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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28

01

2009-Dec

임진왜란의 첫 번째 의병전투, 김해성 전투

작성자: [레벨:16]한국의 산하 IP ADRESS: *.39.120.17 조회 수: 6714

임진왜란 의병 전투, 김해성 전투

 

-직접공격에서 간접공격으로 전환하라! 식수 공급을 차단하여 지구작전持久作戰으로 변경하라!

-힘은 다하고 지원병이 없으니 어찌할 수가 없구나(力盡孤城無奈何역진고성무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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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담서원 내의 사충단 표충사, 출처: 다음카페 50대 이상의 멋과 여유로움

 

 

 

■ 김해부와 김해성 주변 지역

 

▼ 고지도(해동지도)와 위성사진으로 본 김해부 지역

 

김해읍성 좌측에 덕교德橋)가 있다. 일본측 자료에 의하면 덕교왜성을 축성한 자리로 비정하고 있다. 이곳은 김해부에서 창원부와 웅천현으로 넘어가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죽도왜성이 전쟁물자를 보급하는 보급창의 역할을 한 것이라면, 덕교왜성은 창원을 거쳐 진주로 진격하는 공격의 최전선이자 방어선이 될 수 있다. 이곳에는 가락국 시대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천곡산성이 있다. 현재 덕교리는 용산과 합쳐져 용덕으로 불리고 있다. 덕교는 조선시대의 국도라 할 수 있는 자연도였으며, 흥동과 주촌을 연결하는 돌다리였다. 지금은 그 자리에 돌다리 기둥과 난간들이 물 속에 잠겨 있다 한다.

 

손가진孫哥津은 나루마을이다. 현재 밀양 초등면 반월리에 있으며, 옛날부터 진촌津村, 진촌나루, 손가진孫哥津, 나릿가, 반월나루 등으로 불렸다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 생가 마을 뒷산이 봉화산이다. 이곳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신 '자살바위'가 있지만, 그 옆 언저리에는 자암산(봉화산) 봉수대가 있다. 이 봉수대는 낙동강 남단인 김해부와 북단인 밀양부를 연결해 주는 봉화대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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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읍성을 언제 축성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읍성 축성에 대해 처음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1456(세조 2년)이고, 정부에 성축 건의를 한 것은 1476년(성종 7년)이다. 1621년(광해군 13년)에 서대문을 세운 것을 보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파괴된 것을 복구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후 1649년(인조 27년)에 서대문을 재건함으로써 체재를 완비하게 되었다.

 

창원읍성의 둘레는 약 700m(2,400자)이며 성의 외벽에 18개소의 반원형  치雉와  서대문을 비롯해 네 곳의 문에 옹성이 있었으며, 성벽의 위로는 600개의 여장女墻(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을 설치하였고, 북쪽 수문 안에는 2개의 우물과 한 곳이 못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산시 합성동 주택단지 내에 합포성이 있다. 이 합포성은 1378년 9월~11월(고려 우왕 4년)까지 3개월에 걸쳐 배극렴 장군이 왜구를 방어할 목적으로 쌓은 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면 이 성을 처음 쌓을 때에는 성 위에 2자尺 간격으로 여장을 만들고, 여장마다 방패와 창을 하나씩 설치한 뒤 병사들이 이곳에 몸을 숨기고 왜구를 물리쳤다고 한다. 그때 이 성의 동쪽에는 원인문元仁門이, 서쪽에는 회의문會義門이, 남쪽에는 회례문會禮門이, 북쪽에는 용지문勇智門이 있었다. 성 안에는 의만창義滿倉과 회영고會盈庫 등의 건물까지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성은 조선 전기 성을 쌓았던 전형적인 축조 양식과 중국계 성 양식인 평지平地 방형성곽方形城郭(성곽의 성벽이 네모 반듯하게 쌓는 형식) 형태를 띄고 있으나,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북문지 주변에 80m 정도의 성벽과 성으로 올라가는 돌계단 등만 남아 있다.

 

이 성은 1439년(세종 2년)에 고쳐 지었다가 1426년(세종 8년)에 경상좌도와 경상우도의 병영이 합쳐지면서 경상도 병영성으로 승격되었다. 그 뒤 1437년(세종 19년)에 다시 경상우도 병영성으로 분리되었다가 1583년(선조 16년)에 경상병사 이수일李守一이 경상우도 병영을 진주로 옮긴 뒤부터 합포진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7년 전쟁이 발발한 1592년에 경상우병사 조대곤은 창원 병영성에 있었다. 이 성이 언제 합포진에서 다시 병영성으로 사용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일본군의 조선 침공이 예상되고 전쟁 준비에 돌입하는 시점이 아닌가 추정된다.

 

▼ 고지도(김해부내지도)와 위성사진으로 로 본 김해읍성

 

김해읍성은 '조선왕조실록' 에 의하면 세종 16년(1434) 석성으로 축조 되었다. '김해읍지'에 나타난 읍성 4대문의 명칭은 각각 동(해동문), 서(해서문), 남(진남문), 북(공진문) 이다. 김해 읍성은 일제 강점기에 읍성철거정책으로 철거 되었는데 고종 32년(1895) 이후에는 거의 흔적이 없어 졌다.

 

김해읍성의 4대문 위치는 대동여지도와 김해부내지도 등의 고지도류와 각종 문헌자료를 참고하여 파악해 볼 수 있다. 북문의 경우 현재의 동상동 현 위치에 성벽과 옹성 일부가 잔존하던 것을 2006년부터 2년간 전면 발굴 작업을 하여 2008년 3월에 복원하였다. 그 외 동문은 동광초등학교 후문 인근, 서문은 수로왕릉 진입로 인근, 남문은 김해농협지부 동편 인근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김해읍성 주변에는 가야 무덤들과 수로왕비릉, 가야의 건국설화와 관련있는 구지봉이 있다.

 

향교는 1408년에 침산(현재 중앙여중 위치)에 창건한 것으로 전한다. 1600년에 김해읍 다전동(현재의 동광초등학교 위치)에 중건하였고, 1770년 현 위치인 송악산 밑에 이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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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을 직각형태로 작도한 것은 중국 성 양식인 평지平地  방형성곽方形城郭(성곽의 성벽이 네모 반듯하게 쌓는 형식) 형태를 따랐기 때문이다. 해동지도에서는 사각 형태이고, 김해부내지도에는 긴 타원형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평지성에서 성을 쌓을 때는 직각 형태로 하는 것이 보통이다. 방어적인 측면에서도 직각형태가 타원형태보다 유리하다. 타원형태는 공격해 오는 적을 향해 양 측면에서 동시 공격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남원읍성과 경주읍성, 그리고 현재 남아 있는 해미읍성의 경우에도 사각 형태이다. 해자의 위치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그 당시의 전투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자를 그려 넣어야 한다.

 

분산성(김해시 어방동 소재)은 분성산(382m)의 낮은 산에 축성되어 있지만, 평야 지대에 솟아 있어 낙동강 하류의 넓은 평야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이 산성은 산 위의 평탄한 지형을 둘러서 남북으로 긴 타원형 형태를 보이고 있는 석축 산성이며, 성벽 길이는 약 900m이다. 서쪽과 남쪽은 험준한 천연 암벽을 그대로 이용하였으며, 현재 성벽이 부분적으로 남아있다. 김해읍성에서 성 안에 이르는 통로는 산성 서쪽에 있는 계곡을 거쳐 북쪽 뒤편에서 들어가는 길을 이용한 듯 하다.

 

처음 쌓은 연대는 삼국시대로 추정하고 있으나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다. 조선 전기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박위가 수리하여 쌓은 뒤, 임진왜란(1592) 때 무너진 것을 고종 8년(1871)에 다시 쌓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성 안에 우물과 암자, 그리고 민가가 있으며, 산꼭대기에는 3기의 비석이 있다.

 

 

 

■ 일본군의 부산 도착과 이동 경로

 

▼ 제1군, 제2군, 제3군의 이동 경로

 

제1군 소서행장 진격로

 

제2군 가등청정, 제3군 흑전장정 진격로

 

▼ 제4군 이동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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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군 편제

 

① 도진의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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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모리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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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승신이 1987년부터 성주가 된 소창성

 

성   명

병   력

지배영역

비   고

도진의홍島津義弘시마즈 요시히로=薩摩守島津兵庫頭義弘

10,000  

별칭 우사랑又四郞, 귀석만자鬼石曼子(鬼島津)=鬼,심안돈沈安頓,심안돈오沈安頓吾=石蔓子, 관위 병고두兵庫頭, 형제 의구, 의홍, 세구, 가구, 아들 학만환鶴壽丸 구보久保, 忠恒 등, 모리승신 후미에서 강원도 공략

   [아들]도진구보島津久保

   

별칭 又一郞, 1593년 9월 8일(10월 20일) 거제도에서 병사

   [아들]도진충항島津忠恒

   

별칭 又八郞, 구보久保 대신 조선 출병, 1598년에 사천전투 공략

   도진충진島津忠辰

 

 

별칭 又太郞, 살주薩州 도진가島津家 7대 당주, 1593년 가덕도 병사

   도진창구島津彰久

   

별칭 又四郞, 관위 守右衛門,중항忠恒을 따라 출병, 수수垂水도진가島津家3대 당주, 1594년 거제도 병사

   도진풍구島津豊久

 

日向 佐土原

별칭 又七郞, 영길永吉도진가島津家 2대 당주, 1598년 사천 전투

   도진충장島津忠長

   

별칭又五郞, 관직 圖書頭, 1592년, 1597년 출병, 사천 전투

      [아들]도진충배島津忠倍

    1597년 남원성 공격

   도진조구島津朝久

   

별칭藤二郞, 관위 豊後守, 1592년 출병, 1593년 거제도 병사

      [아들]도진가하島津久賀

 

 

별칭 藤次郞 관위豊前守, 豊後守, 아버지 조구 대신 15 93년 12세 조선 도착, 1597년 참전, 사천전투 참전

   [가신]이세(유천)정진伊勢(有川)貞眞

 

 

1593년 사망

   [가노]신납여암新納旅庵

    조선 출병

   [가신]계충전桂忠詮

   

통칭 又十郞、관위 兵衛尉, 관직 山城守, 1592년, 1597년 종군

   [가신]사산구겸寺山久兼

   

1597년 종군, 진주성 진지 구축하여 명군 대항, 망진성(진주 망진산) 주둔, 의홍 명령으로 망진성에서 퇴각, 사천전투 때 명군 배후 공격

   [가신]중마중방中馬重方

   

통칭 與八郞, 1598년 출병

   [가신]천상충형川上忠兄

    1592년 조선 출병

      [동생]천상구지川上久智

    1592년 조선 출병

   [가신]촌미중랑村尾重良

   

조선 출병 후 전사

      [동생]촌미중창村尾重昌

     

   [가신]북향충호北鄕忠虎

    가덕도 병사

   [가신]평전세종平田歲宗

    1598년 사망

모리승신毛利勝信 모리 가츠노부=모리길성(삼)毛利(森)吉成 모리 요시나리=모리일기수毛利壹岐守

2,000

소창성小倉城 (규슈 복강)

별칭 吉成, 원래의 성은 森, 관위 壹岐守

   [아들]모리승영(길정)毛利勝永(吉政)

   

풍전수豊前守, 毛利太郞兵衛

   [배속]고교원종高橋元種=秋月元種추월원종

2,000

일항(연강)현

어릴 때 이름 九郞, 통칭 右近大夫, 별명 知白, 種直, 行長, 원래의 성은 秋月氏 형제 秋月種長, 高橋元種, 모리승신 배속 하에 김해 상륙, 고교원종 자체군사는 625명이고, 나머지는 일향 여러 영주들의 군사.

      [가신]토지구강土持久綱

 

 

1592년, 1597년 출병

      [형][이동우병 가노]추월종장秋月種長 아키츠키 다네나가

(1,500)

일향 고와高鍋

별칭 三郞, 관위 長門守, 1592년, 1597년 출병, 1598년 울산성 전투 참전, 일향 고와번日向 高鍋藩 당주

      이동우병伊東祐兵 이토 스케타카

(1,500)

일향 어비飫肥

어릴 때 이름 虎熊丸 통칭六郞五郞, 六郞三郞, 1592년, 1597년 도진풍구와 함께 출병, 울산성 전투 구원

         [가신]도진중정稻津重政

   

조선 출병 종군, 관위 소부조掃部助

      이동우승伊東祐勝

    1592년 출병, 94년 병마, 귀국 도중 폭풍우로 장문에 표류 도착하여 사망

      이동의현伊東義賢

    1592년 출병, 94년 귀국 도중 함선 위에서 병사, 흑전장정과 도진의홍 관련하여 활약했다고 함

총   계

14,000 (3,000)    

도진의홍: 1592년 조선출병, 1597년 7월 등당고호와 함께 칠천량 해전, 8월 남원성 전투, 전주회의 참석(충청도 공략 결정, 북상), 정읍 경유하여 전라도 해남으로 남하, 10월 말 사천 수비, 1598년 9월 사천성 전투(조명연합군): 도진 보고 20만, 정한록에는 38,700명, 선조실록 10월 12일조 29,015명(명군 26,800명, 조선군 2,215명), 요출전要出典에는 15,800명(중로군 13,500명, 조선군 2,300명), 7,000명 타파, 도진가문서島津家文書에는 적병 38,717명, 명나라 기록에는 약 8만인 전사자[요출전], 덕천가강은 후에 이 전투를 '전대미문의 대승리前代未聞の大勝利'로 평가, 11월 입화종무와 함께 소서군 구출위해 출격 일본은 전략목적인 해상봉쇄를 풀고 소서군이 퇴각

 

도진가 가신 365(일본어)

 

모리승신: 1592년 2000명 남규슈세력 이끌고 출병, 강원도 침공, 1593년 6월 19일 제2차 제2차 진주성공략, 평화교섭기에 임랑포성 성축, 1594년 일시 귀국, 복견성 축성공사 봉행, 자재 부족하여 덕천가강이 몰래 풍신가 목재를 지원, 1596년 9월 제2차 출병 결정, 1597년 장남 승영과 출진, 가등청정과 함께 황석산성 공격, 전주회의 후 충청도, 전라도 진공, 정읍회의 참석 좌군 모든 지휘관들 연명으로 향후 작전전망 보고서인 <조선남부재포진계획, 부산 수비는 입화종무, 중요거점지역은 입화종무를 대신하여 모리승신이 수비>를 풍신수길에게 발송, 이후 전라도 충청도 침공, 사천왜성 축성한 이후 도진의홍에게 인도하고 부산성으로 이동하여 수비, 12월 21일 제1차 울산성 전투 가등청정 구원 명군 격파 후 서생포왜성 이동 후 포진, 1598년 8월 18일 풍신수길 사망, 10월 15일 오대로 오봉행 연명으로 퇴각 명령

 

 

 

■ 김해성 전투

 

병력과 무기의 절대적 열위 상태에서 대군의 일본군을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김해성에는 지원군이 없는 고립된 성이었다. 선혈이 낭자한 대지 위에 아군과 백성들의 시체가 쌓여갔다. 김해성 전투에 참전한 양업손梁業孫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일본군과 사투를 벌이다 시체더미 속에 쓰러져 버렸다.

 

양업손은 살아 남았다. 그리고 1592년 4월 20일, 7년 전쟁의 첫 번째 의병 전투에서 의로운 사람들이 어떻게 싸웠는지를 생생하게 전했다. 그 증언들이 상관으로 모시고 있던 송빈宋貧의 가문에 기록되었다.

 

김해성 전투는 관이 주도적으로 지휘한 단계와 의병이 주체가 되어 지휘한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관이 주체가 되어 지휘한 것은 김해성의 수장인 서예원 부사가 4월 14일 일본군의 침공 소식을 듣고 전쟁 준비를 하면서 일본군이 김해성을 포위하고 전투를 개시한 4월 19일까지이고, 의병이 주체가 되어 지휘한 것은 서예원 부사가 김해성을 빠져 나간 4월 19일 저녁 무렵부터이다.

 

김해성 전투가 벌어지는 시점의 전역적 상황

 

▼ 김해부사 서예원의 전쟁 준비 및 방어   

 

김해부사 서예원은 4월 14일, 일본군의 침공 소식을 듣고 진주에 있는 경상감사 김수와 창원 병영성에 있는 경상우병사 조대곤에게  전시 공문을 발송하고 초계군수 이유검 및 김해부에 거주하는 선비들에게 지원을 요청하면서 참전을 독려한다. 서예원과 인척인 이대형은 10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입성하고, 무인 출신(무과 급제자)인 김득기와 선비 송빈 역시 김해성으로 들어왔다.

 

일본군 제3군 흑전장정 부대는 4월 18일 부산과 김해 도착에 앞서 정찰대를 김해로 파견한 것 같다. 7년 전쟁이 발발하기 전, 일본 사회는 전국시대였다. 지역 무장들간 정벌 전쟁이 한창일 때, 본대가 도착하기 하루 전 미리 정찰대가 수색정찰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송빈 가문의 족보에 의하면, 송빈은 4월 17일 일본군 소규모 부대가 김해성을 포위하자 공격하고 밤에 기습하여 수백명을 사살하고 죽도까지 추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흑전장정 부대의 본대가 죽도에 도착한 것은 4월 18일이다. 이 뒤를 이어 제4군 도진의홍과 모리승신 부대가 도착했다. 이 날은 제1군 소서행장군에 의해 작원관을 방어하던 박진 밀양부사가 괴멸되고 밀양성이 적의 수중에 떨어진 날이다. 지휘관인 서예원은 4월 19일 초탐선哨探船으로 정찰을 나갔다(고지도에 보면, 김해성과 죽도까지 물길이 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일본 군사가 공격을 해 오자 초탐선을 빼앗기고 성 안으로 퇴각했다.  

 

일본군은 4월 19일 죽도와 월당진月堂津(현 대동면 월촌리) 두 곳에서 김해성으로 진격해 오고 있었다. 월당진에서 일본군이 진격해 오는 것을 목격한 류식柳湜은 집안식구들을 거느리고 김해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일본측 사료에 의하면, 모리승신 부대에 배속된 고교원종이 김해에 도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모리승신 역시 김해성 전투에 참전했다고 볼 수 있다. 제4군의 총사령관인 도진의홍의 이동 경로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일본군이 김해성을 손쉽게 함락시킬 수 있도록 김해 북쪽 지역에서 지원군이 오는 것을 차단시키기 위해 낙동강을 따라 북상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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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안으로 퇴각한 서예원은 초계군수 이유검을 중위장으로 서문을 지휘하게 하고 사관射官(활 쏘는 병사들을 지휘하는 정규 지휘관) 백응량白應良으로 하여금 동문을 지휘하게 했다. 그리고는 성 안을 돌면서 군사들을 독려했다.

 

일본군의 공격이 개시되었다. 성 주변을 완전히 포위하면서 외곽으로는 지원군을 차단시키는 부대를 배치했다. 완전히 고립된 조선군에게 맹공을 가하였지만, 조선군의 투지에 눌려 일본군은 성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전이 3차례나 전개되었다. 동문을 지키던 백응량이 활을 쏘아 적장을 사살했다. 일본군은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김해성 주변에 있는 보리를 베어 해자를 메우고,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를 만들어 성 안으로 투척하였다.

 

고립된 성 내에 무기가 바닥이 나고, 해자를 넘어 성벽을 넘는 일본군의 위세에 조선군은 사기를 잃어갔다. 공포에 휩싸인 중위장 이유검은 서문을 지키던 수문장을 죽이고 도망을 치고 말았다. 사령관 서예원 역시 군사들에게는 이유검을 체포해 오겠다며 속이고는 북문으로 나가 강창江倉(강창포江倉浦, 강동, 김해읍성의 동문 지역이 예전에 좌부면이었는데, 강창은 좌부면에 속해 있었음)에서 배를 타고 진주로 도망갔다. 월당진에서 집안식구들을 이끌고 김해읍성으로 들어온 류식은 초계군수 이유검과 김해부사 서예원이 성을 버리고 도망간 것을 알았다.

 

김해읍성 북문

 

▼ 의병들의 전투 방어

 

김해읍성을 사수해야 할 부사 서예원은 돌아오지 않았다. 비분강개함을 이기지 못해 읍성으로 들어와 죽음을 같이하고자 했던 의병들과 백성들은 망연자실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 성을 빼앗길 수는 노릇 아닌가! 송빈과 류식, 이대형과 김득기는 남아 있는 군사들과 병사들을 위로하고 무기들을 재정비하였다. 송빈은 중군도총中軍都摠이 되어 부하 양업손과 함께 남문을, 류식은 서문을, 이대형은 북문을, 그리고 김득기는 동문을 사수하기로 했다.

 

일본군은 먼저 성 안으로 흘러들어가는 물줄기를 틀어 막았다. 기갈에 시달려 항복하기를 기다린 것이다. 류식은 잇다른 전투로 인해 허기지고 목마른 병사들을 위해 객사 앞에 우물을 파게 해서 이를 면하게 했다. 성 밖에서 항복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일본군은 연일 보리를 베어다가 성벽을 넘을 수 있을 만큼 높게 쌓고 있었다.  

 

4월 20일, 성 함락 준비를 모두 마친 일본군은 총공세를 퍼부었다. 김득기가 지키고 있던 동문이 먼저 함락되었다. 남쪽 성벽에도 일본군이 맹공을 퍼부어 송빈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송빈은 장대벽(지휘관이 지휘하는 성문 문루의 지휘소 벽면)에 시를 쓰기 시작했다.

 

 

自先公荷國恩월자선공하국은

아! 내 선조님께서 나라의 은혜를 많이 입었으니

 

 

孫何背祖向犬戎손하배조향견융

자손이 어찌 선조를 배반하고 오랑캐를 따르리오

 

 

力盡孤城無奈何역진고성무내하

성은 외롭고 힘은 다하니 어찌할 수가 없구나

 

 

先斬二帥效丹忠선참이수효단충

먼저 두 적장을 베어 단충丹忠을 보이리라

 

 

人之仗節人何勸인지장절인하권

남의 절개 가질 것을 남이 어찌 권하리오

 

 

二子如今任自量이자여금임자량

자네들은 이제 자네들 마음대로 하시게나

 

 

報國殉身吾已決보국순신오이결

나는 이미 나라 위한 순신을 결심 하였네

 

 

北向百拜辭吾王북향백배사오왕

북향백배 올리오며 나랏님께 하직 드리오!

 

 

순절시殉節詩를 마친 의병대장 송빈은 부하 양업손과 함께 끝까지 분투하였다. 성벽을 타고 넘어오는 일본군의 위세에 눌려 북문까지 밀렸다. 양업손은 보이지 않았다. 사세가 다함을 깨달은 송빈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이 땅의 후손을 지켜보고 있던 지석묘 위에 올라 북쪽을 향해 큰 절을 올렸다. 그리고는 폐부 깊숙히 칼을 집어 넣었다. 선혈이 지석묘를 따라 흘러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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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빈이 순절한 지석묘에 '宋公殉節巖'(송공순절암)이라 쓰여져 있다. 지석묘는 청동기시대 고인돌이며, 경상남도 기념물 제4호로 지정되어 있다.

 

흑전장정 가문의 일기(흑전가기黑田家記)에는 김해성 전투에서 10,000명을 참살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1,000여명을 10,000명으로 허위보고를 했거나 아니면 기록 과정에서 오류가 난 것임에 틀림없다. 김해성 전투에서 조선군사는 300여명이었다고 한다. 서예원이 김해부 주변에 있는 백성들을 성 안으로 소집시키고 의병장들이 데리고 온 집안식구들을 합친다 해도 1,000여명은 넘지 않을 것이다. 이는 그 당시의 인구 구성과 4월 15일에 벌어진 동래성 전투의 상황을 보아서도 그렇다.

 

동래성 전투 당시의 인구 추정과 병력

 

백성들을 보호하고 군사들을 지휘해야 할 사령관이 도망간 상황에서도 송빈, 류식, 이대형, 김득기는 끝까지 고군분투를 했지만 김해성을 사수하지 못한 채 김해성과 최후를 같이 했다. 이들의 충의에 찬 활동이 세상에 알려져 사충신四忠臣이 되었고, 이들의 충의와 절개를 기리는 사충단이 세워졌다.  류식의 후손들은 류식이 김해성에서 전투할 당시 우물을 파서 기갈을 면하게 해 준 우물터에 '柳公井碑''(유공의 우물터)라는 비석을 세워 놓았다. 지금도 그 자리에는 비석이 서 있다(김해시 동상동 874)

 

초계군수 이유검은 김해성에서 도주한 죄로 4월 26일 거창에서 경상감사 김수에 의해 참수당하였다. 김해부사 서예원은 삭탈관직 당하면서 백의종군을 하였지만 이후 고령에서 거병한 의병장 김면 휘하에서 활동하다가 제1차 진주성 전투의 주역인 김시민 진주목사가 전사하자 이를 이어 진주목사가 되었다.

 

 

 

■ 분산성에서 바라본 김해성 전경 사진

 

사진 중앙 부분에 숲이 보이는데, 수로왕릉비다. 수로왕릉비 좌측이 김해읍성이 있었던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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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다음 블로그 바람길

 

 

 

 

DCN 국방시민연대 전쟁사위원회 위원장 권순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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