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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112

26

2009-Dec

치욕의 역사, 남한산성

작성자: [레벨:16]한국의 산하 IP ADRESS: *.39.120.17 조회 수: 9503

치욕의 역사, 남한산성

 

-물어 뜯고 싸우는 사이, 주변국은 이미 강대국이 되어 있었다.

-무릎을 꿇고 땅에 이마를 찧으며 나라를 생각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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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조와 남한산성

 

남한산성은 보통 인조(조선시대)의 굴욕을 떠올리는데, 이 성은 삼국시대(고구려, 백제, 신라) 때부터 한강 방어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인조는 1636년 청나라의 침공으로 남한산성으로 피신을 하게 되는데, 성 안으로 들어갈 때는 남문(정문)으로 들어갔지만, 굴욕을 당하는 시점에는 남문이 아니라 서문으로 나왔다. 굴욕을 당한 지점은 송파나루 삼전도이다. 맑은 날에는 수어장대(임금 호위 장군 지휘소)에서 석촌호수에 있는 삼전도를 볼 수 있다.

 

1636년 12월 2일 청나라 태종은 만주족, 몽골족, 한인으로 이루어진 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다. 1627년 1차 침략을 단행한지 9년만이었다. 청나라 선봉부대를 이끈 마부태馬夫太는 평안도 의주부윤(현 시장에 해당) 임경업 장군이 지키고 있던 백마산성을 피해 곧바로 한양으로 직행하여 청나라 수도 '선양'을 떠난지 10여 일 만에 개성을 통과했다. 전격적으로 단행된 진공이었기 때문에 평안도 병사였던 유림 장군과 평안감사였던 홍명구는 남진하는 청군을 방어할 수가 없었다. 12월 13일, 조정은 청의 대군이 청천강을 건너 한양을 향해 진격 중이라는 보고를 받고 강화도 행궁으로 향했다. 청군의 선봉대가 강화도로 향하는 길을 차단한 상태였기 때문에 인조는 할 수 없이 얼어붙은 송파나루를 건너 남한산성 남문으로 입성했다. 그날 밤의 참상이 <남한지>에 기록되어 전한다.

 

".....왕 앞에서 인도하는 신하는 대여섯 명이었다. 고위 관료들 중에도 선조의 뒤를 따라 함께 들어온 사람은 수십 명에 불과했다. 밤 10시~새벽 2시(이경)가 넘어서야 대신들이 들어왔다. 임금이 '남문' 앞에 당도했을 때 사슴 한 마리가 지나갔다. 내시가 임금에게 말했다. "이것은 길조입니다. 전하께서는 머지않아 환궁하실 것이옵니다."

 

45년 전인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하여 부산을 함몰시키고 한성으로 북상하자 선조는 4월 30일 새벽 북으로 몽진을 했다. 그날 새벽의 참상이 <징비록>에 기록되어 전한다.

 

".....새벽에 임금이 인정전에 나오니 백관들과 인마 등이 대궐 뜰을 가득 메웠다. 이날 온종일 비가 쏟아졌다. 임금과 동궁은 말을 타고, 중전 등은 덮개 있는 교자를 탔는데 홍제원에 이르러 비가 심해지자 숙의 이하는 교자를 버리고 말을 탔다. 궁인들은 모두 통곡하며 걸어서 따라갔으며 종친과 호위하는 문무관은 100명도 되지 않았다."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고 있을 즈음, 청군의 배후를 치기 위해 평안감사 홍명구와 평안병사 유림이 철원 김화 방향으로 남하하고 있었다. 철원 남쪽에 있던 청군 잔여 병력이 김화로 북상하면서 1637년 1월 27~28일 양일간에 걸쳐 그 유명한 김화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조선군이 거의 전멸상태가 될 때까지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청군은 지원군을 증파했다. 무기가 바닥이 난 조선군은 기만작전을 펼치면서 인조를 구하기 위해 가평으로 남진하였다.

 

병자호란의 인조 구출 작전: 홍명구·유림의 김화 전투

 

김화 성산성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한지 47일이 되었다. 강화는 이미 점령당하였고, 평안감사 홍명구와 평안병사 유림이 김화에서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고 있는 것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식량도 바닥이 났다. 투항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서문'으로 나갔다. 이날, 눈이 얼어 가파른 산길0은 더욱 미끄러웠다. 인조는 말에서 내려 걸어야 했다. 삼전도에 도착했다. 청나라 태종은 인조에게 한번 절할 때마다 이마를 땅바닥에 세 번 부딪치기를 세 번 반복하게 했다.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항복례를 올릴 것을 요구한 것이다. 문헌에 의하면 청 태종은 자신이 앉아 있는 단에서 1백보 앞까지 자갈을 깐 후 인조로 하여금 죄인이 입는 베옷을 입고 엎드려 기어오도록 한 후 단에 이르러서는 "대죄를 용서하여주소서" 라고 빌면서 '삼배구고두'를 행하도록 했다. 인조는 무릎이 까지고 이마에 선혈이 낭자해졌다. 인조가 머리로 땅바닥을 받을 때마다 함께 배석한 청나라 관리들은 '머리 부딪치는 소리가 작다'며 더 세게 박으라고 외쳤다고 전해진다.

인조의 항복 소식도 모른 채 김화 전투에 참전했던 조선군은 인조를 구출하기 위해 2월 3일 가평에 도착했을 때 3일 전인 1월 30일에 청군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 얼마나 기막힌 현실인가! 45년 전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교훈을 얻지 못해 이번에는 또 다시 조선의 전 국토를 청군에게 내 주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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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들이 보고 있는 남한산성의 모습은 외적으로 청나라의 침략 위협이 고조되고 내적으로 이괄의 난을 겪고 난 후인 1624년(조선 인조 2년)에 구축한 것이다. 그 이전에는 토성이었고, 주장성晝長城(일명 일장성日長城)이라 불렸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BC 5년 무렵(백제 온조 14년)에 하남 위례성(현 강동구 풍납토성 혹은 송파구 몽촌토성)에서 이곳으로 천도해 온 이후 372년(신라 문무왕 12년)에 당나라 침입에 대비하여 한산주에 토성(주장성)으로 축성하였는데, 학자들은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보고 있다. 남한산성 내에는 숭열전이 있는데, 이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모신 사당이다.

 

고려시대의 기록은 없으나 조선 『세종실록지리지』에 일장산성이라 기록되어 있다. 청나라의 침입을 방어하고자 1621년(조선 광해군 13년)에 석성으로 개축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이괄의 난을 겪고난 후 1624년에 다시 공사를 시작하여 3년여 후에 준공하였다. 병자호란 이후 계속적인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시설은 동·서·남문루와 장대·돈대·보 등의 방어시설과 비밀통로인 암문, 우물, 관아, 군사훈련시설 등이 있다. 이곳에는 백제 전기의 유적이 많이 출토되어 일찍부터 백제 온조왕 때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 남한산성 답사

 

남한산성은 기본적으로 원성과 외성으로 구분된다. 원성은 1624년(인조 2년)에 수축한 남한산성의 영역으로 하나의 폐곡선 형태로 연결되는 본성을 의미한다. 이외에 외성으로는 동쪽에 봉암성과 한성봉이 있고, 남쪽에 신남성이 있다.

 

신남성

 

서울을 지키는 4대 요새 중 하나인 남한산성은 길이 11.76km(본성 9.05km, 옹성 2.71km), 높이 7.3m로 행정구역상 광주 남한산에 위치해 있다. 동서남북에 각각 4개의 문과 문루, 8개의 암문을 내었으며 동서남북 4곳의 장대(지휘소)와 함께 성 안에는 수어청을 두고 관아와 창고, 행궁을 건립했다. 비상시에 거처할 행궁은 73칸, 하궐 154칸으로 모두 227칸을 지었으며, 30개의 우물, 45개의 샘을 만들고 광주목의 행정처도 산성 안으로 옮겼다. 현재 남한산성은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번 남한산성 답사 코스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걸어갔던 길을 그대로 따라가 보기로 했다. 8호선 남한산성입구에서 출발하여 남문(지화문)을 거쳐 수어장대로 향했다. 수어장대에서 서문(우익문)을 거쳐 북문(전승문)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다시 서문을 거쳐 5호선 마천역으로 내려섰다.

 

▼ 남문(지화문)

인조가 이 남문으로 남한산성에 입성했다. 남쪽 방향인 제1남옹성 방향의 성벽 모습과 남문 안쪽에 있는 임금 호위 장군 비의 모습이다. 임금 호위 장군 비에는 '수어사 정공'이라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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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어장대

 

수어장대로 오르기 전에 만나는 암문이며, 밖과 안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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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장대다. 서쪽 지휘소, 즉 서장대西將臺이다. 왕을 호위한다는 의미에서 수어장대라 한다. 이  건믈은 1624년(인조 2년) 남한산성 축성 때 단층 누각으로 지어 '서장대'라 불리던 것을 1751년(영조 27년) 광주유수 이기진(李箕鎭)이 왕명을 받아 이층 누각으로 다시 쌓고 '수어장대'라는 편액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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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장대 좌측에 있는 '탁지부 측량소 삼각점'이다. 1890년대(고종 황제), 이곳 수어장대가 측량 기준점 중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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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장대 오른쪽에 있는 '무망루'다. 치욕과 오욕의 역사를 잊지 말자며 맹세한 곳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다만, 수단이 바뀔 뿐이다'. 조선시대 중기와 후기 시대는 역사에서 배우지 못한 시기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임진왜란에서 배우지 못해 정유재란이 발발하고, 정유재란에서 또 다시 배우지 못해 병자호란이 발생한다. 병자호란에서 교훈을 얻지 못해 36년간의 암울한 일제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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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망루 앞쪽에 있는 '수어서대守禦西臺'다. 매바위에 새긴 것으로 수어사守禦使가 지휘하던 곳이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독전하던 곳이기도 하다. 수어사는 도성의 수어청에서 업무를 수행하였으나 유사시에는 남한산성의 수어장대에 와서 지휘하였다. 1795년(정조 19년)부터는 광주유수가 수어사를 겸하였다.

이곳 '매바위'는 남한산성 동남쪽 축성 책임자였던 이회李晦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이회는 1624년 남한산성을 쌓을 때 동남쪽 부분을 책임지고 공사했는데, 공사비를 횡령했다는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다. 이회는 누명을 쓰고 죽을 때 자신이 죄가 없으면 매 한 마리가 날아 올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이회가 죽으려는 순간 과연 하늘에서 매가 날아와서 사형당하는 장면을 쳐다 보았다 한다. 이회가 죽임을 당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부인 송씨와 소실은 한강에 투신하여 자살하였다. 

  

수어장대로 올라서기 전 사당이 한 채 있는데, 청량당이다. 이회가 죽은 후 공사비 횡령사건을 재조사하게 되었다. 조사결과 그가 한 공사는 모두 충실하게 축조되었고 공사비도 횡령한 사실이 없음이 밝혀지자, 서장대 옆에 사당을 지어 그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뜻으로 초상을 안치했다. 청량당은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고, 지금 있는 것은 그 이후에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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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문(우익문)

 

인조가 47일간을 머문 뒤에 송파나루 삼전도로 가 청 황제에게 무릎 꿇고 항복할 때 남한산성을 나섰던 문이다. 이 문을 나설 때만 해도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항복례를 할 만큼 치욕을 줄 것이라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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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주봉 옹성

서문을 통해 마천역 방면으로 하산하기 전, 북문까지 좀 더 답사한 다음 되돌아오기로 했다. 북문으로 가는 도중 연주봉 옹성으로 발길을 돌렸다.

 

연주봉 옹성 밖에서 본성 암문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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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봉 옹성 망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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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봉 옹성 망루에서 본성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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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문

 

연주봉과 북문 사이에서 바라본 연주봉 능선의 성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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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봉 옹성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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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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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문에서 마천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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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장이 보이는데, 남성대퍼블릭골프장이다. 성남시 수정구, 청계산, 관악산 방향이다. 청계산 능선과 관악산 능선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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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구, 송파구 방향이다. 멀리 남산이 보이고, 석촌호수가 눈에 들어온다. 석촌호수에 삼전도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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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구, 하남시, 구리시 방향이다. 멀리 아차산과 용마산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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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N 국방시민연대 전쟁사위원회 위원장 권순삼

 

profile

[레벨:4]김호중

2010.04.10 12:21
*.33.223.15

참으로 오랫만에 권순삼님의 글을 보고 깊은 식견에 놀랍습니다.

이렇게 옛 전쟁사를 현재의 시점에서 재 조명한다는 것은 정말 뜻깊은 일입니다.

권순삼 전쟁사 위원님 감사의 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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