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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Dec
국가 경영의 실패, 선조와 고종의 비참함, 덕수궁(경운궁)
작성자:
한국의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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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경영의 실패, 선조와 고종의 비참함, 덕수궁(경운궁)
-1592년, 국방을 등한시 한 결과, 선조는 월산대군 후손의 집을 임시 행궁으로 삼았다!
-1907년, 개방을 등한시 한 결과, 고종은 순종에게 제위를 물려주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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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성곽(도성)과 궁궐 안내도
명 칭
창 건
중 건
비 고
경복궁
1395.9.29(태조 4년)
1867.11.16(고종 4)
창덕궁
1405(태종 5년)
1610년(광해 2년)
창경궁
1418. 11. 3(세종 즉위년)
1616년(광해 8년)
덕수궁
1593년(선조 26년)
1611년(광해 3년)
경희궁
1616년(광해 9년) 1831년(순조 31년) 광해, 인조, 제17대 효종~제25대 철종 운현궁
1863년(고종 즉위년) 1996년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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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선조 25년) 4월 일본군의 조선 침략은 200년 조선 역사의 흔적을 깡그리 없애 버리고 말았다. 조선의 국왕이 거처하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도 화마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선조는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빠져 나와 도성의 서문인 돈의문을 거쳐 북쪽인 파주로 피난을 갔다.
7년 전쟁(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나자 선조는 10년 동안 전후 복구에 시달려야 했고, 1608년 선조가 승하하자 광해군은 궁궐 창건과 중건에 매진해야 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가 폐위될 때까지 전후 25년간 조선의 경제는 파탄 직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는 발전 속도는 그 당시 유럽, 기타 지역과 마찬가지로 아주 더디게 이루어졌다. 현재의 25년은 아주 빠르게 흘러가는 듯 느껴지지만, 조선시대는 그렇지 못했다.
1608년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세자가 조선의 임금이 되었을 때, 정치가와 관료들은 한치 물러설 수 없는 피비린내나는 권력 투쟁을 하고 있었다. 이이첨, 정인홍 등이 주도하여 7년 전쟁을 극복하는데 공헌을 했던 공신들을 하나 둘씩 제거하기 시작했다. 이 공신들의 지인과 제자들이 후에 인조반정을 일으키는 주역으로 등장한다.
◈ 덕수궁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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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덕수궁 홈페이지
전 각
용 도
비 고
전각 참고
중화전
국가행사 및 왕이 신하로부터 하례를 받던 곳
1902년 건축
덕수궁 전각 석어당
선조의 임시 거처 및 주재한 건물
덕수궁 내의 유일한 2층 건물
덕홍전
고종황제의 내외빈 접객한 건물
함녕전
고종황제의 침전, 승하한 건물
정관헌
고종황제의 연회 장소 즉조당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의 침전, 즉위식 건물 준명당
고종황제 한때 거처로 사용, 내외빈 접객 공간 석조전
고종황제의 집무실 및 접객실 조선 최초의 서양식 건물
◈ 덕수궁德壽宮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선조가 의주까지 피난갔다 서울로 돌아와 보니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불타 없어졌다. 선조가 거처할 왕궁이 없어서 왕족의 집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완전했던 월산대군 후손의 집을 행궁으로 삼았다. 월산대군月山大君(1454년~1488년)은 조선의 왕족으로, 1455년 세자로 책봉되지만 2년 후인 1457년 20세의 나이로 요절한 덕종(후에 추존된 왕)의 맏아들이자 덕종의 뒤를 이어 조선 제9대 왕이 되는 성종의 친형이다.
1608년 2월에 선조는 행궁의 침전에서 돌아가시고 광해군이 행궁의 서청에서 왕위에 즉위하였다. 1611년(광해 3년)에 행궁을 경운궁이라 하였다. 경운궁의 정문은 원래 정남쪽의 인화문이었으나, 다시 지으면서 동쪽에 있던 대안문을 수리하고 이름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쳐 정문으로 삼았다.
석조전은 1900년에 착공하여 1910년에 완공되었다. 정문인 인화문仁化門, 돈례문敦禮門, 회극문會極門, 영성문永成門 등의 전문殿門이 완성되었다. 1907년 7월 20일에 일본침략자들의 강압에 의하여 고종이 순종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고종이 거처하는 궁이 되어 덕수궁이라 하였다. 현재 사적 제124호로 지정되어 있다.
▼ 프레스센터에서 바라본 덕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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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문과 수문장 교대식
궁궐을 수비하는 수문장 교대식이다. 대한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안내소가 있고, 바로 앞에 하마비下馬碑 가 있다. 하마비가 있는 곳에서는 신분의 고하高下를 막론하고 누구나 타고 가던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다.
하마비는 최초 1413년(태종 13)에 종묘宗廟와 궐문闕門 앞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표목標木을 세워놓았는데, 이것이 후일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 또는 하마비下馬碑’라고 새긴 비석을 세우게 된 계기였다고 한다.
대개 왕과 장군, 성현, 또는 명사·고관의 출생지나 분묘 앞에 세워져 있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그들이 선열先烈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타고 가던 말에서 내렸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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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홍전德弘殿과 함녕전咸寧殿
덕홍전과 함녕전의 앞뜰이다. 들어가는 문이 하나밖에 없는데, 함녕전 들어가는 정문인 광명문은 자격루 등을 전시할 목적으로 서쪽으로 이전하였다. 정면에 2층 건물이 보이는데, 석어당이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선조가 의주로 피난을 갔다고 다음 해인 1593년 돌아와 보니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불에 타 없어졌다. 현재의 덕수궁 자리는 조선시대 때 궁궐의 자리로 적합하지가 않았던 모양이다. 석어당이 있던 자리는 월산대군 후손의 집이었는데, 선조가 임시 거처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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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문이다. 함녕전의 정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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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전각 중에서 처마만 보이는 것이 함녕전이며, 전체 모습의 전각은 덕홍전이다. 담 너머 2층 전각이 석어당昔御堂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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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홍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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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녕전이다. 함녕전 앞에서 뒤의 굴뚝 모습과 뒤에서 앞의 정문을 바라본 전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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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녕전에서 정관헌으로 가는 도중에 함녕전 담과 석어당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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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관헌靜觀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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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즉조당卽祚堂과 준명당浚明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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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화문과 중화전中和殿(보물 제8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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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천사종, 화차, 자격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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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화차火車
화차火車는 말 그대로 수레車에서 불火을 뿜게 만든 무기다. 현대의 차에 해당되는 수레 위에 화약이 장착된 화살을 여러 개 장치하여 멀리 날아가게 하는 무기다. 현대의 다연장 로켓포와 원리가 같다. 로켓 중 유명한 것이 패트리어트 미사일이다.
화차에는 화살이 있어야 한다. 화살은 여러 가지 용도에 맞게 만들었는데, <태종실록太宗實錄>에는 '철령전鐵翎箭'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 무기는 1409년(태종 9년) 1월 군기소감軍器少監 이도李韜와 군기감승軍器監丞 최해산崔海山 등에 의하여 제작 ·시험되어 성공을 거두었다. <태종실록>에 이 화차는 ‘철령전' 수십 개를 장착하여 규모가 작은 소차小車에 싣고 달리면서 화약을 사용하여 발사하는 일종의 장갑차라고 전하고 있다.
화차는 태종 때 실전實戰 사용되지 않았으며, 제4대 세종을 이어 등극한 제5대 문종文宗에 의하여 발명된 화차를 임진왜란 중인 1592년(선조 25년) 변이중邊以中이 개량하여 실전에서 활용하였다. 변이중은 임진왜란 발발 시점에 고향인 전라도 장성에 있었다. 공식기록에 의하면 전라도, 경상도 의병장 가운데 전라도 옥과가 고향인 유팽로가 가장 먼저 기병을 했다. 유팽로는 한성에서 일본 침략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내려가 순창에서 4월 20일 기병했다. 4월 20일은 김해성이 함락당하고, 대구가 침략당했으며, 경주가 침입을 당한 날짜다. 망우당 곽재우의 기병은 4월 22일이다. 유팽로는 옥과에서 화순, 광주, 장성, 담양 등지를 돌며 의병을 모집했다. 장성에 들러 변이중을 만났다.
1451년(문종 1년) 2월 문종의 창안에 의하여 임영대군臨瀛大君이 만든 화차를 시험하였는데, 그것은 차 위에 횡목(시렁)을 만들어 그 안에 중신기전中神機箭 100개 또는 사전총통四箭銃筒 50개를 설치하고 심지에 불을 질러 차례로 발사하게 한 것으로 평탄한 곳에서는 2명이 쉽게 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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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흥천사종興天寺鍾(보물 제1460호)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1396) 강씨의 무덤은 정릉貞陵이다. 정릉은 원래 도성 안 현재의 정동에 있었으나 1405년(태종 5년)에 현재의 자리(성북구 정능동 산 87-16, 4호선 성신여대입구역에서 서북 방향 1km 지점)로 이전하였다. 이는 태조 이성계가 여덟 번째 왕자 방석을 세자로 정한 것에 대한 태종(방원)의 사적인 감정과 정치적 보복이 가미된 것이었다. 태종은 무덤을 옮긴 후 정릉의 정자각을 없애고, 십이지신상 등 석물로 홍수에 의해 없어진 광통교를 다시 짓는데 사용하였다. 무덤을 이전한 후 수백년간 정릉은 왕후의 무덤이라기 보다는 주인없는 무덤에 불과하였는데, 1669년(현종 10년)에 송시열의 상소에 의해 왕후의 무덤이 제대로 갖추어지게 되었다.
흥천사는 1396년(태조 5년) 태조 이성계가 두 번째 부인인 계비 신덕왕후 강씨가 죽자 능지를 만들고, 왕비의 명복을 빌기 위해 1396년 창건하기 시작하여 1397년에 170여 칸이나 되는 대사찰이 완성되었다. 흥천사 종은 이곳 흥천사에 1462년(세조 8년)에 만들어 내걸은 종으로서 1510년(중종 5년) 흥천사가 화재로 소실되었다. 1747년(영조 23년)에 경복궁 광화문으로 옮겨지고, 다시 창경궁으로 이전되었으며, 이곳에서 다시 덕수궁 광명문으로 옮겨졌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흥천사 종은 고려말부터 수용되기 시작한 중국 종의 형식에 한국 전통 종에서 보였던 형식과 요소가 가미되어 새로운 조선전기의 종으로 정착되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 범종이라 한다. 또한 이후 만들어지는 조선전기 범종의 하나의 기준이 되는 작품이 되었으며, 다른 조선전기 범종의 발전과정을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평가하고 있다.
흥천사 종은 크기나 문양·주조기술의 탁월함 외에도 왕실에서 직접 주문 제작한 종이어서 각 분야의 관장官匠들이 대거 참여해 만들어졌으며, 종에 새겨진 명문銘文은 제작 당시 조직체계를 알려 주고 있다는 점 등에서 당시의 사회제반사항을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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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자격루自擊漏(국보 제229호)
이곳 광명문에 전시된 자격루는 원본이 아니라 전시하기 위해 만든 전시물이다. 자격루는 물이 떨어지는 원리를 이용하여 만든 시계, 즉 물시계이다. 다시 말해 자격루는 자기 스스로自 쳐서擊 눈물, 즉 물이 떨어지게漏 하는 원리로 만든 시계이다.
물시계는 물의 증가 혹은 감소량에 의해 시간을 측정하도록 만든 장치로서, 삼국시대부터 나라의 표준시계로 사용하였다. 최초 1434년(세종 16년) 장영실에 의해 제작되었으나 오래 사용되지는 못했다. 현재 남아있는 자격루의 일부는 1536년(중종 31년)에 다시 제작한 자격루다. 현재 중국 광동에 남아있는 명나라의 물시계보다 조금 늦게 만든 것이지만, 그 규모가 크고 훌륭하여 매우 귀중한 유물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자격루는 쇠 구슬이 굴러 조화를 이루던 부분이 없어진 채, 물통 부분만 남아있다. 청동으로 된 큰 물그릇은 지름 93.5㎝, 높이 70.0㎝이며, 도기로 된 작은 물그릇은 지름 46.0㎝, 높이 40.5㎝이다. 작은 물그릇이 놓였던 돌 받침대는 지금 창경궁 명전전 뒤에 2개가 남아있다.
자격루는 맨 위에 있는 큰 물그릇에 넉넉히 물을 부어주면 그 물이 아래의 작은 그릇을 거쳐, 제일 아래쪽 길고 높은 물받이 통에 흘러든다. 물받이 통에 물이 고이면 그 위에 떠 있는 잣대가 점점 올라가 미리 정해진 눈금에 닿으며, 그곳에 장치해 놓은 지렛대 장치를 건드려 그 끝의 쇠 구슬을 구멍 속에 굴려 넣어준다. 이 쇠 구슬은 다른 쇠 구슬을 굴려주고 그것들이 차례로 미리 꾸며놓은 여러 공이를 건드려 종과 징·북을 울리기도 하고, 또는 나무로 만든 인형이 나타나 시각을 알려주는 팻말을 들어 보이기도 한다.(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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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덕수궁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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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N 국방시민연대 전쟁사위원회 위원장 권순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