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러셋
                      No X-MAS WINTER AURORA HAPPY HEART
IE8이하에서는 최상단메뉴색이 마우스를 올려놓아야 변합니다.
레이아웃 사용자 배경색
                       
사용자 색상 
투명도
배경패턴 & 스타일
오픈메뉴
슬라이더
Promo 위젯
좌측 배너
우측 배너
하단 위젯
레이아웃 설정에서 '미사용'으로 선택한 것은 on되지 않습니다

XE,LAYOUT,레이아웃,CAMERON STYLISH,카메론 스타일리쉬,Treasurej,XpressEngine1.5.1.4

글 수 44

12

2009-Dec

전쟁과 시장[34] - 미국 재무부 채권과 남송의 세폐

작성자: [레벨:16]한국의 산하 IP ADRESS: *.39.120.17 조회 수: 5364

전쟁과 시장[34] - 미국 재무부 채권과 남송의 세폐

-아시아와 미국의 기이한 공생, 그 바닥엔 '공포'가 있다

-승전국과의 전후 무역으로 급성장한 패전국, 그들의 돈을 빌려 다시 소비하는 승전국

이 비합리를 유지하는 건 공멸에 대한 두려움이다

 

 

1.jpg

                              →일본 요코하마 부두에서 수출을 앞두고 대기 중인 일산 자동차들. 에너지 효율이 높은 일본 자동차는

                              세계 각국에 수출돼 이 나라의 대외 무역 흑자를 이루는데 큰 몫을 해왔다. 국제신문 DB

 

봄기운이 완연한 하북 평원의 자주(磁州). 파란 하늘과 시커먼 땅이 붙은 지평선 위에 금나라 여진족 기병 17명이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다(1126년 음력 2월). 본대에서 떨어져 나온 그들은 금나라 황제에게 전할 중요한 서신을 갖고 있었다. 금이 송나라 수도 개봉(開封)을 공격하고 송과 금 사이에 강화가 맺어진 직후였다. 송나라 장군 이간이 2000명의 보병으로 그들을 막았다. 기병들은 강화사절단의 일원으로 왔다가 본국으로 돌아가는 도중이라고 상황을 설명했다.

 

하지만 송나라 조정의 밀지를 받은 이간은 움직이지 않았다. 수적으로 근 120배나 많은 송나라 군대는 기세가 당당했다. 기병들은 뒤로 물러서 돌아가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은 공격을 위한 도움닫기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달려오던 17명 기병은 좌(5) 중(7) 우(5) 3대로 분열했다. 쐐기 모양으로 돌진하면서 송나라 보병의 대열 한 곳에 화살을 퍼부었다. 수십 명이 그 자리에서 전사했다. 놀란 송군 2000명은 동요하여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송군의 거의 반이 전사했다. 그러나 17명 기병은 단 1명도 죽지 않았다. 패전한 북송(北宋) 측의 기록이다('三朝北盟會編' 卷36, 靖康 원년 2월 조).

강화조건으로 금은 송에게 금 500만 냥, 은 5000만 냥의 지불과 중산(하북성 정현) 하간(하북성) 그리고 태원(산서성) 등 3진 20주를 요구하였다. 송나라 황제 흠종은 당면한 위기를 면하기 위해 이를 수락하였다. 금나라 군대가 북쪽으로 돌아간 뒤 송나라 황제는 약속을 무효화했고, 금나라 내부의 반란을 획책했다. 격노한 금나라 태종이 대군을 이끌고 개봉을 포위하였다.

 

재앙은 입에서 나온다

 

말만 잘하는 문신들이 조정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 불행이었다. 포위된 상태에서 주전론자와 화평론자 간의 논쟁이 있었고, 주전론자가 승리했다. 무모한 수도 사수가 결의되었다. 개봉은 단번에 함락 당했다. 금군은 황제와 그 아버지 황후 궁녀 등을 사로잡고, 성안의 보물을 약탈하여 북쪽으로 돌아갔다.

 

전 황제의 아들(고종)이 양자강 이남으로 도망하여 임안(항주)에 도읍하고 남송을 세웠다. 요동의 벽지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송환을 원했던 그는 금나라와의 화평교섭을 시작했다. 양국은 회수를 국경으로 확정하고 송은 매년 은 25만 냥과 비단 25만 필을 세폐(歲幣)로 금에게 증여한다는 조약이 맺어졌다. 죽은 아버지의 관과 어머니 위씨가 송환되고, 평화가 찾아왔다.

 

송나라 황제가 금나라 황제에게 신하의 예를 취해야 하는 치욕적인 강화였다. 하지만 평화는 남송에 경제적으로 번영을 가져왔다. 양자강 유역에 대한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되었다. 수리와 관개에 힘썼던 결과 쌀 차 등의 농업 생산이 급증하였고, 도자기를 비롯하여 비단 제지 목판인쇄업 등이 각지에서 일어났다. 수리의 발달과 조선기술의 혁신에 따르는 수상교통이 활발하여 화물을 원격지로 운반하는 상업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대외무역은 북송시대를 훨씬 넘는 성황을 보였다. 차 비단 도자기 서적이 금나라와 고려 그리고 일본 동남아 각국에 수출되었고, 특히 도자기는 인도는 물론 이집트 소말리아에까지 판매되었다.

 

또 다른 전쟁이 가져다 준 패자의 번영

 

전쟁에 패배했지만 경제대국이 된 나라가 현재 우리 가까이 있다. 1945년 일본은 핵폭탄 2개를 맞고 나서야 미국에 항복을 했다. 군인 250만 이상이 죽었고, 폭격으로 민간인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고, 일본은 미군의 군정 아래에 들어갔다.

 

미국은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 등 재벌은 해체했고, 일본의 잔존 공업시설을 한국과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들에게 분배하려고 했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한국 가까이에 있는 일본은 포탄, 군용트럭, 항공기용 기름탱크, 가시철망, 참호용 마대, 군용모포 등의 물자조달과 트럭, 전차, 함정의 수리 등 서비스 특수를 누렸다. 엄청난 수의 미군이 일본에서 소비를 하게 되면서 전쟁특수는 일본 전체에 파급되었다. 한국전쟁은 3년 동안 일본에게 28억달러(8000억엔)를 가져 주었다. 이로써 일본의 공업수준은 전쟁이전 상태로 회복되었다. 1961년부터 1971년까지 10년간 일본의 국민총생산은 4배로 증가했고, 경제성장률은 10%대를 유지했다. 정부가 주도한 고속도로, 신칸센, 동경올림픽(1964년) 등 공공시설 건설이 지속되었고, 국민경제를 강하게 자극했다. 농촌에서 도시로 인구가 몰렸고, 1962년 도쿄인구는 1000만 명을 넘어섰다. 호경기로 완전고용시대를 맞이했고, 미국에 대한 무역수지가 흑자를 기록했다(1억 1300달러). 1964년 조선, 라디오, 모터사이클, 카메라 등의 생산은 이미 세계 1위가 되었다.

 

베트남 전쟁은 일본에게 또 하나의 기회였다. 1968년 국민총생산에서 독일과 프랑스를 추월한 일본은 미국 다음으로 세계 2위가 되었고, 1970년에 전 세계 총생산의 6%에 이르렀다. 이듬해 미국은 무역수지 적자(28억 달러)로 돌아섰고, 일본의 무역수지는 79억달러의 흑자를 기록해 세계 1위가 되었다. 두 차례의 오일쇼크는 일본의 공업을 더욱 발달시켰다. 에너지를 적게 먹는 소형차와 전자제품이 개발되었고, 미국과 전 세계에 수출되었다.

 

달러의 미로에 빠진 동아시아

 

1983년 일본의 수출은 지나치게 증가하여 심한 견제를 받게 되었고, 자동차의 대미수출을 스스로 규제해야 했다. 1985년 나카소네 수상은 TV에 출연하여 "수입 확대를 위해 국민 한 사람이 100달러씩 외국제품을 사주기 바란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듬해 일본의 무역흑자는 1061억 달러, 대미 흑자는 전년보다 20.1%로 증가한 520억 달러로 사상 최고를 달성했다. 일본의 막대한 무역흑자 달러의 상당부분이 미국 재무부 채권, 국채, 부동산 등으로 흘러들어갔다. 일본이 미국의 강압에 의해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안전한 미국의 자본시장은 투자에 대한 이익을 보장했고 현금화가 가능한 좋은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다. 미국 재무성이 발행한 채권은 무기명으로 24시간 내내 거래되며 그 규모는 하루에 무려 600억~700억 달러였다. 유동적인 2차 금융시장이 미국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바로 이 순환 메커니즘을 그대로 추종했던 국가가 한국과 대만이었고 현재 미국으로부터 매년 2000억 달러의 흑자를 보는 중국이 그것을 답습하고 있다.

 

1990년대부터 미국은 강한 달러 정책을 효과적으로 운영함으로써 낮은 금융비용으로 막대한 해외자금을 조달했다. 미국으로 쏟아져 들어간 자본이 미국의 경상적자를 보전해주었다. 미국은 유입된 해외자금으로 다시 해외투자를 단행하고 막대한 물자를 동아시아로부터 수입하여 세계경제의 성장을 견인했다. 미국 경제의 역동성이 떨어진 2000년대에도 한국, 중국, 일본 등 아시아 국가 중앙은행들이 미국의 경상적자를 보전해주는 역할을 해왔다.

 

2004년 1분기 이후 15개월 동안 일본의 통화당국은 35조 엔을 만들어냈다. 일본의 민간기업이 미국에 물건을 팔고 벌어들인 달러화를 일본통화당국이 사들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일본의 통화는 상승했을 것이고 이는 미국시장에서 일본 제품의 경쟁력을 약화시켰을 것이다. 나아가 일본인들이 그토록 많은 미국 재무부채권을 사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공포 위의 경제

 

약 900년 전부터 매년 금나라로 들어가던 남송의 돈(1208년 은 30만 냥 비단 30만 필로 증가)은 남송의 수공업과 상업을 크게 자극하는 예상치도 못한 결과를 낳았다. 남송의 상인들은 돈을 벌기위해 금나라와 무역에 경쟁적으로 뛰어 들었고, 수공업자들은 폭증하는 주문으로 바빴다.

 

현재 동아시아는 생산하고 미국은 동아시아의 돈을 빌려 소비한다는 구조가 형성되었다. 좋게 말해 미국은 세계의 '성장엔진' 노릇을 하고 아시아는 달러 가치를 지탱해준다는 암묵적 균형이 만들어진 것이다. 금나라가 남송에게 매년 돈을 빨아냈다면, 미국은 매년 돈을 빌린다. 900년의 시간을 넘어 이러한 2개의 메커니즘을 가능케 하는 것은 무엇인가. '공포'가 그것이다.

 

금나라군대가 쳐들어와 남송을 유린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침공에 대한 공포는 남송이 매년 막대한 은과 비단의 금나라로의 송금을 보장했다. 금나라 국경에 개설된 시장에 상인들이 몰려가 활황을 이루었고, 세계 최강국 금나라 사람들의 소비를 증가 시켰다. 특히 기호식품인 차는 생활필수품이 되어 금나라 측의 국제수지 적자를 가져 오게 하였다. 무역의 확대는 금나라 여진인들의 중국화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였다.

 

미국은 동아시아 각국으로부터 지속적으로 돈을 빌릴 수 있고, 그 빚으로 소비를 지속하여 동아시아 각국으로부터 수입을 할 수 있다. 그 위험성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공멸의 두려움이 이 균형을 유지해준다. '금융공포의 균형'이 매년 동아시아에서 미국으로의 달러가 들어가는 것을 보장해 주는 것이다. 달러체제가 무너지고 미국이 동아시아의 물건을 수입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DCN 국방시민연대 전쟁사위원회 연구위원 서영교(충남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원)

 

로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