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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Dec
전쟁과 시장[38] - 영 제국과 러 제국, 그 사이의 조선
작성자:
나눔의행복
IP ADRESS: *.39.120.17 조회 수: 4913
전쟁과 시장[38] - 영 제국과 러 제국, 그 사이의 조선
-거문도의 중요성, 조선만 빼고 모두 알았다
-러와 대적하던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하자 청, 일본은 긴장했고 견제에 나섰다
-그러나 정작 조선관리들은 섬의 위치조차 모르고 있었다
"러시아의 욕심 많은 불곰 놈들. 음흉하기 짝이 없고 뻔뻔한 놈들." 흑해의 크림반도에서 벌어질 전쟁을 앞두고 있던 시점이었다(1850년대 초). 영국군인들이 화가 났다.
"우리 영국과 싸울 러시아 놈들이 전쟁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우리 런던시장에서 공채를 매각하려 하고 있어요." "너무나 구리고 비상식적인 행동입니다." "더 큰 문제는 우리 영국의 은행과 금융회사들에게 있어요." "그럼 그 돈놀이꾼들이 러시아의 국채 상장을 묵인한다는겁니까." "그래요. 내각까지도 여기에 가세했다니까…."
전쟁당사국에 돈을 빌려 전쟁을 한 러시아
러시아는 런던시장에서 전비를 조달할 수 있었다. 영국은 당시 오늘날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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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도의 명소 신선바위에서 내려다본 바다.국제신문DB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시장지상주의'국가였다. 자본이동의 자유라는 철칙을 준수하고, 그 모습을 세계 만방에 보여주고 있었다. 영국인들은 자국의 은행들이 보유하고 있던 금 준비금이 해외로 빠져 나가는 것을 몹시도 두려워했다. 경쟁국보다 무리한 고금리정책을 실시해 가면서까지 금이 베를린이나 뉴욕 파리 모스코바에서 런던의 은행으로 유입되게 만들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본 전제는 영국의 군사적 우월성이었다.
1588년 영국은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굴복시킨 후부터 유럽대륙에서 떨어진 섬이라는 위치를 이용해왔다. 대규모 상비 육군을 양성하지 않아도 됐다. 여유 돈을 해상권 장악에 마음껏 투자할 수 있었다. 해적질을 하거나 독점적인 무역으로 쟁취한 돈으로 스페인과 프랑스에 맞서는 동맹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힘 균형의 추 영국
1815년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 영국의 대외정책은 동맹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계산된 이익을 개발하는데 기반을 두고 있었다. 이로 인해 필요하다면 당장이라도 동맹관계나 우방을 바꿀 수 있었다.
러시아는 나폴레옹전쟁 당시 영국의 최대 동맹국이었다. 하지만 1853년 7월 러시아군이 오스만투르크의 영토인 흑해연안의 크림반도를 점령하자 영국은 태도를 바꾸었다. 영국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러시아가 흑해를 점령하고, 나아가 오스만투르크를 협박하여 지중해로 진출해올 터였다. 영국은 러시아를 막기 위해 과거의 숙적이었던 오스만투르크와 동맹을 결성했고, 프랑스 사르데냐가 참가하였다.
흑해의 크림 반도에서 일어난 크림 전쟁은 1854년 3월 28일부터 1856년 3월 30일까지 지속되었다. 결국 러시아가 패했고, 1856년의 파리 조약으로 종전을 맞는다. 그 결과로 러시아 제국은 다뉴브 하구 및 흑해 인근에서의 영향력을 잃게 되었다. 이후 흑해는 모든 국가에 대해 군함 통과 및 무장이 제한되며 중립이 선언된다.
영국의 거문도 점령
흑해에서 패한 러시아는 진출 방향을 아시아 태평양으로 돌렸다. 1860년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를 강제로 차지했고, 청나라와 북경조약을 체결하여 연해주를 합법적으로 영유하게 되었다. 하지만 블라디보스토크는 겨울이 되면 얼어 붙는 항구였다. 그 남쪽 조선의 부동항에 러시아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884년 러시아는 영국과 아프카니스탄 문제를 놓고 긴장이 고조되었다. 러시아는 아프간에서 페르시아를 거쳐 아라비아해로 진출하고자 하였는데, 영국과 충돌하게 되었다. 조선에서도 양국의 충돌이 예상되었다. 러시아의 조선 영흥만 점령 계획설이 나돌자 영국은 견제수단으로 조선의 거문도 점령을 추진하게 되었다.
천연의 요항인 거문도는 대한해협의 문호로서 한일양국의 해상통로는 물론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지의 요충지로도 손색이 없는 곳이었다. 1885년 2월 29일 영국 동양함대사령관 W. M 도웰 제독은 영국 동양함대 소속 군함 3척을 거느리고 일본 나가사키항을 출발, 다음날 거문도를 불법 점령했다. 영국군은 자국기를 게양하고 섬 안에 포대를 구축하고, 병영을 건설했으며, 항내에 수뢰까지 설치했다. 거문도 주둔군은 700~800명으로 증가했고, 군함도 10척까지 늘었다.
거문도가 어디야?
3월 중순 조선 정부는 외신을 통해 점령사실을 알았다. 대책회의가 있었다.
"거문도가 영국군에 의해 점령됐다고 합니다." "예? 거문도가 어디지요?" 조선의 관리들 가운데 그 위치를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병조판서 김윤식이 말했다. "거문도는…. 아마도 강화도 앞에 있는 섬인 '주문도'인 것 같아요."
다른 관리들은 아무도 의문을 제시하지 않고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아 그렇군요."
거문도는 전남 여수와 제주도 사이에 위치한 섬이었다. 웃지도 못할 코미디였다. "영국 정부가 정식통고를 해줄 때까지 기다려봅시다." "예 그렇게 합시다."
고종대 문과에 급제한 김윤식은 한말의 석학이자 문장가로 '운양집' '천진담초' '음청사'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는 중국의 문헌에 정통하여 태산의 위치나 공자와 맹자의 고향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자국의 영토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했다. 이것이 당시 조선 최고의 엘리트들의 모습이었다. 조선의 미래는 너무나 암울했다.
조선정부의 무능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영국은 철저히 무시했다. 거문도를 점령한 후 그 사실을 일본과 청나라에 먼저 통보했으나(1884년 3월3일), 정작 조선정부에는 4월 6일에 알려주었다. 거문도 문제도 청나라의 북양군벌 이홍장(李鴻章)이 해결했다.
점령 초 청나라는 러시아에 대한 방비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국제적으로 보장받으려는 목적으로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은근히 인정했다. 영국은 당초 청나라와 교섭하여 거문도를 조차할 계획이었으므로, 3월 14일에 거문도 협정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청나라의 북양대신 이홍장이 영국의 거문도 조차에 반대하면서 조선정부에 통고했다. 지금까지 애매한 태도로 있던 조선정부는 이홍장이 주선을 하자 거문도 현지의 실정을 탐사하기로 결정했다. 혼자서 무서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엄세영과 외교협판 묄렌도르프는 4월 3일 정여창과 함께 거문도에 도착하여 점령지 함대사령관에게 점령이유를 따졌다. 그리고 곧바로 나가사키로 가서 영국 측과 외교교섭을 추진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말뿐이었다.
러시아의 아프칸 철수와 영국의 거문도 철수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해야 했던 영국은 거문도에서 물러날 마음이 없었다. 여차하면 거문도에서 전함을 발진시켜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를 폭격할 태세였다. 거문도 문제는 국제적인 상황이 바뀌면서 해결의 단초가 열렸다.
1886년 4월말부터 아프가니스탄 문제에 관한 영국·러시아 간의 긴장이 완화되고, 8월 2일 아프가니스탄 협정이 조인되었다. 그리니까 러시아가 아프간을 침공하자 이에 대한 대응으로 영국은 한반도 남단의 거문도를 점령했던 것이다. 러시아가 아프간에서 물러나자 영국군은 거문도에서 완전히 철수했다(1887년 2월 5일).
거문도 사건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가 있다. 지식의 수요는 명확한 목적에서 잉태된다는 점이다. 거문도를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던 영국인들은 세계경영을 위해 고심하던 자들이었다. 자국의 해외시장을 위협할 수 있는 그 어느 나라도 용인하지 않았던 그들은 넓은 시야를 가져야 했다. 자신의 자리만을 지키는데 연연했던 조선의 관리들은 그 반대였다. 거문도의 위치에 대해 알 필요도 없었고, 영토주권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거문도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지?"
영국은 일찍이 대한해협을 통제할 수 있는 거문도의 전략적 위치에 주목했다. 1845년에 사람을 보내 탐사를 한 뒤 포트 해밀턴(Port Hamilton)'으로 명명했다. 1878년에 이곳을 다시 찾은 영국 실비아호 선장 존은 아예 "동북아의 군함과 무역선 중간기착지로서 최고의 조건을 가진 이곳을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런던금융시장(London Money Market) = 영국 런던 동부의 시티오브런던(City of London·런던의 발상지로 금융중심가이었던 구시가), 특히 롬바드가(街) 일대에 밀접한 시중은행과 어음할인업자 등 각종 금융업자가 잉글랜드 은행을 정점으로 상호 밀접한 유대를 가지고 전개되는 금융영업(상품으로서의 자본의 매매, 즉 이자를 발생하는 자본의 대부관계)이 런던 금융시장을 구성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이상적으로 조직된 금융시장으로 알려져 있고 세계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며 각국 금융시장의 모델이 되어 왔다. 제1차 세계대전까지 국제금융의 중심지였다가 뉴욕금융시장의 대두로 후퇴했지만 현재도 유러달러시장의 중심지로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묄렌도르프 (1848~1901)=조선 조정의 첫 서양인 고문으로 한·독간 최초의 조약이 체결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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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약했다. 당시 그는 독일편에서가 아니라 한국편에서 조약 체결에 관여했고, 1882년말부터 1885년말까지 당시 조선 조정에서 첫 서양인 고문으로 활동했다. 22세에 중국의 세관 근무를 할 당시 텐친에 머물면서 지방관이었던 리홍장을 알게 되었다. 조선이 리홍장에게 언어에 능통하고 국제적인 경험이 있는 전문가를 요청했을 때, 리홍장은 묄렌도르프를 적절한 인물로 천거했다. 그는조선 조정에서 외교협상과 관련한 자문과 세관업무 관련 지원을 맡았다.
DCN 국방시민연대 전쟁사위원회 연구위원 서영교(충남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