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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Nov
제천 덕주산성(德周山城)
작성자:
한국의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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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의 한이 서려 있는 덕주공주의 안식처, 덕주산성
-독특한 산성형태를 보이는 월악산 덕주골은 산성문화재의 노천박물관이다.
-계립령, 미륵사지, 덕주산성, 그리고 마애불의 역사 흔적을 찾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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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변 지형과 고갯길의 역사
경북 문경시(조선시대, 현)에서 충북 괴산이나 충주시(조선시대, 목)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문경에서 하늘재(계립령), 새재(조령), 그리고 이화령 중에서 어느 한 고개를 지나야 한다. 시기적으로 가장 먼저 개척한 고개는 하늘재(계립령)이다. 하늘재(계립령)는 삼국시대부터 존재해 왔다. 그 다음 조선시대 초기에는 새재(조령)이 개척되었다. 조령이 개척되면서 계립령은 쇠퇴하였지만 보부상인이나 짐을 실어 나르는 우마길로 사용되어 그 명맥은 유지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일제시대 때 이화령이 개척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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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립령(하늘재)
하늘재라는 이름으로 통용된 것은 출처가 분명치 않으나 현재는 계립령의 이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경북 문경에서 충청북도로 넘어가는 길은 현재 3갈래가 있다. 최초의 길은 156년에 개통된 계립령로이며 고려 말까지 중요한 교통로 역할을 했다. 두 번째 길은 조선 초에 개발된 것으로 조령(새재, 문경새재)이 있다. 조령을 공로로 이용함에 따라 계립령은 쇠퇴하였다. 세 번째는 일제시대 때 개발된 이화령이 있다.
계립령은 현재 월악산국립공원 내에 포함되어 있는 백두대간의 탄항산(851m)과 포암산(962m)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문경시 관음리와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미륵사지)를 연결하는 옛 고갯길이며, 위치는 학자들 간에 이견이 심하다. 현재 1:50,000 지도상에는 수안보에서 미륵리로 넘어가는(남쪽 신선봉, 마패봉과 북쪽 망대봉, 북바위산, 박쥐봉 사이) 초입의 고개를 지릅재 또는 계립령이라 표기하고 있으며, 미륵리와 문경읍 관음리 사이의 안부鞍部를 하늘재로 기입하였다. 그러나 하늘재로 불리는 안부가 사실상 계립령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으며,『여지도서』의 문경현읍지 지도에도 이 고개를 계립령으로 표기해 놓았다. 따라서 이 고개를 하늘재(계립령)라 보아도 무방하다 하겠다.
계립령에 관하여 문헌에 맨 처음 나오는 곳은 『삼국사기』권2,「신라본기」이다. 이 기록에는 아달라 이사금 3년 “여름 4월에 계립령 길을 열었다” 고 했다. 아달라왕 3년은 156년이니 죽령길(경북 영주에서 충북 단양으로 넘어가는 길, 현재 소백산국립공원 내에 위치)의 개척보다 2년이 앞선다. 같은 책 권41,「열전」의 <김유신조>에 나오는 이름은 마목고개(마목현麻木峴)이다.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러 간 김춘추에게 보장왕이 말하기를, “마목현과 죽령은 본래 우리 땅이니 돌려주지 않으면 보내주지 않겠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또한 같은 책 권45,「열전」의 <온달조>에는 “계립령과 죽령 서쪽의 땅을 되찾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 는 온달의 출사표가 등장한다.
『고려사』에는 대원령大院嶺이란 이름이 보인다. 1255년(고려 고종 42년) 10월에 몽고 장수 차라대車羅大가 이끄는 “몽고군이 대원령을 넘자 충주에서 정예군을 보내 천여 명을 죽였다”고 기록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마골점麻骨岾 봉수'만 등장하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사람들은 계립령을 마골점이라 한다”거나 “속칭 마골산이라 한다”는 기록이 있으며, “관음원은 계립령 아래 있다”는 기록도 보인다.
역사적 문헌을 토대로 2009년 11월 현재 해당 지역 사람들에 의해 불려지고 있는 이름으로 정리를 하자면, 문경 관음리에서 미륵리 절터로 넘는 고개를 하늘재, 미륵리 절터에서 수안보로 넘는 고개를 지릅재, 그리고 미륵리 절터에서 송계 골짜기, 덕주산성 남문과 북문, 남한강의 황강나루(충주댐)에 이르는 길을 닷돈재라 부른다. 역사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고려시대 미륵리 절터에 대원大院이 생기면서 계립령 고갯길이 나누어진 것으로 가정한다면 이때 계립령 길도 대원령과 마골점으로 나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따라서 학술적 의미로 본다면 계립령은 현재 각각 나뉘어 부르는 세 개의 고개, 즉 하늘재, 지릅재, 닷돈재를 모두 합쳐 하나의 고개로 보는 게 타당하다.
문경읍 관음리 일대에 사는 노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경북 북부 지역에서 생산되는 도자기와 곡물을 지고 하늘재와 닷돈재를 넘어가 제천시 한수면의 황강나루에서 소금과 교역했다 한다. 물론 당시까지만 해도 길은 단지 걸어서만 오갈 수 있는 작은 오솔길이었다. 특히 닷돈재의 경우에는 일부 구간이 깎아지른 벼랑으로 되어 있어 사람들이 고정으로 머물러 있다가 짐을 옮겨주는 대신 품삯으로 닷 돈을 받았다고 증언한다.
하늘재 동쪽 편 포암산 중턱에는 약 1.5㎞에 달하는 달마산성이 남아 있고, 아치식 석문과 산 정상에 탄항 봉수대가 있다. 지표조사 결과 산성이 시작되는 포암산 중턱의 평탄면에는 신라시대의 토기편과 고려시대의 기와 조각이 출토되었다. 평탄면에는 커다란 주춧돌들이 흩어져 있어, 이 장소가 계립령의 관을 지키던 취락터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에는 조령을 간선도로로 지정하였으나 그 주변에는 계립령, 이화령 등 소로와 간로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임진왜란 후 조정에서는 방위상의 문제를 고려하여 조령 직로 외의 모든 영로를 폐쇄하고자 하였으나 계립령은 역사가 길고 통행자가 많아 남겨두기로 하였다. 그 대신 고갯마루와 문경의 관음리에 책문柵門을 설치하여 통행자를 검문검색하였다. 조령이 관리 및 일반 여행자의 통행이 많았던 것과 달리 계립령은 보부상과 우마의 통행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계립령은 현재 거의 사라진 상태이고 1970년대 말까지 임도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경북쪽(문경읍에서 계립령 정상 부근)까지는 민가가 있어 포장도로가 건설되었으므로 옛 도로의 흔적은 거의 소멸되었으나, 충북쪽(미륵리 쪽의 경사면)은 월악산국립공원으로 인해 통행이 중단되어 부분적으로 과거의 흔적이 남아 있다. 옛 고갯길의 정취를 느끼기 위해서는 충북쪽으로 오르는 것이 좋다.
▼ 조령(새재)
새재라는 명칭에 대한 어원이 분명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조령을 새재라 부르고 있다.
새재는『세종실록지리지』,「문경현편」에 초점草岾(초재)이라는 지명으로 등장한다. 이 책은, 현에서 서쪽으로 19리 떨어진 충주 통로에 있는데 험로가 7리에 이른다고 적었다. 조령은 대략 조선시대 초기에 개척되어 조선왕조 5백년 동안 나라의 가장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되었다.
현재의 우리들에게 임진왜란과 정유재란(1592~1598, 7년전쟁)과 관련하여 조령과 조령산성에 대한 이미지가 그릇되게 각인된 것 같다. 조령에 산성이 구축되고 관문이 설치된 것은 신립의 탄금대 전투(1592년 4월 28일)가 벌어진 2년 후이다. 임진왜란 관련 서적에서는 마치 그 당시에 조령산성이 있었던 것처럼 임진왜란을 다룬다. 신립장군이 천혜의 조령을 지키지 않은 것을 비난한다. 산성이 있는 상태에서 방어하는 것과 산성이 없는 상태에서 협곡을 방어하는 것은 전략상 큰 차이를 가져온다. 그 당시의 사람들이나 현재의 우리들이 신립장군이 탄금대 전투에서 패한 여러 이유 중에 '조령을 지키지 못한 것'을 가장 어리석다고 보는 것은 역사적 몰이해에 의한 것이다.
백두대간(백두산~설악산~지리산)과 기타 주요 산맥을 경계로 어느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는 검문검색하는 문이 있는데, 이를 관문(방)이라 한다. 조선이 한성을 수도로 삼은 이후 한강유역을 지키기 위해 한강유역을 둘러싼 백두대간과 기타 주요 정맥들을 중심으로 관방이 설치되었다. 강원도에서 함경도로 넘어가는 철령관, 강원도 서쪽에서 동해로 넘어가는 대관(령), 그리고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넘어가는 조령관(문경새재 제3관문)이 대표적인 관방이다. 이렇게 설치된 관방 시설을 근거로 관서, 관북, 관동, 영남 같은 명칭이 생겨났다. 특이한 것은 영남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는 '관'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영남을 '관남'이라 하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문경새재(조령)에 관방을 설치하자고 처음 논의된 것은 1593년(선조 26년) 6월이다. 조선 정부의 수장(선조)이나 관료들이 먼저 주장한 것이 아니라 파병나온 명국의 최고사령관(당시는 경략經略)과 장군 유원외였다. 선조가 안주安州에 머무르던 중에 명나라 군의 수뇌들과 만났을 때, 경략經略이 조령에 관방을 설치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하였으며, 유원외劉員外는 서울을 지키려면 먼저 조령을 지키지 않으면 불가하다고 하였다. 일본군이 평양에서 조명 연합군에 대패하고 부산으로 퇴각한 것은 1593년 초이다. 1593년 6월 22일~29일에 있었던 제2차 진주성전투가 끝나고 나면 정유재란(1597년 1월~2월)때까지 교착상태에 빠진다. 교착상태 기간인 1594년(선조 27년) 2월 유성룡이 선조에게 조령을 막는 일이 시급함을 주장하고, 1594년 10월 무렵 충주의 수문장 신충원이 관문을 설치하였다. 지금의 문경새재 3관문 중 제2관문인 조곡관이 그것이다. 문제는 국방에 대한 명과 조선의 인식이었다. 명 최고사령관이 조선 정부에 몇 차례 건의했지만 조선 정부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유성룡이 관방에 대한 도면을 만들면서 성축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는가? 지금처럼 3곳의 관문이 모두 모습을 갖춘 것은 1708년(숙종 34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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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령산성은 계곡 초입에 위치한 초곡성(제1관문=주흘관, 제1관문의 오른편의 산 이름이 주흘산), 계곡 깊숙히 자리한 중성(제2관문=조곡관), 그리고 산 정상부에 위치한 조령성(제3관문=조령관, 제1관문 왼편의 산이 조령산이며 제3관문까지 능선으로 이어져 있다)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관문과 제2관문은 낙동강 유역에서 한강 유역으로 넘어오려는 남적南賊을 방어하는 형태로 축성되어 있으며, 제3관문을 중심으로 한 성곽은 백두대간 마루금에 위치해 있는데, 한강 유역에서 낙동강 유역으로 넘어오는 북적北敵을 방어하기 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조선왕조 5백 년 동안 새재는 조선에서 가장 번화로운 고갯길이었다. 충주나 안보역(현 수안보), 상주나 유곡역은 늘 중앙에서 파견되는 관리나 사대부들의 행차로 몸살을 앓는 곳이었다. 조선정부에서는 일본으로 가는 사신의 행렬을 접대하는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추풍령이나 죽령으로 분산시켜 이동하게 하라는 행정 방침이 내려질 정도였다.
새재가 누렸던 조선시대의 영화는 일제시대 이화령이 건설되면서 막을 내렸다. 그 후 새재는 유신시대 박정희 대통령의 방문이 있기 전까지 풀숲에 묻혀 있는 신세가 되었다. 현재 새재에는 KBS 역사드라마를 촬영하기 위해 만들어진 세트장이 있다. 새재를 찾는 관광객들은 반듯하고 큰 새재길을 보고 감탄을 자아낸다고 한다. 이는 바로 박정희 대통령의 방문으로 인해 현재와 같은 형태의 도로작업이 황급히 이루어졌다고 한다. 지금의 새재는 문경새재 도립공원이 되어 조선시대 때 누렸던 옛 영화를 되찾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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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화령
이화령梨花嶺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화현伊火峴으로 나온다. 기타 조선시대 고지도 같은 문헌에도 모두 이화현으로 기록되다가 일제시대 때 신작로를 닦은 뒤에 일본식 지명으로 이화령이란 이름이 생겨났다. '이화梨花'가 아니라 '이화伊火'로 고쳐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화령은 조선시대에 이화현이라 하여 통행량은 상대적으로 새재보다 훨씬 적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북 문경에서 충북 괴산으로 통하거나, 새재의 우회로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이화령 개척 시기도 조선시대 초기에 개척되는 새재보다 오히려 더 오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고려시대에 문경에서 충청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동쪽으로는 계립령을, 서쪽으로는 이화령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일제시대에는 도로가 개척되면서 골짜기의 옛길을 버리고 현재의 고갯길로 바뀌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서북청년단이 주축이 된 88부대가 길을 새로 닦았다는 증언이 있다. 현대화로 포장도로가 되면서 충북 충주와 경북 문경을 연결하는 3번 국도가 건설되었고, 이후 국내 최초의 민자 터널이 개통되어 마침내 옛 정취의 고갯길이 되었다. 현재는 중부내륙고속도로가 지나간다.
계립령, 조령, 이화령은 삼국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나라의 가장 중요한 교통로였다. 삼국시대 이후 고려시대까지 나라의 가장 중요한 교통로였던 계립령이나, 조선시대 5백 년 동안 나라의 가장 큰 고개로 군림했던 조령이 이제는 모두 공원화되어 관광지로 변모하였다. 그 두 고개의 역할을 넘겨받은 이화령에는 터널이 뚫려 통행량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 문경에 위치한 이 세 고갯길은 우리나라 백두대간 고갯길의 흥망성쇠와 함께 역사의 실타래를 더듬어볼 수 있는 아주 귀중한 역사현장인 것이다.
▣ 덕주산성
▼ 덕주산성과 덕주사의 개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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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에서 하늘재를 넘으면 수안보면(2005년 4월 1일 상모면이 수안보면으로 개칭) 미륵리의 중원미륵사지(사적 제317호)가 나타난다. 이곳에서 한강을 이용하여 한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송계계곡을 거쳐 황강나루로 가야 한다. 송계계곡으로 들어서면 덕주산성의 남문이 나타나고, 4km 정도 더 가면 북문이 나타난다. 남문 위치에서 덕주골을 따라 올라가면 동문이 나타난다. 동문에서 하덕주사를 거쳐 약 1km 가면 상덕주사의 성문이 나타난다. 상덕주사에는 보물 제406호인 덕주사마애불입상이 있다.
월악산 덕주골에는 2개의 덕주사가 있다. 아래에 있는 것을 하덕주사라 하고, 위에 있는 것을 상덕주사라 한다. 이는 『대동지지大東地志』의 충주 산수조에 ‘동으로 45리에 있어 청풍 경계를 이룬다. 상, 하덕주사가 있다.’ 한데서 유래한다. 이와 함께 덕주사의 명칭과 창건연대에 대한 것을 살펴보면 두 가지 속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덕주사의 명칭에 대해 하나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장녀 '덕주공주'(마의태자의 누이)와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10세기 중엽의 '덕주부인'과 관련된 것이다. 또한 덕주사의 창건연대 역시 위의 '덕주공주'와 '덕주부인'과 관련되어 있다.
덕주사의 창건연대는 587년(진평왕 9년)으로 처음에 월형산 월악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고 한다. 그 후 신라가 망하고 경순왕의 장녀이자 마의태자의 누이인 덕주공주가 불교에 입문하고 망국의 한을 달래면서 커다란 바위에 마애불을 조성한 후 '덕주사'라 칭했다 한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덕주사는 월악산 밑에 있다. 속설에 전하기를 덕주부인德周夫人이 절을 창건했으므로 덕주사로 이름 지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에 따라 10세기 중엽을 절의 창건연대로 본다.
『대동지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라 덕주산성의 동문을 지나 초입에 있는 덕주사를 예전에는 하덕주사로 하였고, 보물 제403호인 덕주사마애불입상이 있는 절터를 상덕주사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 덕주산성 각 성문의 위치와 윤곽
월악산을 등산하면서 덕주산성을 답사한 까닭에 남문과 북문은 둘러볼 시간이 없었다. 덕주골을 지나 덕주사마애불상을 둘러보고 영봉으로 향하는 코스를 선택했다. 남문과 북문 답사는 다음으로 미루고 여기에서는 설명만을 해 두기로 한다.
덕주산성은 충청북도 기념물 제35호로 1983년 3월 30일 지정되었으며, 현재 제천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옛기록에 따르면 덕주산성은 청풍에서 동남으로 50리 떨어진 월악산 남쪽에 위치하며 백제 때 축성된 석성으로 둘레가 3만 670자(15.27km)에 이른다고 한다. 성의 유구는 상덕주사를 에워싼 내성內城, 그 바깥의 하성下城과 조선시대에 쌓은 남문, 동문, 북문 등 아치형의 성문 3개소만 남아 있다.
이 산성은 월악산 남쪽 기슭에 있는 상덕주사를 중심으로 하여 그 외각을 여러 겹으로 둘러쌓은 석축 산성이다. 상덕주사의 외곽을 둘러 싼 상성(내성으로 제1곽), 상·하덕주사를 감싼 중성(제2곽, 동문 주변), 그 외곽으로 하성(제3곽)이 있으며, 동달천의 남쪽과 북쪽을 막아 만든 관문형식의 남문과 북문의 외곽성(제4곽)이 있어 네 겹으로 이루어진 매우 큰 규모의 석성이다. 이들 성곽은 축조연대가 각각 달라, 성을 축조하는 방법에 관한 귀중한 자료이다.
고려시대에 가장 불운한 왕은 누구였을까? 역사에 흥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최씨무신정권에 휘둘리고 몽고침입을 방어하지 못한 고종(재위 :1213년~1259년)이라 말할 것이다. 고종은 재위 45년 동안 28년간이나 몽고와의 전쟁을 겪다가 몽고와의 화의조약을 맺은 1259년 6월 강화도에서 6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고려의 모든 왕 중에서 가장 오래 왕위에 있었다. 고종의 재위기간 동안 몽고의 침입은 28여년 동안 집요하게 이루어졌다[1차 침입: 1231년(몽고 지휘관 살리타), 2차 침입: 1232년(몽고 지휘관 살리타), 3차 침입: 1236년(몽고 지휘관 당올태), 4차 침입: 1247년(몽고 지휘관 아모간), 5차 침입: 1253년(몽고 지휘관 야굴), 6차 침입: 1254년(몽고 지휘관 차라대), 7차 침입: 1255년(몽고 지휘관 차라대), 8차 침입: 1257년(몽고 지휘관 차라대)]. 몽고 침입으로 전화가 가장 심하였던 시기는 제3차 침입과 제6차 침입때였다.
기나긴 대몽항전으로 인해 각 지역에 많은 전설과 설화가 탄생되기도 하였는데, 덕주산성 역시 그러했다. 5차 침입과 관련해서는 '월악대왕'이라는 설화를 낳았다. 충주가 함락되고 충주성이 포위되자 월악대왕이 신비스러운 힘을 발휘하였다. 그러자 충주성을 포위하고 있던 몽고군이 물러갔다는 것이다. 6차 침입과 관련해서는 '월악신사'라는 전설을 낳았다. 월악신사는 신라 시대에 수경대에 세워진 것이며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면 신의 영험이 나타난다는 전설이 있다. 수경대는 덕주산성 동문에 위치한 학소대 하단에 있다. 고려사의 옛기록에 의하면, 1256년(고종 43년) 몽고군이 충주성을 공략한 후 이곳으로 진격하자 관리들과 노약자들이 덕주산성으로 피신하였다. 몽고군이 덕주산성으로 밀려들 무렵 갑자기 우레가 치고 비와 우박이 쏟아지므로 적병들은 이곳이 신이 돕는 땅이라 하여 두려워하며 달아났다고 한다. 7차 침입과 관련해서는 덕주산성의 역사적 사실을 전하고 있다.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1255년(고종 42년) 10월 몽고 지휘관 차라대가 이끄는 '몽고군이 대원령을 넘자 충주에서 정예병을 보내 천여명을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대원령은 계립령(하늘재)이다. 덕주산성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이 아니라 몽고군이 덕주산성으로 진격해 들어가다가 협곡 중간에서 고려 정예병에게 기습을 당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덕주산성 남문에서 남쪽 500m 지점에는 보물 제94호로 지정된 사자빈신사지석탑獅子頻迅寺址石塔이 있다. 이 탑의 건립연대는 1022년(현종 13년)이다. 이 탑이 몽고항전과 관련하여 건립되었다느니 하는 것은 맞지 않다.
덕주산성 내성은 조선 중종 때 축성하였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남문, 북문, 동문이 파괴되었다. 고종 때는 명성왕후(민비)가 대원군과의 권력투쟁이 심할 때 이곳에 월악궁이라는 별궁을 짓고 피신한 곳이기도 하다. 송계초등학교(덕주산성 북문 안쪽에 위치) 안에 그 터가 남아 있다. 월악궁은 1892년(고종 29년)부터 3년에 걸쳐 각 도의 대목을 동원하여 지었다고 한다. 갑오농민전쟁 이후 일본군이 진주하고 을미사변으로 명성왕후가 시해되면서 혁파되었다. 월악궁의 부재들은 1920년 한수보통학교 교사 건축 자재로 쓰이는 등 흔적없이 흩어졌다. 현재 월악궁의 흔적은 송계초등학교 교문 한쪽에 몇 개의 주춧돌과 잔해로 남아 있다.
① 남문(월악루)과 북문(북정문)
포털 사이트 다음(daum) 지도의 인공사진이다. 남문의 경우 서쪽으로 길게 성곽이 이어져 있다. 동쪽으로는 동달천이 흐르고 이 자리에 성돌이 남아 있다. 남문 건너편이 망폭대이다. 북문의 경우 문루와 초루, 홍예문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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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문은 한수면 송계리 월악산 남쪽 기슭의 (동)달천을 막는 차단성 역할을 하는 문이며, 1998년 복원하였다. 망폭대에서 서쪽으로 계곡을 차단한 남문의 성벽은 서쪽의 능선 절벽까지 복원하였다. 성곽의 총 길이는 약 218m이며, 성벽의 높이는 2.5m, 너비는 3.3m이다. 동창(동쪽에 있는 창고, 북문 근처가 동창이다)에서 문경으로 통하는 도로에 홍예문으로 되어 있고 좌우를 막는 석축은 내외겹축이다. 축성법은 선단석을 3개씩 쌓아올린 뒤 종석宗石 1개와 12개의 기석基石을 쓰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북문은 송계리 새터말 민가 가운데 있는데, 당초 계곡을 막았을 차단성의 성벽과 수구水口는 남아 있지 않다. 내외홍예를 갖춘 성문으로 초루(성 위에 세운 누각)와 여장(女墻 :성 위에 활과 조총을 쏘는 구멍이나 사이를 띄어 쌓은 작은 성벽) 등 대부분의 석재가 유실되었으나 1997년 복원되었다.
② 동문(덕주루德周樓)과 내성
덕주골로 들어서면 수경대를 만나고 조금 더 올라가면 학소대가 나온다. 덕주산성 동문이다. 상·하덕주사를 기준으로 볼 때 이 동문 성곽은 외성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하덕주산성이라 한다. 남쪽으로 길게 뻗어있는 성곽의 모습이 보인다. 동문 성곽 사이로 길이 나 있는데, 1980년 수해로 인해 동문 성벽이 무너졌다. 그 이후 복원하는 과정에서 성문과 성벽을 연결하지 않은 채 복원하였다. 동문 아래에 절벽이 있는데, 학소대이다. 옛부터 학이 서식하고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하덕주사에서 약 1km 정도 오르면 내성이 나타난다. 조선 중종 때 축성하였다. 성문 사이로 길이 나 있는데, 상덕주사로 가는 길이며, 상덕주사 옆에는 보물 제406호인 덕주사마애불입상이 있다. 내성은 하덕주산성으로 불리고 있으며, 동북 방향으로 성벽이 이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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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덕주사의 입구를 가로막아 쌓여진 이 산성은 남쪽 산 능선을 따라 정상까지 석축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상덕주산성(내성)과 축성방법이 같고 덕주계곡의 외부를 차단한 성이라 하여 외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하덕주산성은 남쪽 문경, 수안보 방면의 남문과 북쪽 청풍 방면의 북문을 통하여 덕주골로 이르는 곳에 또 하나의 성을 축조한 것으로 보아 2차 방어선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남문과 북문 중에서 어느 한 곳만 점령당해도 그 안에 주둔한 군사나 민간인은 피난할 곳이 없다. 덕주골로 피신하게 되면 방어할 수 있는 성벽이 필요하다. 남문과 북문을 아울러 외성이라 한다면, 상덕주산성과 하덕주산성은 내성이라 말할 수 있다.
▣ 하덕주산성(외성, 덕주산성 동문) 성문과 상덕주산성(내성)
▼ 덕주골 초입에서 바라본 월악산 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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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덕주산성(외성)
① 덕주산성의 동문(덕주루)과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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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덕주산성 동문(덕주루)
덕주루 현판이 보인다. 성문은 외부에서 내부로, 내부에서 외부로 바라본 모습이다. 홍예문은 내부에서 외부로, 외부에서 내부로 바라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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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동문에서 남쪽 방향으로 바라본 성벽 모습
성곽 위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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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성벽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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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 성벽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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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남쪽 성벽 위에서 동문(학소대)으로 바라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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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소대 암벽을 자연적으로 활용하면서 빈틈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성축하였다. 기존의 성돌은 얇고 긴 것이 특징이지만, 보수한 성돌은 정사각형과 직사각형 모양이 많다. 보수를 할 때는 힘이 들어도 옛 것과 비슷하게 맞추는 것이 좋다. 날림으로 하고자 한다면 그만두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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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성문 바로 안쪽에 서 있는 돌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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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덕주산성(내성)
① 내성의 성문과 섬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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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서쪽(골짜기) 방향
외부 성벽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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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 성벽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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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 위에서 바라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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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동북(능선)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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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주사마애설불입상(보물 제406호)
상덕주산성(내성)에서 약 500m 가면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거대한 석불입상을 만나게 된다. 이곳이 예전 상덕주사가 자리한 곳이다. 한국전쟁 당시 전소되어 지금은 한 채의 전각이 남아 있을 뿐이다. 13m의 거대한 규모에 비해 거칠고 소박하게 만들어진 불상이다. 거대한 바위의 평평한 벽면에 음각과 양각을 섞어가며 새겨넣었다. 얼굴 부분은 비교적 뚜렷한 양각이지만, 나머지 부분은 선각에 가까울 정도로 얇게 새겼다. 부처의 이름과 역할을 상징하는 수인手印도 형체를 알기 어려울 만큼 형식적이다. 복잡한 선으로 새겨 놓은 옷주름 역시 또렷하지 않다.
얼굴 부위의 벽면에는 무엇을 박았던 듯한 홈이 서너개씩 있어 원래는 불상의 머리 위로 지붕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문화재 전문가에 따르면 이 석불입상은 세련되고 뛰어난 불상은 아니지만 서민적 신앙의 대상이 되었던 고려시대 지방 마애불의 형식과 흐름을 잘 반영하고 있는 귀중한 유물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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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악산 전경
월악산 정상인 영봉에서 바라본 충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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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부에서 바라본 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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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선에서 바라본 충주호(소나무와 암벽, 그리고 충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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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N 국방시민연대 전쟁사위원회 위원장 권순삼
2012. 01. 07
덕주산성 남문.(자가용 헤드라이트 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