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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May
임진왜란이 남긴 여주의 비운, 신륵사
작성자:
한국의 산하
IP ADRESS: *.208.195.249 조회 수: 7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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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남긴 여주의 비운, 신륵사 -신륵사에서 떨어지는 꽃잎은 친구의 영혼이런가!(고려의 고승 나옹 화상의 출가는 친구의 죽음으로 비롯되었다)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한 원호 장군의 복병지, 조포나루와 봉미산 신륵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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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의 지평선 여주를 가면 늘 가는 곳이 있다. 그곳에 가면 무언지 모를 애석함이 묻어난다. 그곳에는 군대 시절 아련함도 깃들여 있다. 역사의 흔적과 내 생애의 한 순간이 머물고 있는 그곳! 도도한 역사의 흐름을 막지 못해 화마가 닥쳐오고, 그 화마속에 온통 재가 되어 흩어져 버린 그곳! 그곳에서 바라보는 물줄기는 예나 지금이나 약간의 지형만을 바꾼 채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조포 나루는 그렇게 내가 다가왔다. 조선시대 내륙 운송에서 3대 나루 중의 하나였던 이곳. 조포 나루가 내게 특별한 것은 임진왜란 때 한성을 향해 거침없이 진격해 들어오는 일본군의 진격 속도를 이곳 조포 나루에서 멈추게 하였던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의 지식이 그다지 많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여주는 '신륵사'와 '세종대왕릉', 그리고 '명성왕후'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90년도 초반, 나의 군대 시절은 이곳 여주 대신면에 있는 부대였다. 군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5분 대기'라는 것이 있다. 적으로부터 침략을 당했을 때, 즉각적으로 출동하여 적으로 하여금 교두보(최소의 희생으로 아군이 적군을 공격할 수 있도록 공격위치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데, 확보된 그 지점을 교두보라 한다. 현대에서는 기업에서 이 용어를 많이 사용한다. 한국의 기업이 외국의 여러 나라에 물건을 판매하는 경우, 여러 나라 중 가장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나라에 집중적으로 투자하여 거점을 확보하게 되는데, 이를 교두보라 한다)를 확보하지 못하게 해야 하는데,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5분만에 출동태세를 끝내야 한다. 내가 속한 부대의 '5분 대기조' 임무는 여주대교를 확보하는 것이다. 여주 읍내에서 여주대교를 건너면 좌측길은 여주 대신면을 경유하여 양평, 서울로 진입하고, 우측길은 신륵사로 가는 길이다. 읍내에서 여주 대교를 건너오면 우측에 얕은 야산이 있다. 이곳이 내가 속한 부대의 '5분 대기조' 매복지이다. 훈련이 있는 날이면 신륵사 위쪽 남한강에서 '도하작전'을 실시하기도 했으며, 훈련이 없는 평일에 가끔씩 이곳 신륵사를 찾아 대민봉사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신륵사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한다. 관광지에 버려져 있는 '쓰레기 수거 작전'을 펼치기 위해서였다. 학창시절부터 역사에는 관심이 많았었지만, 7년 전쟁(임진왜란과 정유재란, 1592~1598)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군 복무를 마치고 학업을 다시 계속하게 되면서부터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그 당시의 정치 이념, 관료인 집단, 선조(그 당시의 임금)의 정치력, 이순신 제독의 해전 전략과 전술, 육지전에서의 전투 전개, 의병의 활동, 일본군과 조선군의 공방전, 명군의 참전 등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원호'라는 인물을 접하게 되었다. 그 이후 신륵사를 찾게 될 때마다 신륵사 들어가기 전에 세워져 있는 원호 장군의 '원호장군임진전승비' 앞에 한참이나 서 있게 되었고, 조포나루터(현재의 신륵사 앞 황포돛배나루터)를 걸어본 다음에 신륵사를 방문하게 되었다. 신륵사가 있는 이곳 북내면은 임진왜란 당시 강원도 지역이었다. 그래서 원호 장군의 첫 직위가 '강원도 조방장'이었으며, 원주에 있었던 강원도 감영(도청)의 감사(도지사) 유영길이 원호 조방장을 호출했던 것이다. 유영길이 원호 장군을 불러들인 이유는 기록 속에는 없다. 그 당시의 전황으로 보았을 때, 신립이 일본군을 맞아 충주로 내려갈 때 원주의 감영에서도 군사와 군수물자를 지원했기 때문에, 충주와 그 인근에 주둔해 있었던 일본군이 강원도 원주 방면으로 침공해 들어갔으리라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원호장군 임진전승비 신륵사 건너편의 금모래은모래 유원지. 저 위쪽에서 전차와 장갑차로 도하훈련을 했다. 금모래은모래 유원지에서 바라본 조포나루터와 신륵사 황포돛배와 오리가 보이고, 저 멀리 여주대교가 눈에 들어온다. ■ 신륵사와 문화재 현황 신라 진평왕眞平王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고려 말인 1376년(우왕 2) 나옹懶翁 혜근惠勤이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한데, 200여 칸에 달하는 대찰이었다고 하며, 1472년(조선 성종 3)에는 영릉(세종대왕릉) 원찰英陵願刹로 삼아 보은사報恩寺라고 불렀다. 이때 한번 크게 확장되었고, 이어 임진난에는 전쟁 참화로 인해 거의 폐허가 되었다가 300여 년 전인 1702년(숙종 28년)에 다시 손을 보아, 오늘에 이른다 한다. 신륵사로 부르게 된 유래는 몇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 하나는 “미륵(나옹을 가리킴)이, 또는 혜근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龍馬를 막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려 고종 때 건너마을에서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우므로 사람들이 붙잡을 수가 없었는데, 이 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나서서 고삐를 잡자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神力으로 말을 제압하였다 하여 절 이름을 신륵사라고 했다”는 것이다. ▼ 국가지정 문화재(보물 7점)
▼ 도지정 문화재(4점), 군지정문화재(1점)
■ 국가지정 문화재 ▼ 보물 제180호 조사당 신륵사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다. 조사당은 절에서 덕이 높은 승려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건물이다. 신륵사 조사당에는 불단 뒷벽 중앙에 나옹을, 그 좌우에는 지공과 무학대사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대웅전 뒷편에 있다. 조사당 좌측 뒤쪽으로 계단이 보인다. 보물 제228호 보제존자 석종, 보물 제229호 보제존자 석종비, 그리고 보물 제231호 보제존자 석종 앞 석등이 있는 지점으로 가는 길이다. 조사당 앞의 수령 500년 된 향나무. 무학대사가 스승을 모시는 조사당을 지을 것을 걱정할 때 이태조가 대들보 없이 집을 짓고 기념으로 심었다 한다. ▼ 보물 제225호 다층석탑 신륵사 다층석탑은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탑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을 받는다. 탑의 명칭은 아래에서 위로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라 부르는데, 기단부에서 탑신부까지 한 장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아래층 기단의 네 모서리를 보면 물결무늬를 돋을새김해 둔 것이 특이하다. 원각사지십층석탑(국보 제2호)과 비슷한 돌의 재질을 사용하였으며, 조각 양식 역시 비슷하다. 하얀 대리석이 주는 질감은 탑을 한층 우아하게 보이게끔 한다. 문화재 전문가에 의하면, 조선 성종 3년(1472)에 신륵사를 대규모로 새단장할 때, 이 탑도 그때 함께 세워졌을 것이라 한다. ▼ 보물 제226호 다층전탑 신륵사에 가면 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만날 수 있는데, 이를 전탑塼塔이라 한다. 신륵사 아래로 한강이 유유히 흘러간다. 저 멀리 평야를 마주하고 있는 경치 좋은 바위 위에 이 탑이 우뚝 서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경기도와 경상북도 안동지역에 몇 기가 남아 있을 뿐이다. 탑의 외형을 보면 밑부분에 돌로 되어 있고, 윗부분에 흙벽돌로 되어 있다. 돌로 되어 있는 부분이 기단부이고, 흙벽돌로 되어 있는 부분이 탑신부이다. 기단부는 2층을 쌓은 뒤에 다시 3단의 계단을 쌓았다. 기단과 계단의 돌의 재질은 화강암이다. 흙벽돌로 쌓은 것은 외형적으로 6층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6층 위에 돌 하나를 올려 놓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전문가에 의하면, 이러한 형태는 애매한 구조이며,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전탑과는 달리 몸돌에 비해 지붕돌이 매우 얇아 전체가 주는 인상이 독특하다고 한다. 탑의 북쪽에는 수리할 때 세운 비(신륵사동대탑수리비神勒寺東臺塔修理碑)가 전해오는데, 거기서 ‘숭정기원지재병오중추일립崇情紀元之再丙午仲秋日立’이라는 연대가 있다. 문화재 전문가들은 이 탑을 수리한 것이 조선 영조 2년(1726)을 뜻하지만, 이 때 다시 세워진 것이므로, 지금 탑의 형태를 만들 당시의 원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한다. 벽돌에 새겨진 무늬로 보아도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 보물 제228호 보제존자 석종 우리나라의 국민들 중 우리의 역사에 대해 약간의 지식만 가지고 있더라도 불교의 나옹 화상 혹은 나옹 선사라 얘기하면 누구인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만큼 나옹은 우리의 삶에 깊이 아로새겨져 있다. 그러나 역사의 깊이가 있는 사람이라도 '보제존자'가 누구냐, 여주 신륵사의 보물과 관련되어 있는 고려말의 고승이 누구냐 물으면 선뜻 대답하기가 곤란하다. '나옹'은 익숙하지만 '보제존자'라는 말은 낯설기 때문이다. 신륵사에는 보물 7점 중 보제존자와 관련된 보물이 3점 남아 있다. 보물 제228호로 지정된 보제존자 석종, 보물 제229호로 지정된 보제존자 석종비, 그리고 보물 제301호로 지정된 보제존자 석종 앞 석등이 그것이다. 보물 명칭 모두에 '보제존자'가 붙어 있다. 왜 나옹 화상을 '보제존자'라 했을까? 그것은 나옹이 살아있을 그 당시 왕(고려 공민왕)이 나옹을 왕의 스승(왕사王師)으로 봉하면서 내려준 칭호에서 비롯된다. 그 칭호는 '왕사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근수본지중흥조풍복국 우세 보제존자王師 大曹溪宗 師 禪敎都摠攝 勤修 本智重興祖風福國 祐世 普濟尊者'이다. '보제존자 나옹'이 된 것이다. 선종과 교종을 통합시키는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나옹이 불교에 들어서기 전의 이름은 '아원혜'였다. 나옹은 호이다. 나옹을 다른 이름으로 '혜근'이라고도 불린다. 나옹은 경북 영덕에서 1320년에 태어나 1376년에 입적할 때까지 56년을 살았다. 나옹이 처음 출가한 곳은 경북 문경시 산북면 전두리 공덕산(912m, 사불산) 묘적암의 요연선사이다. 그 뒤 전국의 이름있는 절을 두루 다니다가 24살(1344, 충혜왕 5년) 때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에 있는 천보산(423m) 회암사(현재의 회암사지)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3년 후 원나라로 건너가 인도 승려 지공의 지도를 받았다. 10여년 후인 1358년(공민왕 7년)에 귀국하여 여러 곳을 다닌 뒤 1361년부터 회암사의 주지가 되었다. 회암사는 무학대사와도 깊은 관계가 있는 사찰이다. 보물로 지정된 무학대사 부도가 있기 때문이다. 나옹은 10년 뒤인 1371년에 왕사의 명을 받았다. 그리고 경남 밀양으로 향하던 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보제존자 석종'은 나옹의 사리탑이다. 돌로 종 모양의 사리탑을 만든 것이다. 입적한 후 3년 뒤인 1379년(우왕 5년)에 이 탑을 세웠다. 고려 후기의 석종형 부도 양식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라 한다. 뒤쪽에서 촬영 옆에서 촬영 종 모양이 보물 제228호인 보제존자 석종, 석종 앞의 석등은 보물 제301호인 보제존자 석등, 그리고 뒤에 있는 것은 보물 제229호인 보제존자 석종비. 보물 제228호 보제존자 석종 ▼ 보물 제229호 보제존자 석종비 나옹 화상이 입적한 후 석종(사리탑)을 세울 때 석비도 함께 세웠다. 비의 앞면에는 끝부분에 글을 지은 사람과 쓴 사람의 직함 및 이름에 대해 적고 있는데 글의 맨 앞에 적지 않는 것은 드문 예이다.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이색이 짓고, 유명한 서예가인 한수가 글씨를 썼는데 부드러운 필치의 해서체이다. 전체적으로 고려 후기의 간략화된 형식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 보물 제300호 대장각기비 대장각기비는 대장각(『경률론』을 만들어 보관하던 곳)의 조성에 관한 여러 가지 기록을 적고 있는 비다. 극락보전 서쪽 언덕이자 전탑 위쪽 언덕에 있다. 비문의 글씨는 권주가 새겼는데, 비몸이 크게 파손되어 전체의 내용을 파악할 수는 없다. 뒷면에는 경률론을 만들고 비석을 세우는데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다. 비를 세운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해동금석원』에는 1383년(고려 우왕 9년)이라 추정하고 있다. ▼ 보물 제301호 보제존자 석종 앞 석등 나옹화상의 석종(사리탑) 앞에 있는 8각형 석등이다. 석종, 석비를 세울 때 같이 세웠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세부분으로 이루어진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에는 표면 전체에 꽃무늬를 가득 새겨 장식하고 있다. 화사석은 각 면에 무지개 모양의 창을 낸 후, 나머지 공간에 비천상飛天像과 이무기를 조각했다. ▼ 도지정 문화재와 군지정 문화재 ① 문화재 자료 제133호 삼층석탑 신륵사 앞 한강변 암반에 정자가 서 있고, 그 너머로 암반 위에 세워둔 삼층석탑이 보인다. 단층기단을 구비한 평면방형의 3층 석탑이다. 탑의 북쪽에는 수리할 때 세운 비(신륵사동대탑수리비神勒寺東臺塔修理碑)가 전해오는데, 이 기록을 참고로 할 때 나옹스님을 다비한 장소가 전탑과 석탑이 있는 지점임을 추정할 수 있다. 당시 수습된 사리로 부도를 조성하고, 화장한 장소에 탑을 세웠음을 알려주고 있다. 인도의 갠지즈강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② 향토유적 제14호 신접리 고인돌 이 고인돌은 원래 여주군 북내면 신접리에 있었다. 고인돌 형태는 탁자형이다. 지금은 여주 신륵사 산문 초입에 위치한다. 사진 속 오른쪽에 괸돌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복원되는 과정에서 쐐기돌이 넣어진 것인지 확인할 수는 없다. 덮개돌의 크기는 가로, 세로, 높이로 대략 2M, 2M, 30cm 정도로 약 3톤 내외로 보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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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N 국방시민연대 전쟁사위원회 위원장 권순삼 kwonsanha@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