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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44

07

2010-Jan

전쟁과 시장[43] - 中제국과 日제국의 전쟁터

작성자: [레벨:16]한국의 산하 IP ADRESS: *.39.120.17 조회 수: 5166

전쟁과 시장[43] -  中제국과 日제국의 전쟁터

-中·日 헤게모니 싸움에 갈가리 찢긴 '샌드위치 한반도', 중국과 일본은 한반도에서 두번 싸웠다.

-임진왜란에선 일본이 청일전쟁에선 중국이 패했다.

-두 차례의 전쟁에서한반도는 초토화됐다. 전운은 또다시 감돌고 있다

 

명나라는 모든 세금을 은으로 받았다. 농민들은 곡물을 주고 은을 사서 국가에 납입해야 했다. 상업도 은을 매개로 발달했다. 명나라는 세계 최대의 본위제 사회였다. 북방에 몽골족의 침공을 막기 위해 엄청난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었고, 병사들에게 봉급으로 은이 지급되었다. 북방의 긴장이 고조되면 더 많은 은이 북방으로 흘러갔고, 명나라 국내에는 은 품귀현상이 재현되었다.

은의 수요가 상승하면 위험을 무릅쓰고 밀무역에 나서는 모험자들의 이익도 증가한다. 이리하여 북방 변경에도 동남 연안에서도 폭력적인 항쟁과 상업적 이익을 표리로 한 활발한 시장이 확장된다. 중국인이나 북방의 몽골족 남방의 왜구 등 민족을 불문하고 이익에 끌린 사람들이 거기에 흘러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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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에서 처음으로 왜구와 조선군이 맞부딪친 동래읍성 전투를 묘사한 그림.

 

명나라, 은(銀)의 블랙홀

 

약탈행위는 일본인들만의 행위가 아니었다. 중국연안의 사람들로 왜구를 가장한 자들이 전체의 7~8할을 차지하였다. 배후에는 중국의 상인·자본가·토호·지주들이 있었다. 심지어 포르투갈인들도 관계되어 있었다. 명나라 조정이 사적인 해외무역을 금지하는 한 이러한 행위는 근절되지 않았다. 1567년 드디어 명 조정은 해상활동을 제한하는 해금(海禁)정책을 폐기했다.

 

이후 중국으로 흘러들어가는 은의 양은 급속히 증대됐다. 1557년부터 마카오 거주가 허락된 포르투갈인들이, 1571년 이후 스페인은 필리핀에 마닐라를 건설하고 태평양을 통해 다량의 멕시코 은을 가지고 왔다. 일본산 은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합친 것 보다 많았다. 16세기 후반 중국으로 유입된 은의 양은 총 2300t이 되고 그 중에서 히데요시의 은광에서 생산된 일본의 은이 1300t이었다(17세기 5000t이 중국에 유입, 그중 일본에서 수출된 것이 2400t-'미야지마 히로시'). 명나라는 세계의 은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었고, 일본은 당시 세계 최대의 은 생산국이자 수출국이었다.

 

불공정무역 타개책, 임진왜란

 

로마 교황청에 들어가는 보고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본을 통일한 왜구들의 왕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 조정의 해금 조치에 만족하지 않았다. "이보게 미쓰나리(三成). 경제무역의 발달과 해적행위가 명나라 조정의 정책을 바꾸게 했다. 이로써 중국인들은 해외에 나아갈 수 있게 됐고 사적인 무역이 허용됐지만 그것은 중국인들만의 잔치야!" "예, 전하. 명나라 조정은 조공무역 체계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해금폐기로 자유로워진 것은 중국인들뿐입니다. 우리 일본은 중국의 조공정책의 끈에 결박되어 있었습니다." "맞아! 내가 일본을 통일한 이 마당에 결단을 내려야겠어." "예! 그렇다면 명나라조정의 조공체제를 무력으로라도 철회시키겠다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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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먹잇감으로 노리고 있는 청·일 두 강대국의 야욕을 빗댄 당시 삽화.

 

1592년 히데요시는 명나라를 치기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조선을 침공했다. 임진왜란은 명나라의 불공정무역에 대한 일본의 극단적인 대응의 한 형태였다.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1달이 되지 않아 서울을 점령했고, 조선의 국왕 선조는 그해 명나라가 압록강 넘어 보이는 의주까지 도망을 갔다. 수도 북경이 가까운 평양까지 일본군이 밀려오자 명나라는 조선에 파병했다. 일본군과 평양 싸움에서 명나라군대는 참패를 당했다. 전열을 가다듬은 명나라군대가 다시 반격을 했고, 일본군대는 서울까지 상실하고 남쪽 해안으로 내려갔다. 이순신장군이 해상보급로를 단절했기 때문이다. 프로이스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조선의 배는 크고 튼튼했다. 일본수군에 대해 우위를 차지했다. 조선수군은 아주 발달된 대포로 일본군을 제압했다. 어떤 일본군 장수는 사로잡히기 전에 할복했다. 해전에서 일본군은 항상 최악의 상태가 되었다."

 

병든 돼지의 식욕

 

명나라에 대한 조공무역을 부정하고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8년에 사망했다. 일본군은 조선에서 철수했고, 이로써 중국에 대한 불공정무역을 타개해 보려던 일본의 시도는 유산되었다. 300년이 흐른 후 일본은 다시 조선에서 중국군대와 전쟁을 치른다. 1882년 청나라가 조선의 핵심을 장악했다. 조선의 실권자 대원군을 납치하고 민비정권을 압박하여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였다. 그것은 청나라가 조선을 속국으로 만든 조약이었다. 조선 국왕은 청의 북양대신과 대등하며, 청나라 상인이 조선 내지에서 자유롭게 상행위를 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청나라는 자존심이 많이 상해 있었다. 1840년과 1856년 영국과 아편전쟁에서 참패하여 굴욕적인 조약을 맺고, 거금의 배상금까지 지불했다. 영국은 프랑스와 손잡고 1860년 청나라를 압박하여 거대한 이권을 따냈으며, 러시아와 미국이 그 뒤를 이었다. 중국이란 힘없고 비대한 돼지는 날렵한 서구열강 독수리들에게 찢겨 먹히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만만한 조선에게 그들이 당했던 짓을 그대로 했다.

 

일본의 불황과 청일전쟁

 

일본 육군의 수장(陸軍卿)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는 청나라의 조선시장 장악을 우려했다. "만약 한반도가 다른 강대국의 지배를 받게 되면, 일본'머리 위의 칼'을 뒤집어쓰는 것이야! 대륙으로부터 일본을 향해 쑥 튀어나온 건널목과 같은 한반도를 우리가 차지하지 않는다면 일본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어. 무엇보다 우리 일본산 경공업 제품이 조선 시장에 크게 진출한 상태인데 청나라 놈들이 조선시장을 독식하려고 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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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 명나라에 대한 조공 무역을 거부하고 명나라를 치기위해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일본은 1890년부터 경제공황 상태였다. 값싼 노동력의 국내시장 발전제약과 섬유공업·군수공업 등에 대한 수년간의 투자확장이 공황의 원인이었다. 1889년의 흉작으로 인한 쌀 생산의 감소도 공황을 더욱 촉진시켰다. 결국 1890년 일본경제는 심한 수입초과를 나타냈으며 일본은 무역불균형을 타개해야 했다. 의회에서 일본 지배층 내부의 대립은 격화되었고, 농민·노동자들의 경제상태가 악화되어 불만이 증대했다. 청나라와의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

 

1894년 일본은 서울과 부산간 전선(電線)을 가설하여 통신망을 확보했고, 병력을 동원하여 서울의 왕궁과 4대문을 장악하고, 조선과 청나라의 통상무역장정을 폐기했다. 그리고 아산만에 주둔중인 청군을 공격하고, 그 앞바다의 풍도(豊島)에서는 청함정을 습격하여 1200여 명을 익사시켰다. 성환(成歡)에서도 평양에서도 압록강 어귀에서도 청군이 패했다. 이어 일본은 요동과 산동의 여순 위해를 점령하고 유공도(劉公島)에서 청의 북양함대(北洋艦隊)를 최종적으로 전멸시켰다. 나아가 북경을 위협하여 청국 전체를 정복할 기세였다. 당시 어느 기자의 표현대로 중국은 잠자는 '거인'이 아니라 '돼지'였다.

 

강대국의 길

 

1895년 4월 시모노세키조약이 체결됐다. 일본은 승전 대가로 3억 6400만 엔(청나라 1년 예산의 2.5배)의 배상금과 중국의 영토인 타이완, 펑후섬을 할양받았다. 돈은 일본군의 군비증강 비용으로 사용되었다. 300년 전 조선에서 물러났지만 서구화에 성공한 일본은 더욱 강해졌고, 중국의 조공체제를 폐기하고 조선을 사실상 장악했다. 300년 전 히데요시의 꿈이 실현되었다.

 

1592년과 1894년 중국과 일본은 한반도에서 전쟁을 했다. 각각 1승 1패였다. 1592년 조선은 중국에 편에 섰고, 일본군을 몰아내고 조공국으로서 만족을 했다. 그것은 조선의 발전에 치명적이었다. 1894년 조선은 자신의 의사를 결정하지 못할 만큼 약해졌고, 일본제국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북한이 현저히 약해진 지금 역사는 되풀이될 수도 있다. 압록강에 주둔한 중국군대가 여차하면 강을 건너 올 태세다. 북한에서 망명한 황장엽은 김정일 사후 북한은 중국의 영향하에 들어갈 것이라 점을 쳤다. 일본과 그 배후의 미국은 그것을 우려하고 있다.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과거처럼 양자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것인가. 제3의 길은 없는가. 과거를 되풀이 하지 않으려면 4강이 아니라 5강체제로 가야한다.

 

▶아마가타 아리토모

(山縣有朋·1838~1922)

조슈번의 비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요시다 쇼인의 정보수집꾼으로 교토 정세를 살피면서 존양파(尊攘派) 인물들과 안면을 넓혔다. 1863년 다카스기 신사쿠가 조직한 기병대에 입대해 군감(軍監·제2인자)이 되어 1866년의 사경(四境)전쟁의 소창구(小倉口)전투에서 싸웠고, 막부군을 추토하는 무진(戊辰)전쟁에서 공을 세웠다. 1868년에 유럽 각국을 시찰하고, 귀국 후 국방차관(兵部大輔)이 되어 군제개혁에 착수했다. 1873년에는 초대 육군경(陸軍卿)에 취임해 징병령을 실시했다. 서남전쟁(1876년) 때 징병령에 의해 육성된 군대가 사이고 다카모리의 사무라이군을 격파했다. 그 후 그는 어떤 직책을 맡든 현역 원수와 조슈군벌의 수장으로서 일본 육군을 지배했다.

 

 

 

DCN 국방시민연대 전쟁사위원회 연구위원 서영교(충남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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