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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Mar
보령읍성 (保寧邑城)/배용순
작성자:
천년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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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보령현의 외곽에 쌓았던 보령읍성의 남문 문루 건물로, 세종 13년(1431)에 현감 박효성이 지은 것이라고 전한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화려한 팔작지붕집이다. 1층은 양편의 기둥을 성벽 위에 걸쳐 세워 성곽의 일반 문루처럼 가운데 1칸만 통행하도록 되어있다. 기둥과 같이 긴 주춧돌 위에 원기둥을 세웠으며, 2층은 누각을 설치하고 간단한 난간을 사방에 둘렀다.
건물의 앞면에 ‘해산루(海山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중종(재위 1506∼1544)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의 친필이라고 한다.

안쪽에서 바라본 모습.

읍성의 축조와 관계된 기록은 <정대동헌기>에 보이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 말 왜구 때문에 그 침입을 받을 두려움이 있어 1400년에 봉당성을 쌓았으나 성이 좁고 지가 얕으며 산세의 험준함과 우물이 있는 이로움이 없으므로, 1430년 가을에 순찰사 최윤덕과 감사 박안신, 병사 이흥발이 다시 성터를 살펴 봉당성의 동쪽 1리 쯤에 있는 지내동의 당산 남쪽으로 터를 잡고, 서산군수 박눌생과 보령현감 박효성이 몇 개월만에 성을 완성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현감 박효성의 뒤를 이은 정대가 1431년 겨울에 부임하여 다음 해인 1432년에 객관을 비롯한 성 내의 건축을 이룩하였다 한다.
읍성 안에는 현재 보령 중학교와 주포 초등학교가 자리잡고 있다. 성벽은 학교를 지으면서 동벽의 남쪽과 서벽의 북쪽이 파괴되었다. 나머지 성벽도 상단부가 많이 무너지고 중간 이하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전체의 둘레는 비록 성벽이 없어진 부분이 있으나 복원하면 약 870m가 된다.
남벽의 문지 좌우는 내외협축이고 나머지는 거의 모두 내탁하였다. 크기 1m 이상의 폭과 두께가 70㎝ 정도의 커다란 석괴를 쌓고, 이 큰 석괴의 틈사이에는 작은 쐐기돌을 끼우거나 얹어서 조선시대의 전반기에 쌓은 읍성류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문은 남문이라고 하는 해서루가 있는 주통로와 북문지, 동문지라고 부르는 동북각부, 동벽의 중앙에 있는 동문지 등 모두 4개처가 남아 있다. 기록에 보이는 적대 8처는 성벽이 굽어진 부분이 7처이고 북벽의 거의 중간부에 무너진 석축의 돌더미가 있는 곳이 있어서 8처가 된다. 즉 성벽이 직선으로 달리다가 바깥쪽으로 휘면서 꺾인 지점 7처에 각루처럼 적대가 시설되었던 듯하며, 북벽은 길다랗게 뻗은 벽의 중앙부에 따로 적대를 축조하였던 것이다. 기록에는 140칸 이상의 관아와 공공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게단으로 올라가본다.



문이있던 자리다.

읍성안에 학교가 있어, 북쪽으로 가기위해 학교를 가로질러갔다.
이 돌은 아마도 읍성돌을 사용한것 같다.

내탁으로 이루어진 성곽이다. 왼쪽은 학교부지이고, 오른쪽이 성곽이다.

동쪽에서 북쪽으로 이어진 성곽으로 복원된것이다.

북쪽 성곽.

이번에는 남문으로 돌아와 성 외각을 보기로 한다.
서쪽으로 이어진 성곽은 몇십미터 이어지다가 끊긴다.

오른쪽엔 각종 비석이 세워져있고...


치성도 보인다.

낮게 동쪽으로 이어진다.

민가가있어서 멀리 돌아갔다.
동쪽 성곽이다.

동쪽에서 북쪽으로 이어지고...

북쪽 성곽이다.

서쪽으로 길게 뻗는다.

복원이 끝난부분부터 잡초다.

서쪽으로 이어지는데 거의 유실되어있었다.
읍성둘레가 870m라니 상당히 작은 읍성이라 할수 있겠다.

보령읍성 한바퀴 돌며 조사하는데 30분도 안걸렸다.
복원된구간도 있지만 유실된구간도 많아 이왕 하려면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
중학교 건물안에는 발굴된 5층석탑이 있었다.
보령리 5층석탑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39호 : '84. 5. 17지정)
고려 후기에 조성된 탑으로 원래 진당산 서쪽 폐사지(廢寺址) 기슭에 매몰,방치되었던 것을 1974년에 보령중학교 교정으로 옮겼다. 높이 3.5m(기단부 1.3m), 지대석 판석 6장, 기단부 저석 4장, 탑신과 옥개석이 서로 다른 돌이고, 5층 탑신과 상륜부는 유실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