 김면이 각각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조선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낙동강 서안에서는 지루한 공방전이 지속되고 있었다. 이 시기 경상좌도 지역에서도 일본군의 점령지 확장은 점차 난관에 부닥치게 되었다. 경상좌도 남부에 위치한 영천과 경주를 탈환하기 위한 전투에서 조선군이 승리함으로써 일본군은 낙동강 동안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북부에 위치한 예천, 영주, 안동 지역에서도 조선군의 저항은 계속되어 일본군은 함창 덕통역 주변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6월에서 9월 사이 일본군은 낙동강 서쪽 지역으로도 진격해 들어갈 수 없었고, 동쪽 지역으로도 전장을 확장시킬 수 없었다. 이러한 전장 상황 속에서 10월 진주성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 관북지역(함경남북도)의 전역적戰域的 상황과 정문부 평사의 전략적 선택
7년 전쟁이 발발한 1592년 부산성이 함몰된 4월 13일 이후 정문부는 행영에서 4월 29일 부산성 함락 소식을 듣게 된다. 5월 6일에는 울산과 양산이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는 것을 듣게 된다. 이날 행영을 출발하여 회령을 거쳐 5월 9일 경성에 도착한다. 5월 11일에는 신립이 패전한 소식을 듣게 되고, 6월 초순과 중순 사이에는 철령을 지키던 조선군사가 일본군에게 함몰되어 6월 12일 일본군이 철령을 넘었다는 비보를 받게 된다. 일본군은 6월 12일 철령을 통과하고 북관인 마천령을 지키던 육군지휘관(북병사 한극함)을 해정창 전투에서 함몰시킨 다음 7월 18일에는 경성에 들이닥쳤다. 이 때 정문부는 청암으로 피신하고, 그 이후 용성에서 지내게 된다. 8월 중순에 무계에 이르러 의병을 모은 다음, 9월 16일 경성에 들어간다. 경성이 함몰된 이후 재진입때까지 정문부는 거의 2달 가량을 경성과 명천 사이에서 지내게 된다.
이 2개월 동안 정문부 평사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앞에는 일본군이, 뒤에는 여진족이 버티고 있으며, 중간에는 조선인 반란자가 끼여 있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어란 무계호에서 명천 방향으로 내려갈 수도 없고, 경성 이북으로 벗어날 수도 없다. 바다로 갈 수도 없다. 그렇다고 고산준령을 넘어 갑산과 삼수를 거쳐 평안도로 갈 수도 없다. 경성을 탈환한 다음 회령과 명천에 있는 내부의 적을 소멸시켜야 했다.
▼ 일본군의 배치 현황 및 교두보 확보를 위한 정문부의 반란자 진압
<<일본전사 조선역>> <기이국 문서>에 따르면, 북청과 길주 사이에 가등여좌위문加藤與左衛門 , 구귀사랑병위九鬼四郞兵衛, 원전오랑우위문原田五郞右衛門, 길익반좌위문吉益半左衛門, 정상대구랑井上大九郞, 귀전손병위貴田孫兵衛 등 6명의 지휘관이 배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중에서 단천지역 지휘관은 구귀사랑병위九鬼四郞兵衛와 율생일랑우위문栗生一郞右衛門이다. 길주성 지휘관에 대해 조선왕조실록에는 '충정忠正'이라는 이름이, 일본측 사료에는 '가등가중加藤可重'이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길주성에는 또한 귀전손병위貴田孫兵衛(제2차 진주성 전투 때 논개와 관련된 무장으로 추측)와 그의 통역관인 아부차랑위문阿部次郞衛門이 있었다. 정문부의 문집과 일본측 사료를 통해 그 당시의 정활을 볼 때, 정문부의 문집에 기록된 직정도문直正道文, 도관여문都關汝文, 거도문巨道文 중에는 귀전손병위와 아부차랑위문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정문부는 먼저 육군사령부와 해군사령부가 있는 경성을 탈환하기 위해 9월 12일 경성에 도착하지만 반란자 국세필이 저항한다. 국세필은 회령부의 향사 국경인의 작은 아버지(숙부)이기도 하다. 국경인은 임해군과 순화군을 사로잡아 가등청정에게 넘겨준 인물이다. 정문부는 국세필을 설득하여 9월 16일 경성에 입성한 다음 국세필을 안심시키고 함경북도 백성들에게 거병할 것을 촉구하는 격문을 쓴다. 또한 경성 안에 있던 군사들을 소집하여 훈련시킨다. 길주에 주둔한 가등가중加藤可重은 경성과의 연락이 두절되자 9월 19일 96명의 정찰대를 보낸다. 정찰대 지휘관은 아무런 의심없이 군사들을 성벽 아래 도열시키고 혼자서 성 안으로 들어갔는데, 정문부가 이미 국세필과 그의 아들 국생에게 지휘관을 예전과 같이 맞이하게 한 다음 사살하라고 명령을 내린 상태였다. 국생이 공격하고 국세필이 목을 베었다. 성 안의 군중에게 목을 걸게 하고는 나머지 군사들이 성 위로 올라가 성밖에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기도 하고, 성 밖으로 나가 추격하여 섬멸하였다. 9월 20일 경성부의 관인이 없어 부령부의 관인으로 장계를 올리고 9월 28일 제2차 격문을 돌렸다. 경성 주변이 내부적으로 안정이 되었지만 정문부가 즉시 국세필과 국생을 처단하지 않은 것은 회령의 국경인과 명천의 말수가 여전히 일본군의 명령에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문부의 경성 탈환 과정은 반간계反間計와 연환계連環計, 만천과해瞞天過海와 차도살인借刀殺人의 병법이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내부의 적(스파이)을 이용하라', '상대방에게 족쇄를 채운 다음 공격하라', '기만행위를 하라', '남을 이용하여 적을 물리쳐라'
☞ 창의토왜적도, 정문부의 충덕사(경기도 의정부), 북관대첩비
제2차 격문을 함경북도 전 지역에 발송하면서 각 지역의 군사를 모집하여 경성에 집결하라 하였다. 이 과정에서 회령을 장악하고 있는 국경인에게도 징병 모집과 함께 항복을 권하는 공문을 보냈다. 국경인은 정문부의 공문에 따르지 않고 길주의 일본군과 함께 정문부를 공격하려 했다. 회령에 있던 조선인들은 일본군의 만행으로 울분을 터트렸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정문부의 거병, 경성 탈환, 일본군 지휘관의 처단 등의 소식이 기폭제가 되어 유생 오윤적으로 하여금 회령을 탈환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회령 향교에 있던 유생 오윤적과 도훈도 신세준에 의해 회령 아전 국경인이 처형되었다는 전령이 10월 14일 정문부에게 전해졌다. 명천에 있던 조선인들 역시 정문부의 경성탈환 소식에 이어 국경인의 처형소식을 전해 듣고 명천 품관들과 백성 수백명이 반란자 정말수를 공격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정문부는 곧바로 오촌 권관(종9품 무관, 현재의 소위에 해당) 구황, 안원 권관 강문우에게 각각 기병 30명씩을 배속시켜 정말수를 공격하라 명령을 내리고, 자신 휘하의 군관軍官(지휘관 휘하에 배속되어 행정업무 및 전령업무를 담당하는 무관) 여러 명도 함께 보내어 정말수를 사로잡아 처단하였다.
▼ 반란자 진압 후의 함경도 형세
정문부는 함경도에서 일본군을 격퇴시키기 위한 선제 조건은 경성탈환과 회령 및 명천지역에 거점을 둔 반란자를 진압하는 것이라 확신했다. 북관지역을 수복하는 과정은 3단계로 이루어졌다. 첫 번째 단계로 북관의 중심부라 할 수 있는 경성에 주둔한 반란자 국세필을 진압했다. 그리고 전략적 공세를 취하기 위해 배후에 있는 국경인을 진압했다. 마지막으로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한 거점인 명천을 수복하였다.
두만강 건너 여진족의 변란이 불씨로 남아 있었지만 10월 중순 이후 북관지역은 자유를 찾았고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한 교두보가 되었다. 노토와 노평지역에 거주하는 여진족은 조선에게 상대적으로 호의적이었으나 두두족은 여전히 조선에게 부담으로 남았다. 1592년 9월 15일 함경도 순찰사 이희득이 선조에게 보고한 내용에 안변에서 육진까지 모두 일본군 지휘관을 배치하고, 각 주둔지마다 3~4백명씩 주둔시키고 있다.
▼ 북관 지역 군부대 현황
정문부의 <<농포집>><신도비명 및 서문(황경원)>에 '북방 22고을'이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북방은 함경남북도(관북지역, 철령 북쪽)를 이른다. 북관(마천령 북쪽)에는 주로 군부대가 위치해 있었다. 육군사령부인 병영과 해군사령부인 수영이 있었으며, 예하 소속 부대인 첨사진, 만호진이 있었다. 7년 전쟁 당시 조선시대 군 지휘체계는 병마사 및 수사-첨사-만호-권관이었다. 병마사는 종2품으로 현재의 중장(군단장)에 해당되며, 수사는 정3품으로 현재의 소장(사단장)에 해당된다. 첨사는 종3품으로 현재의 준장(여단장)에 해당되며, 만호는 정4품으로 현재의 대령 및 중령 (연대장 및 대대장) 정도에 해당된다. 또한 권관은 종9품으로 현재의 소위(소대장)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관북지역 중 함흥은 조선왕조를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고향이다. 아버지 이자춘과 이성계는 이곳 함경도에서 여진족과 자주 전투를 치러야 했다. 조선 건국 이전인 고려, 고려 이전인 발해와 고구려, 고구려 이전인 고조선 시기에는 이 여진 땅(현재의 중국 동북 3성)이 모두 조선의 땅이었다.
고구려와 발해를 거치면서 동북아 지역에서는 거란족과 여진족이 발흥하여 세력을 확장함에 따라 고려시대에는 영토가 축소되었다. 고려 제16대 예종(1105년~1122년) 때 윤관은 여진족을 토벌하고 두만강과 압록강 너머 9성을 설치하게 되지만, 조선왕조를 건국하는 시기가 되면 영토가 더 축소되어 현재의 한반도가 되었다. 조선 제4대 세종(재위 1418년~1450년) 때 여진족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김종서가 건의하여 이곳 북관지역에 6진을 설치하게 되었다. 6진 설치 이후 여진족의 침입이 얼마나 자주 일어났는지는 군부대 설치만 보더라도 확연하다. 두만강 하류 지역인 경흥(조산보루와 녹둔도)에서 시작하여 상류지대인 경원, 온성, 종성을 거쳐 회령에 이르기까지 바둑판처럼 진지가 구축되어 있다. 또한 부령 남쪽과 동해안 지역 및 압록강 상류지역에도 진지가 구축되어 있다.
■ 장평 전투(1592년 10월 30일)
길주성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를 장평, 장덕산, 가파리, 석을고개石乙古介 등으로 불리고 있지만, 정문부 선생의 전쟁 보고서의 제목이 '길주장평파왜적장'으로 되어 있어, 전투 명칭을 '장평 전투'라고 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장평은 이 일대 모두를 일컫는 지역이라 보여지며, 가파리는 고지도(규장각 고지도)에 '상가'와 '하가'로 표기되어 있다. 전투는 평야지대에서 시작하여 산마루에서 끝이 난다. 1단계 평야지대에서 벌어진 전투 장소를 가파리로, 그리고 2단계 산마루에서 벌어진 전투 장소를 석을고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장평전투는 10월 30일 오후에 벌어지는데 편의상 1단계 전투를 평야전(가파리 전투)이라 하고, 2단계 전투를 야산전(석을고개 전투)이라 한다.
▼ 지휘 체계
평사와 도사, 그리고 판관은 비슷한 개념이다. 평사는 병마절도사 휘하에서 사무를 총괄하는 사람이며, 도사와 판관은 관찰사 휘하에서 사무를 총괄하는 자이다. 이들은 모두 현재의 부군수 정도에 해당된다. 평사의 경우 현재 의미로는 장학사겸 선생이라 할 수 있다.
▼ 조선군과 일본군의 병력 규모
1588년 6월 권징이 함경 감사로 발령날 때 선조와 나눈 대화 속에 함경도 토병이 전에는 6천이었는데, 현재는 4천 정도이며, 무거운 역사 때문에 유리 상태에 빠져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 조선군의 병력 배치
총사령관인 정문부는 경성 남쪽에 위치한 영강(역)에서 군을 인솔하고 명천으로 진군하는 과정에서 길주목사 정희적, 수성 찰방 최동망과 합세한다. 찰방은 종6품으로 현재의 면장 혹은 사무관에 해당된다. 현대에는 공문서를 포함하여 우편물을 취급하는 장소가 우체국이고, 물자 수송을 포함하여 사람이 이용하는 장소가 철도역과 버스역이며, 사람들이 여행을 하면서 잠을 잘 수 있는 곳이 여관이다. 조선시대에는 도와 도내의 중요 경계에 관문(예를 들어 경북 문경의 조령관문)을 설치하고 그 관 사이 도로에 역을 설치하였다. 용산우체국이 서울지역의 우편물을 집중시키는 중요 거점인 것처럼 조선시대에도 중요 역에는 그 주변의 여러 역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중요 역에는 중앙에서 '찰방察訪'(찾아서 살펴본다는 뜻, 관할역의 비리를 찾아 조사하는 업무)이라는 관직명으로 관리직을 파견하였다. 수성관(역)은 경성에서 회령으로 넘어가는 지점에 설치되어 있었다.
▼ 전투 경과
① 평야전(가파리 전투)
② 야산전(석을고개 전투)
급제 : 과거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공식적으로 직책을 받지 않은 사람
▼ 전투 결과 및 전투 보고서 전달자
사수射手: 사부射夫, 사군射軍이라고도 하며, 조선시대 군 병과 중에서 활을 쏘는 병사
▼ 장평전투의 의의
일본군 제2군인 가등청정군이 함경도로 진격할 무렵, 한 도의 행정을 책임지는 감사(현 도지사)와 군사를 책임지는 병마사(육군지휘관) 및 수사(해군지휘관), 그리고 비상시에 중앙에서 파견되어 군사를 총괄하는 순찰사 등이 모두 함몰된 상태에서 일개 평마사가 경성을 탈환하고 북관지역을 수복한 다음 길주성에 주둔한 일본군을 괴멸시킨 것은 단순히 서전緖戰을 완전한 승리로 장식한 의미 이상을 가진다 하겠다.
군사적인 측면에서 서전 장식은 군사들의 사기와 직결되는 것이므로 전투 국면을 유리하게 전개시킬 수가 있다. 길주성의 일본군 1,000명 중에서 왼쪽 귀를 잘라낸 것이 820개였다. 이로 미루어 보아 전투에 참가한 일본 병사 대부분이 괴멸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영동책에 주둔한 300명의 일본군이 지원나오지 못한 것은 조선군의 좌위 복병장이 지원군을 차단하는 역할을 했거나 장평전투가 전광석화와 같이 빨리 전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정문부의 전쟁 전략은 기병騎兵 중심의 군사 편제를 활용하여 '기寄'를 운용한 점(복병, 우회로 차단, 포위 및 측면 공격)에 있으며, 전술은 기마의 기동성과 병력 분산을 통한 병력 집중화(조운진鳥雲陣: 진법陣法 중의 하나로 부대간에 서로 지원해 줄 수 있는 위치에 주둔해 있으면서 새와 구름처럼 자유자재로 이동할 수 있는 부대 배치 방법)에 기초하고 있다. 함경도에서 벌어지는 나머지 전투 역시 이와 유사한 전략과 전술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 정문부의 농포집, 정탁의 약포집, 조선왕조실록, 기타 사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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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N 국방시민연대 전쟁사위원회 위원장 권순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