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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Jan
전쟁과 시장[49] - 장사꾼 히데요시와 정치꾼 선조
작성자:
한국의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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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시장[49] - 장사꾼 히데요시와 정치꾼 선조
-전쟁의 개념을 바꾼 히데요시, 칼과 창이 지배하던 일본 전쟁을 시장장악전, 토목공사로 바꿔놓았다
-전쟁에 관한 한 히데요시는 능력자였다. 왜에 맞선 의병장을 제거하고 이순신을 파직한 선조와 비교되는 이유다
"이제 칼 잘 쓰고 창을 잘 휘두르는 놈들만 가지고 전쟁을 할 수 없어! 그놈들은 아무생각 없이 연장질만 하려고 드니까. 싸우지 않아도 될 싸움을 하게 되지. 이제는 머리를 쓰는 놈이 필요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 아래에서 영주가 된 이후에 자주하던 말이다. 그는 칼과 창을 잘 사용하지 못했다. 그걸 배워야 할 어린 나이에 계부의 눈칫밥을 먹고 살았고, 집을 나와 시장에서 바늘장사를 했다. 그 시절 일본은 세계적인 은(銀) 광산들이 터졌고, 넘치는 은은 전쟁터를 뚫고 다니는 장사꾼들을 낳았다. 어떠한 위험한 지역이라도 이익이 되는 곳은 찾아 갔다.
장사꾼에서 군인으로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가 개설한 자유시장(樂市樂座)에 자주 갔다. 기존의 자리 세는 없었다. 노부나가에게 일정 세금만 내면 무엇이든 팔수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는 히데요시는 시장을 지배하는 노부나가가 천하를 통일할 인물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히데요시가 16세에 오와리(尾張國)의 다이묘 '오다 노부나가'의 당번병이 되었던 것에는 자신의 의지도 있었다. 그는 미노국(美農國)공격에 유항(誘
降)전략(적의 포섭) 구사에 재능을 보였다. 히데요시가 미노국의 이나바(稻葉)산성을 급습했던 때는 그 영주인 도산도 수습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난공불락이라 불리던 명성(名城)이 순식간에 함락되었다.
앞서 노부나가는 미노국의 배후인 오오미(近江)의 아사이 나가마사(淺井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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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성의 천수각
영국인으로서 최초로 일본에서 생활했던 애덤스는 전국시대 일본을 이렇게 묘사했다. "여기 세상의 끝 동쪽에, 매혹적이지만 우울한 나라가 있다. 일본의 영주들과 그들이 거느린 군대들은 유럽에서 상상도 하지 못할 규모의 전쟁을 벌였다. 수많은 무사들이 전장에 참가했고, 패배한 병사들은 굴욕적인 항복보다는 할복자살을 택했다."
히데요시가 1581년 우리나라의 동해안을 마주보고 있는 돗토리성(鳥取城)을 공략하려고 했을 때였다. 그는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자기 부하들의 엄청난 희생이 따를 것을 직감했다. "내 부하들을 거의 희생시키지 않고 승리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식량 매점매석으로 함락시킨 돗토리성
작전에 앞서 수개월 전에 상인들을 불러 공작을 시작했다. "자네들 말이지 돗토리 주변 지역의 곡물을 비싸게 사들이게. 돈은 내가 얼마든지 줌세." "예, 나리" "시가의 몇 배에 달하는 비싼 값에 곡물을 매입하면 사람들이 팔지 않을 수 없을 것이야." 히데요시의 예측은 적중했다. 사람들은 얼씨구나하고 곡물을 팔았다. 나중에 가서 곡물가격을 더 올렸다. 그러자 돗토리 성 안에 있는 비축 병량이 히데요시가 고용한 상인의 손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小和田哲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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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히데요시는 병력을 이끌고 돗토리로 향했다. 진군을 하면서 의도적으로 농민들에게 가혹행위를 해서 공포를 심어주었다. 농민들은 겁을 먹고 돗토리 성으로 몰려갔다. 히데요시는 그걸 보면서 즐거워 했다. "주변의 농민들을 한 명이라도 더 성안으로 밀어 넣어라! 그들이 돗토리성의 병량을 더 빠르게 축낼 자들이다." 성안의 인구는 4000명이 넘게 되었다.
히데요시는 돗토리성 주변에 작은 성과 진지를 구축했다. 그리고 자신의 병사들에게 탄약과 철포, 군량미를 보급하였다. 성을 완전히 포위했다. 부하들에게 성벽을 오르게 하지도 않았고, 적과 직접 단병접전을 벌이게 하지도 않았다. 그의 목적은 성으로 어떠한 보급품이 못 들어가게 하는 것이었다. 장기전으로 가서 성안에 있는 사람들을 굶겨죽일 작정이었다.
포위된 100일 동안 성내부에는 처참한 광경이 벌어졌다. 먹지 못한 군마와 소가 먼저 죽었고, 사람들이 그것을 먹었다. 이제 사람이 굶어죽기 시작했다. 사람이 사람을 먹는 광경이 펼쳐졌다. 많은 사람이 아사했고,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 중에는 영양실조로 장님이 된 사람도 많았다.
전쟁은 토목공사
이렇게 히데요시는 막대한 전비를 쏟아 부었지만 그것은 수백 배 남는 장사였다. 돗토리성은 당시 모리(毛利) 씨 수중에 있는 시마네현의 이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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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광산(石見銀山)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었다.모리 씨는 돗토리의 함락을 막기 위해 해상과 육로로 거듭 보급을 시도했지만 히데요시의 치밀한 방어망에 걸려 모두 실패했다.
이듬해 히데요시는 모리 씨의 명장 시미즈(淸水)가 지키고 있는 비쥬(備中)의 다카마쓰성(高松城) 공략에 들어갔다. 성안에는 5000의 병력이 농성을 하고 있었고, 히데요시의 병력 3만이었다. 6배의 인력을 가지고 있던 히데요시는 거대한 토목공사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 시기는 장마기였다.
누구도 상상치도 못한 대토목공사가 벌어졌다. 철야작업을 하여 높이 10.8m 폭 36m의 제방 12㎞를 쌓았다(1582년 5월 8일). 제방을 쌓기 위해 구축한 작은 성이 15개소, 동원 인원은 10여만 명이었다. 히데요시는 토표(土表) 1표에 약 전(錢) 100문, 쌀 1승(升)이란 고액의 보수를 주었다. 총경비는 전(錢) 63만 5040관문, 쌀 6만 3504석이었다.
둑이 완성되고 아시모리강의 물길이 바뀌었다. 3면이 늪으로 둘러싸여 있는 다카마쓰성은 주변이 물바다가 되고 고립되었다. 모리 씨가 성을 구하기 위해 왔지만 물에 갇힌 그 요새에 접근도 할 수 없었다. 히데요시는 전쟁의 개념을 전투에서 시장 장악과 토목공사로 바꾸어 놓았다.
1592년 냉혹하고 능률적인 그의 군대가 조선에 나타났다.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조선의 수도 서울을 점령했으며, 얼마 후 평양을 점령하고 함경도까지 치고 올라갔다. 선봉장인 코시니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의 눈부신 활략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 보다 더 많은 공을 세운 자가 있었다.
능력위주가 아닌 게 운명이라
조선의 왕 선조는 임진왜란 기간에 히데요시가 최고의 훈장을 주어야 할 인물이었다. 그는 조선을 위해 일본군과 싸운 의병장 김덕령을 죽였고, 곽재우를 초야에 매장했다. 최대의 이적행위는 이순신의 파직이다. 그 결과 무적의 조선 수군은 일본군의 총공격을 받아 한산의 패전을 당했다. 전투에서 1만 명이 넘는 수병과 140척 이상의 판옥선을 상실한 조선수군은 사실상 궤멸상태였다.
뿐만 아니다. 우세한 전력의 일본군에 맞서 조국을 위해 분연히 무기를 들고 일어나 목숨을 바친 조선군과 의병들의 전공을 전부 명(明)군의 것으로 돌려버린 것도 선조였다. 부하 장수들과 의병장들이 능력을 발휘할수록 선조 자신은 낮아졌다. 그들은 생각했다.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무능한 왕은 적군 10만과 같은 위력이 있다!"
하지만 운명은 능력위주가 아니었다. 선조는 전쟁이 끝난 후 손녀와 같은 여자에게 새장가를 들어 아들을 두었고, 행복한 말년을 보냈다.
너무나 유능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쟁이 끝나기 전에 어린 아들에 대한 한없는 걱정 속에서 세상을 하직했다. "인생은 꿈 속에 꿈"이라는 말을 남겼다. 자신의 사후에 염려했던 일들은 모두 현실로 나타났다. 그의 아들에게 충성을 바치던 영주들과 군사들이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전멸당했고, 그로부터 15년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사카성을 공격하여 히데요시의 아들(히데요리)과 애첩 요도기미를 자살하게 만들었다(1615년). 그러나 선조와 그의 자손들은 그 후 320년 동안 조선을 더 지배했다.
▶선조(宣祖·1552~1608) = 중종의 아들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셋째 아들이다. 그는 하성군(河城君)에 봉해졌다가 1567년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사림들의 중앙정계 진출의 문을 열었다. 이황(李滉) 이이(李珥) 등 많은 인재들이 등용되기도 했다. 사림의 중앙 정계 진출과 함께 당(黨)이 만들어지게 되었고, 김효원(金孝元)과 심의겸(沈義謙)의 갈등이 기폭제가 되어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분당됨에 따라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 데 많은 혼선을 가져왔다.
1590년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온 통신사 황윤길(黃允吉)과 부사 김성일(金誠一)의 서로 다른 동향보고에 의해 정책을 수립하지 못하고 있다가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그는 일본의 침략에 의해 도성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난하였으며, 도중에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여 분조(分朝)하고,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여 원군이 파견되었다.
▶요도기미(淀君·1569~1615)=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유일한 아들 히데요리를 낳았다(1593). 아버지는 오우미(近江) 오타니(小谷)의 성주 아사이 나가마사이다. 7살께 오타니 성은 함락되어 버렸다(1573년). 공격의 주체는 엄마의 오빠 오다 노부나가였다. 그녀는 엄마인 오이치, 동생들과 함께 노부나가의 진영에 넘겨진다. 차차 일행은 그 후 외삼촌인 노부나가의 성에서 지내게 되는데, 약 10년 후 노부나가가 교토의 혼노지에서 살해됐다(1582년). 오이치는 요도기미 자매를 이끌고 노보나가의 유력 부하였던, 에치젠 기타소의 성주 시바타 가츠이에와 재혼했다. 하지만 직후 가츠이에는 히데요시의 공격을 받고 어머니 오이치와 자살한다(1583). 요도기미 자매 3명 만이 히데요시에게 건네졌다. 우여곡절 끝에 오차차는 히데요시의 첩이 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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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N 국방시민연대 전쟁사위원회 연구위원 서영교(충남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