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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Apr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격전지, 성산성을 가다!
작성자:
한국의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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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격전지, 성산성을 가다!
-정발 장군과 송상현 부사 vs 유림 장군과 홍명구 감사
-조선시대에 무신은 문신의 악세서리에 불과했다!
필자는 7년 전쟁(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역사적 사실에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병자호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이해의 폭이 넓지 않다. 성산성과 김화읍성, 그리고 김화 지역에 대해 갖는 인상은 임진왜란 발발 초기에 여주 신륵사에서 일본군의 북진을 저지시킨 원호 장군에 대한 것이다. 징비록에는 '춘천'에서 전사했다고 되어 있지만, 선조수정실록과 효종실록에는 '김화'에서 전사했다고 되어 있다. 원호 장군의 행적을 추적하는 과정에 이곳 김화에까지 이르렀다.
본 글에서는 원호 장군의 전투와 관련된 것을 위주로 그 당시의 지형도를 그렸다. 하지만 홍명구·유림의 김화전투는 전투 상황 설명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여주 신륵사와 양평은 눈으로 많이 접해 본 곳이기도 하지만, 지도 역시 상세한 것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김화 지역은 익숙하지 않은 지역일 뿐만 아니라 참조할 만한 지도가 많이 없기 때문이다. 홍명구·유림의 김화전투에 대한 전투도가 나오길 기대해 본다.
■ 조선 정부의 피난과 일본군의 진격
조선의 수도 한성에서 평양으로 진격하는 루트는 크게 서쪽 루트(서로)와 동쪽 루트(동로)가 있다. 서쪽 루트는 황해도 평산에서 다시 서로와 동로로 나눈다. 평산에서 봉산 방향은 서로이고, 평산에서 신계 방향이 동로이다.
① 서쪽 루트(한성~파주~임진강~개성~평산~황주~평양)
4월 30일 조선 정부는 북쪽으로 피난, 5월 3일 일본군이 한성을 점령한다. 조선군은 5월 7일 임진강 방어선을 구축한다. 일본군 1군과 2군, 그리고 3군은 북진하여 임진강에 5월 14일 도착하여 5월 18일 임진강 전투를 치른다. 5월 18일 임진강 전투를 치른 그때 조선 정부는 평양성에 주둔하였다. 임진강을 건넌 일본군은 계속 북진하여 황해도 평산(부) 안성역에서 1군과 3군은 황해도와 평안도로 진격하고, 2군은 함경도로 진격한다. 2군은 황해도 곡산(군) 노리고개를 통과한 다음, 강원도 지역을 지나 6월 12일 철령을 통과한다. 임진강 전투가 실패로 돌아가자 6월 11일 평양을 떠난다. 6월 13일 평안도 영변(부)(현재의 시에 해당)에서 광해 제2정부를 발족시키고, 광해군은 6월 14일 강계(부)로 피난을 떠난다. 6월 15일 선조는 영변 서쪽(의주 방향)인 가산(군)에, 제2정부는 영변 위쪽(강계 방향)인 운산(군)에 있을 때, 평양성 전투가 벌어지고 평양성이 함락된다. 이때부터 동년 8월 1일까지 광해 제2정부는 종묘사직을 받들고 감국만 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통수권과 군령권을 의미하는 교서와 인장은 내리지 않은 상태였다.
한성에서 강원도 지역으로 진격한 4군은 도진의홍 부대와 모리길성 부대가 나누어 진격한 것 같다. 도진의홍 부대는 임진강까지 진격했다가 강원도 철원으로 들어간 것 같고, 모리길성 부대는 동두천, 양주를 거쳐 5월 18일경 철원 밑의 영평(현)에 도달하였다. 그 이후 철원, 평강, 김화, 회양을 점령한 이후 철령을 넘어 함경남도 안변에 들어갔다가 강원도 동해안 지역으로 남하한다.
② 동쪽 루트(한성~양주~연천 혹은 철원~삭령~토산~신계~수안~상원~평양)
■ 강원도 김화(현)의 전략적 중요성(고려시대와 조선시대)
강원도 철원, 김화 지역은 삼국시대부터 현재까지 군사 요충지로서 전투가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특히 고려시대의 홍건적과 왜구, 조선시대의 일본군, 청군과의 전투는 역사상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1361년(고려 공민왕 10년) 홍건적은 20만의 병력으로 고려를 침입하였다. 강원도 원주 영원산성에서 1차 패전을 한 이후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북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고려군은 후퇴하는 홍건적을 섬멸하기 위해 김화의 마현리 일대에 포위망을 구축했다. 포위망에 걸려든 홍건적은 이곳 마현리에서 대패한다.1381년(고려 우왕 7년) 왜구가 강릉에 침입했다. 그 이후 강원도 회양과 평강까지 진출한다. 남시좌와 권현룡(?-1386)에 의해 김화에서 대패한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 7년 전쟁 속의 김화
1592년(조선 선조 25년)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하여 6월 초에는 전라도와 평안도를 제외한 모든 지역이 일본군의 점령하에 들어갔다. 강원감사 유영길은 여주목사겸 경기·강원 방어사 원호로 하여금 김화를 탈환하라는 명령을 하달하고 원호는 동년 6월 19일 김화까지 진군한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절을 달리하여 다루기로 한다.
▼ 병자호란 속의 김화
1637년(조선 인조 15년) 조선의 평안감사 홍명구·평안병사 유림이 이끄는 평안도 근왕병 5,000여명(홍명구 기병 2,000, 유림 포수 3,000)이 청군 우익군 6,000여명(조선왕조실록에는 1만명과 개활지에서의 홍명구 부대와 전투시 우회 기습 부대)과 김화 성산성 자락에서 대치하고 있었다.
1636년 4월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황제'라 칭하며(청 태종, 홍타이지皇太極), 조선에게 사대를 강요하며 11월까지 성의를 보이라고 사신을 보냈으나 답신이 없자 12월 2일에 10만 대군으로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이 전쟁은 인조의 '삼전도의 치욕'으로 끝이 났다. 10년 전 광해군 때 후금은 명나라의 마지막 숨통을 끊기 위하여 조선을 침략했었다.
선조 때의 7년 전쟁(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광해군 때의 정묘호란, 인조 때의 병자호란의 중심에는 바로 무신을 경멸하고 국방과 경제를 도외시한 결과 이외에 또 다른 무엇이 있는가! 7년 전쟁의 베테랑들이 수없이 많이 있었는데도 이를 활용하지 못한 조선 정부의 내치는 그야말로 파국 그 자체였다.
1636년 12월 9일, 드디어 청군은 명나라의 지원세력을 압사시키기 위해 압록강에 이르렀다. 의주(목) 백마산성에는 임경업 장군, 안주(부) 안주성에는 유림 장군, 자산(군) 자모산성에는 홍명구 감사가 방어하고 있었지만 청군은 선봉 기병대를 우회시켜 13일 이미 평양을 지나 한성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안주성에 있던 평안병사 유림의 보고가 정부에 전달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고, 15일 밤 인조와 소현세자는 강화도 로 향하기 위해 길을 나섰지만 길이 미끄럽고 말의 속도가 더디어 지자 남한산성으로 되돌아왔다.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고립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홍명구는 징집령을 내려 근왕병을 모집하는 동시에 자기 휘하의 기병 2,000을 별장 장훈으로 하여금 먼저 진군시킨다. 12월 14일 평양 근처 자산(군) 자모산성에서 함께 출발한 병사 유림이 강동(현)에서 정부의 명령이 없는 상태에서 군대를 움직일 수 없다며 머뭇거리자 홍명구가 설득하여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동로(동쪽 루트)를 따라 내려오는 동안 청군의 소규모 부대를 제압하면서 폭설과 혹한 속에 진군이 느려 다음 해인 1637년 1월 26일 철원 김화에 진을 쳤다. 청군 역시 김화로 진격해 오고 있었다.
전략 선택과 작전 수행에 있어 홍명구와 유림은 이견을 보인 것 같다. 홍명구는 개활지에서의 전투를 주장했고, 유림은 산성에서의 전투를 주장했다. 김화전투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과 남구만(1629~1711, 영의정 역임,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울릉도와 독도 지키기에도 앞장섰던 인물이다)이 안주와 김화 지역을 답사하면서 그 지역에 남아 있는 기록과 주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만든 신도문이 있다. 이 두 사람의 이전 행적을 살피지 않고, 또한 전투 후 정부 평가와 현지인 평가를 교차적으로 평가하지 않은 채, 어느 일방의 기록을 근거로 설명하게 되면 왜 이 두 사람이 이견을 보였는지 제대로 된 평가를 하기는 어렵다.
청군은 기병이었다. 홍명구 부대 역시 기병이었다. 반면 유림은 보병(포수)이었다. 유림의 포수 중에는 청주의 산행포수山行砲手(사냥을 하는 포수) 300명이 있었는데 이들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영조실록). 유림 역시 병자호란이 끝난 후에 인조와의 대화에서 '전쟁무기는 화포가 제일'이라고 말했다.
조선 정부는 이미 청군이 침략해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홍명구는 압록강 유역에 있는 의주(목)의 산성을 새롭게 구축할 것, 평양성을 새롭게 구축할 것 등을 건의하였고, 유림은 노강진과 선사진 등 수군(해군)진을 설치할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경제력 고갈과 과도한 세금 부과 등으로 인해 군사기지 정비, 병사 모집 등이 제대로 진척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김화전투에서 단 하루도 되지 않아 탄환 및 화살이 떨어져 교전 능력을 상실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1627년(병자호란 10년 전), 홍명구는 임진왜란 당시 유성룡과 함께 전쟁을 지휘한 윤두수의 아들 윤훤이 평안 감사로 있을 때 종사관(행정 및 군사 참모)을 지냈다. 청군은 조선군이 주둔한 산성을 우회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었으며, 몰려오는 청군을 맞아 평양성을 지킬 수 없음을 안 홍명구 및 여러 장교들은 평양성을 비울 것을 건의했다. 윤훤은 평양성 사수를 주장하였지만 결국 평양성을 비우고야 말았다. 이때 평양성을 사수하지 못했다 하여 평양성은 폐기된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10년후 병자호란 때 역시 청군은 의주 압록강에 있는 산성부터 내지의 산성까지 모두 우회하는 전략을 취하였다. 홍명구는 전략적 차원에서 산성 전투를 치르게 되면 청군은 또 우회하여 남한산성으로 진격하게 될 것이라 판단한 것 같다. 전술적 차원에서는 기병의 활용이었다. 개활지에서의 전투와 기병의 활용은 인조로 향하는 청군의 칼날을 조금이라도 늦추려는 전략적 판단이 강했던 것 같다.
개활지에서의 전투는 기병 대 기병의 격돌이었다. 기병을 어찌할 것인가? 산성을 우회하여 인조로 향하는 칼날의 진격 속도는 어찌할 것인가?
유림은 전략적 차원에서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두는 전투를 선택했다. '전투는 이기기 위한 것'이다. 전술적 차원에서는 포수의 활용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청군이 명나라를 공격할 때 조선 정부에게 파병을 요구해 왔다. 파병 사령관으로 유림을 원했다. 파병 사령관으로 출전하기도 했으며, 계속되는 요구에 조선 정부는 유림을 수군통제사(3도 해군총사령관)로 임명해 남쪽으로 보내기도 했다. 김화전투에서 청군은 1차로 개활지에서 홍명구군을 전멸시켰지만, 홍명구군을 전멸시킨 후 유림군을 공격했지만 몇차례의 공방전 끝에 청군이 대패했기 때문이었다. 유림군과의 전투에서 청군은 사령관 야빈대(청태종의 누이 남편)를 잃었다.
1637년 1월 26일, 김화에 진군한 조선군은 전투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고, 김화로 진격해 오고 있었던 청군은 27일 조선군 주둔지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28일의 전투에서 청군은 홍명구군을 전멸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산 능선에 주둔해 있던 유림군을 향해 총공세를 폈다. 개활지에서 홍명구가 유림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유림군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이 3개월 후 유림 장군이 탄핵받는 빌미가 된다.
28일 새벽 청군은 3개 부대로 나누어 홍명구군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개활지에서 전투한 시간은 약 3시간 정도였다고 한다. 2,000여명의 기병이 단 3시간만에 궤멸된 것이다. 평안도 병사들은 청군의 침입에 대비해 최전방에 배치된 정예병들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삼면에 포위되었다 하더라도 3시간만에 전멸된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한쪽 능선에는 유림 장군이 포진해 있어서 청군 역시 전략적 판단을 해야 하기 때문에 홍명구군에게 완전히 집중 타격을 가할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 인조실록에는 다른 한 부대에 의한 기습공격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투 시작 시점에는 홍명구군이 서전을 장식하며 청군 두 명의 장수를 죽였다고 한다. 잠시 후 청군의 한 부대가 산 뒤편으로 돌아 나오면서 기병이 말을 버리고 보병으로 전환하여 산 위에서 홍명구군을 포위하면서 진격했다. 이 순간에 유림 부대에게 지원 요청을 했지만 유림 장군은 지원하지 않았다. 홍명구는 활과 칼로 적을 상대하다 화살 3대를 맞고 전사하였다. 향년 41세였다. 홍명구의 시신은 군관 박형이 손수 거두어 주었다. 인조실록에는 '지원 요청을 하자 유림이 도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지원 요청을 할 수 있는 전장 조건이 아니었던 것 같다.
기습공격으로 홍명구군이 궤멸되자 청군은 유림 부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4차례나 파상공세를 퍼부었지만 모두 실패하고, 청태종의 누이 남편인 '야빈대'가 유림 부대의 저격병에게 사살당한다. 청군은 거의 궤멸되었지만 청태종은 계속 증원군을 보낸다. 탄환과 화살이 바닥나자 유림은 퇴각과 동시에 인조가 있는 남한산성으로 가기 위해 병사들로 하여금 파손된 총포를 모으게 한다. 추격병을 따돌리기 위해 총포에다 도화선을 연결한 후 불을 붙이게 하였다. 기만 작전을 쓴 것이다.
전투가 끝난 2일 후, 인조는 1월 30일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고야 말았다. 유림은 이런 사실도 모른 채 남한산성으로 향하다가 2월 3일 가평에서 치욕적인 소식을 접하게 된다.
홍명구는 문신이었지만 전략가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전략에 어두운 문신이어서 개활지에서 전투한 것이 아니라 한 시간이라도 더 인조에게 향한 청군의 집중된 병력을 분산시키고자 했다. 유림은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전략 구상과 함께 전술을 구사했다는 측면에서 탁월한 전략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7년 전쟁의 논공행상 과정에서 보여 주었던 문신 우위의 차별적 행태를 병자호란 때 역시 그대로 보여주었다. 1658년(효종 9년)에 홍명구에게는 충렬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진 반면, 유림에게 충장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진 것은 1796년(정조 20년)이었다. 138년 동안 유림은 역사에서 잊혀진 사람이었다.
전투 지역에 대해 이견이 많다. 현재의 백수봉(240m)이 유림 장군의 지휘소였고, 그 좌우의 백전 능선이 유림 부대가 주둔한 지역이라는 것이다. 인조실록에는 '백전산栢田山'으로, 순조실록에는 '백전伯田'으로 되어 있다. 조선군 5,000여명, 청군 6,000(인조실록에는 10,000 기병) 도합 11,000~15,000명의 병사가 김화전투에 참전한다. 현재의 전투 지역으로 알려져 있는 읍내리와 생창리 일대만 고려한다면 전투 지역이 너무 협소하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의 읍내리, 생창리, 암정리, 용양리 등으로 전투 지역을 확장해야 하며, 현재 그 당시 병사들의 무덤이라 알려져 있는 전골총이 있는 근북면 금곡리 일대 역시 전투 지역으로 포함시키는 것이 타당하다. 청군의 기습 작전이 있었다면, 금곡리를 돌아 배제를 넘어 읍내리로 들어올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는 점, '전골총'으로 추정되는 장소가 문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는 점 때문이다.
김화 전투가 끝나고 피난에서 돌아온 김화현감 이휘조가 1,000여명의 시신을 수습하여 밭과 들에 6, 7개의 무덤을 만들어 장사를 지내고, 묘의 형체가 사라져 8년 후인 1645년에 다시 토석을 쌓아 무덤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18세기 중엽에 발간된 '여지도서'에는 현의 동쪽 5리 지점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 반면, '철원군지'에는 김화읍 생창리 북쪽 전방 성제산 기슭 비무장 지대 인근에 위치한 '옛무덤'을 '전골총'이라 기록하고 있다. 또한 '관광 철원'이라는 책자에는 '전골총은 김화읍 읍내리 백수봉 기슭에 있다'라고 되어 있다.
지난 2001년 강원대 문화유적지표조사단(단장 최복규 사학과 교수)이 김화읍 용양리 농경지에 있는 무덤이 전골총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을 제시하자 2004년 철원군은 육군 3사단에 협의를 요청했었다. 3사단은 작전상의 이유를 들어 불가하다는 통보를 보내왔다고 한다. 그 이후 철원군과 3사단간의 협조가 어느 정도 진척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전골총戰骨塚
■ 성산성
▼ 성산성 개념도
■ 원호 장군과 김화 갈동 전투
이천(부)는 현재의 이천시 창전동 창전청소년문화의 집(구, 이천경찰서) 자리이다. 이 북쪽 지역에 아리산이 있는데, 아리산은 관후산, 망현산, 향교산으로 불리며, 이곳 아리산 밑에 아천역(현재의 송정동)이 있었다. 아천역은 고려시대에 아리역, 안리역으로 불리었으며, 이천 관내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 이천 관아 서쪽에 안흥지(연못)가 있었으며, 애련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현재 그 위치 그대로 있다.
선조수정실록은 해당 월에 발생한 사건을 해당월의 첫째 날에 모두 기술해 놓았기 때문에 정확한 날짜를 알 수 없다. 1592년 5월 1일자에는 조방장 원호가 여강의 벽사에 주둔하여 적을 공격하여 섬멸시켰고, 강원 감사 유영길이 호출하여 돌아갔다가 구미포에 있는 적을 발견하고 적을 섬멸했다고 되어 있다. 또한 동년 6월 1일자에는 일본군이 강원도 김화를 점령하자 유영길이 명령하여 원호가 김화로 출전하고, 김화에 주둔한 적이 매복하여 원호가 전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선조실록에는 1592년 5월 22일, 5월 26일, 그리고 1597년 2월 25일에 원호의 행적을 기록해 놓고 있다. 정탁의 피난행록 7월 23일자에 '여주목사 원호'라 기록되어 있지만 정황은 알 수 없다.
원호(元豪 1533~ 1592)는 1567년 무과에 급제한 무인으로 7년 전쟁이 발발하기 전 경원부사와 전라우도 수군절도사를 지냈다. 1583년 경원부사로서 여진족 니탕개의 침입을 격퇴하였고, 순찰사 정언신의 건의에 따라 경흥 녹둔도에 둔전을 실시하는 것을 주관하였다. 1587년 전라도 고흥 녹도에 왜구가 침입하였다. 녹도 만호 이대원이 전몰하였다. 이때 전라좌수사는 심암이었고, 전라우수사는 원호였다. 복병선 5척이 공격당했는데, 침입한 왜구를 막지 못해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원호는 만포첨사를 역임하고 고향에 은거하다가 1592년 7년 전쟁 발발 후 조정으로부터 지역방어 사령관(조방장助防將, 현재의 여주군 북내면은 그 당시 강원도 지역이었음, '조방장'의 명칭은 도道 전체 지역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범위 내의 지역을 담당하는 직책, 조방장보다 더 넓은 지역을 담당하는 직책은 '방어사'임)을 명받았는데, 그 시점은 명확하지 않다.
이 시기에 원호 장군을 얘기하면서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변응성이다. 조선왕조실록, 징비록, 원주변씨족보, 기타 문헌 등을 시간대별로 분석해 보면 변응성은 1579년 무과에 급제한 후 강계부사를 역임하고 아버지 상을 당해 고향에 있었다. 7년 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전시체제의 인사 단행을 시작했고, 그 일환으로 변응성은 경주부윤 윤인함을 대신하게 되어 경주로 내려갔다. 경주가 함락되고 다른 지역 역시 함락되자 변응성뿐만 아니라 죽령, 조령, 추풍령 등을 방어하기 위해 임명한 사령관들도 북쪽으로 퇴군하기 시작했다. 경주부윤은 계속 윤인함으로 남게 되고 변응성은 경상수사(해군사령관)로 발령나지만 임지로 떠나지 못한 것 같다. 5월 중순, 여주 지역에서 원호 조방장과 협력하여 마탄馬灘 지역에서 일본군을 공격한 것이 사실이라면(징비록 등의 문헌), 이 전투 당시 변응성의 보직은 경주부윤 혹은 경상수사였을 가능성이 크다. 정부에서는 8월에 가평 전투의 책임을 물어 조경과 원호를 백의종군시키도록 건의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변응성을 경상수사로 임명한지가 4개월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원호 조방장은 동년 6월 중순, 철원 김화 전투에서 전사하게 된다(징비록에는 춘천). 마탄은 현재 어디를 가리키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고, 다만 조선왕조실록의 선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성탄城灘이 마탄일 가능성이 크다.
5월 이후 일본군이 북쪽으로 전선을 확대하자 경기도의 행정관과 사령관들은 황해도 혹은 강원도로 이동하게 된다. 이때 변응성은 양주, 가평으로 이동한 것 같다. 가평 전투 후 경상도로 내려가 경주읍성 탈환작전에 참여한다. 1594년 광주·이천 지역 일대를 담당하는 경기좌방어사가 되어 현재 양수리의 용진 마진산성馬鎭山城(남양주시 조안면 진중리, 운길산 수종사 밑에 있는 마을)에 주둔한다. 7년전쟁이 끝난 이후 1602년경 경기방어사겸 수원도호부사가 되어 수원 독성산성을 1602년에 다시 수축하게 된다. 현재 독성산성 밑에는 도원수 권율비와 함께 변응성비가 나란히 서 있다. 권율비는 새롭게 단장했지만, 변응성비는 초라하게 방치되어 있다.
강천면과 북내면은 조선시대에 원주목에 속해 있었다.
▼ 여강 전투
조방장 직책으로 향병 수백명을 이끌고 신륵사(=벽사=보은사)에 주둔하여 일본군의 도강을 저지시켰다. 선조실록 1592년 5월 22일자에는 비변사가 원호의 승전보를 전해 듣고 선조에게 조장장 원호의 품계를 올려주기를 청하고 있다. 5월 22일은 선조의 피난행렬이 평양에 도착한 후 2주가 되는 시점이고, 5월 18일은 임진강 전투가 벌어진 시점이다. 4월 28일 탄금대 전투 후 일본 제1, 2, 3군의 5월 2일 한성 점령, 3군의 진격 루트, 여주에서 평양까지의 거리, 일본군의 점령지 및 전선 확대로 인한 정보 전달 속도의 지체, 제4군 도진의홍과 모리길성 부대가 5월 18일경 철원까지 진격했다는 것, 조선군의 정예병 부재, 향병 모집의 어려움, 전투 중의 강원도 감사 유영길의 호출 등을 감안해 보았을 때, 여강 전투의 전투 시점은 5월 초, 일본군은 제5군, 제6군, 수군으로 편제된 육전 사령관 부대 중의 하나, 병력 규모는 소규모 부대일 가능성이 높다.
신륵사에서 방어선을 구축한 며칠 후 강원감사 유영길이 원호를 본도로 불러들였다. 원호가 본도로 돌아간 후 며칠 후에 다시 여주 신륵사로 돌아온 것을 보면 강원감사에게 작전 명령을 시달받기 위해서였거나 아니면 충청도와 접경지인 강원도 지역의 전황이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지만, 확실한 전황을 알려주는 기록은 없다.
강원감사 유영길의 호출 명령을 받고 원호가 진지를 비운 사이, 일본군은 여주목의 민가와 관사의 목재를 이용하여 배를 만들어 강을 건너 한양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일단의 소규모 부대들이 점령지 확대와 보급로 확보를 위해 후미포를 비롯해 한강을 따라 주둔하고 있었다.
선조실록을 참조해 보면 원호는 여강 전투가 끝나고 바로 장계를 올린 것 같다. 5월 22일자에는 '여주 전투'만을 언급하면서 품계를 올려주어야 한다고 비변사가 선조에게 청하고 있으며, 5월 26일자에는 '여주 위쪽에서 잇따라 참획하는 공'이 있음을 언급하면서 조방장겸 여주목사와 여주와 원주 일대, 즉 경기·강원 방어사(양도 부근 고을 절제)로 임명해 줄 것을 청하고 있다.
이 전투에서 원호는 일본군의 수급은 봉하지 않고 장물만 올려 보낸 것 같다.
5월 4일~9일에는 이순신 함대의 1차 출전(옥포, 합포, 적진포 해전)이 있었다.
▼ 후미포 전투
후미포 전투가 벌어진 시점은 5월 중순으로 추정된다. 이 당시 충청도에는 충주, 강원도에는 원주에 일본군의 대규모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충주에 주둔한 일본군은 죽산, 양지, 용인을, 원주에 주둔한 일본군은 지평(현)(양평군 지평면), 양근(군)(양평), 양주, 광주를 확보하여 한성과 통하려 하고 있었다. 문헌에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지만 강원감사 유영길이 조방장 원호에게 호출 명령을 내린 것도 역시 이런 상황과 연결되어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5월 18일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지고, 제4군 모리길성 부대는 철원 김화까지 진출해 있었다.
이 시기 경기도 지역 일대는 제5군과 수군 편제 육전 사령관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전라·경상·충청 삼도의 감사(전라도 이광, 경상도 김수, 충청도 윤선각)는 전라도 병력을 주축으로 경기도 수원으로 북상하고 있었다. 이탁영(경상 감사 김수 참모)의 '정만록'에는 경상 감사 김수가 5월 16일 경상도 함양을 출발하여 18일 전주에 도착하여 이광의 군대와 합류하고 19일 전주를 출발한다. 5월 24일 충청도 온양에서 3도의 병력이 합류하여 6월 3일 수원 독성산성(현재의 오산)에 도착하고 6월 4일 수원 북산 근처에서 소규모 접전을 벌인뒤, 6월 5~6일에 용인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후미포(구미포, 후미개, 후미개 고개)에 주둔한 일본군은 조총이 없고 활과 칼로 무장한 병력으로 잔인하고 포악하여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 죽여 '백정왜'로 불리고 있었다. 이 전투는 향병과 정규군(관군)이 혼합된 전투 부대였다. 원호는 관군으로 하여금 진지를 포위하게 한 다음 새벽에 기습을 단행했다. 진지 막사에서 나오는 일본군을 관군들이 사살하였다. 이 전투에서 '50여급'의 전과를 올렸다.
이 시기 여주 목사는 조수흥, 음죽 현감은 황선이었는데, 둘 모두 노쇠하였다. 후미포 전투를 보고 받은 정부에서는 여주 목사에 원호, 음죽현감에 훈련원 봉사(교관) 원색을 임명하였다. 또한 원호에게는 여주와 원주 일대의 군령권을 가지는 경기·강원 조방장의 직책이 부여되었다.
정규군(관군)이 합류했다는 것은 직속 상관의 명령이 있어야 가능하다. 선조실록의 기록대로 관군이 참전했다면, 이것은 강원감사 유영길의 명령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유영길이 원호를 호출한 이유는 관군 배속 문제와 기타 군사 문제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 전투가 끝나고 감사 유영길은 다시 원호를 호출하였다.
▼ 갈동 전투
경기 지역에서는 6월 5~6일 용인전투에서 삼도의 근왕군 5만명(전투군과 보급군 포함)이 와키자까 야쓰하루에게 대패한다. 황해도로 진격한 제1군, 제2군, 제3군은 임진강을 건넌 뒤 평산에서 제1군, 제3군은 평안도로, 제2군은 함경도로 진격한다. 6월 8일 일본군이 대동강에 도착하자 6월 9일 조선 정부는 다시 영변을 향해 피난길에 오른다. 6월 13일 평양성이 함락되고 있는 사이 제2군 가등청정은 철령을 넘었다(6월 12일).
후미포 전투로 원호는 여주목사겸 경기·강원 방어사를 임명받는다. 경기북부 및 강원북부, 그리고 함경도의 전선 확장 방지, 보급로 차단, 왕실 보호 등 전략적 판단 하에 강원감사 유영길은 원호로 하여금 춘천과 김화로 진격하도록 명령한 것 같다.
징비록에는 원호 조방장이 춘천에서 전사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원호장군 비문에는 김화에서 전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원주에서 김화로 가기 위해서는 춘천(부)를 경유해야 한다(현재의 5번 국도). 이 시기 춘천(부)까지 일본군이 점령하였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춘천 지역에서도 전투가 벌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춘천 동산면과 동내면 경계에 위치한 진병산(653m, 금병산, 정병산, 현 김유정역 뒷산, 춘천 IC)에는 원호 장군이 김화 지역으로 진격하기 전에 진을 쳤다고 전해 내려온다. 봉의산의 봉의산성(강원도청 뒷산) 역시 원호 장군의 활동무대였다고 한다.
원호 조방장은 강원 감사 유영길의 명령을 받고 김화로 진격하는 도중에 춘천에서 진을 친 다음 김화로 진격한 것이다. 이 시기에 김화에는 7년 전쟁 동안 가장 많은 문화약탈과 만행을 자행한 제4군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조카인 23세의 시마즈 다다도요(島津忠豊)가 휘하 500여 병력으로 주둔하고 있었다.
6월 19일 새벽, 원호 부대는 500여 병력으로 김화에 당도하였지만 사전에 원호 부대의 이동 정보와 정황을 탐지하고 남대천변 갈동에 매복하고 있던 시마즈 군대에게 허를 찔려 급습을 받는다. 적의 포위망에 맞서 전열을 정비하려 했지만 조총을 앞세운 우수한 화력으로 조직적으로 좁혀오는 시마즈 부대의 공격 앞에 궤멸되고 말았다. 한낮까지 군사들을 독려하며 맞섰지만 원호 역시 20여개의 화살이 몸에 박힌 채 500의 군졸과 함께 61세의 나이로 전사하고 말았다.
적군은 원호의 머리를 잘라 김화 성문城門에 매어달고 '조선 군사와 백성이 모두 귀순했는데 원호만이 우리에게 항거하였기로 이같이 벌을 내린다'라는 글귀를 써붙여 놓았다.
원호가 순국한 후 병조판서와 좌의정을 추증하였으며, 1653년에 '충장'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1656년(효종 7년)에 순국한 장소에 그의 시호를 따 충장사忠壯祠를 세웠다. 또한 1668년(헌종 9년) 원주 충렬사에 제향되었다. 그 이후 일제시대 때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으로 인해 충장사가 헐려 버렸다.
■참조
조선왕조실록
약포문집
징비록
정만록
기타 문헌
DCN 국방시민연대 전쟁사위원회 위원장 권순삼 kwonsanha@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