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환벽당
지정번호 광주기념물 제 1호
지정연도 1972년 1월 29일
소장 사유지
소재지 광주 북구 충효동 387
시대 조선시대
환벽당은 광주광역시 북구 광주호 상류 창계천가의 충효동쪽 언덕 위에 있는 정자이다. 나주목사(羅州牧使)를 지낸 김윤제(金允悌:1501∼1572)가 낙향하여 세워 교육에 힘쓰던 곳이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집이며, 당호는 신잠(申潛)이 지었다. 송시열이 쓴 제액(題額)이 걸려 있고, 임억령(林億齡)·조자이(趙子以)의 시가 현판으로 걸려 있다.
김윤제는 광주광역시 충효리 태생으로, 호는 사촌(沙村)이다. 1528년 진사, 1532년 문과에 급제, 벼슬길에 올랐다. 그후 나주목사 등 13개 고을의 지방관을 역임하였으며, 관직을 떠난 뒤 고향으로 돌아와 환벽당을 짓고 후학 양성에 매진했다.
그의 제자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정철(鄭徹)과 김성원(金成遠) 등이 있으며,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덕령과 김덕보 형제는 그의 종손으로 역시 김윤제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한다. 특히, 정철은 16세 때부터 27세에 관계에 나갈 때까지 환벽당에 머물면서 학문을 닦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환벽당 아래에 있는 조대(釣臺)와 용소(龍沼)는 김윤제가 어린 정철을 처음 만난 사연이 전하는 곳이다.
조부의 묘가 있는 고향 담양에 내려와 살고 있던 당시 14살의 정철이 순천에 사는 형을 만나기 위하여 길을 가던 도중에 환벽당 앞을 지나게 되었다. 때마침 김윤제가 환벽당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꿈에 창계천의 용소에서 용 한마리가 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꿈을 깬 후 용소로 내려가 보니 용모가 비범한 소년이 멱을 감고 있었다. 김윤제는 소년을 데려다가 여러 가지 문답을 하는 사이에 그의 영특함을 알게 되었다. 그는 순천에 가는 것을 만류하고 슬하에 두어 학문을 닦게 하였다.
정철은 이 곳에서 김인후(金麟厚), 기대승(奇大升) 등 명현들을 만나 그들에게서 학문과 시를 배웠다. 후에 김윤제는 외손녀와 혼인을 하게 하고 그가 27세로 관계에 진출할 때까지 모든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환벽당 인근에 취가정, 독수정, 소쇄원이 있다. 환벽당은 정철의 4대손 정수환(鄭守環)이 김윤제의 후손으로부터 사들여 현재 연일 정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9월 초에 찾아본 환벽당은 상사화의 정원이었다. 그 위로 내려지는 정오의 햇살은 실로 아름다움의 그 자체였다.








꽃무릇. 상사화와 비슷하지만 상사화는 분홍색으로 여름에 피어난다.





상상을 해본다.
헤르만 헷세가 방랑의 여행을 하다가 이곳에 들렸다면, 아마 그는 여기에 머물럿을지도 모른다고....
이곳은 문학이, 시가 절로 나오는 곳이다.
낮잠 한숨도 맛있을 곳이다.
소쇄원과는 1km 남짓의 거리이지만, 사람들의 발길이 적은 곳이다.
남쪽의 정자들 그만한 곳이면 모두가 시원한 그늘과 멋진 풍광을 갖지만 이 곳은 유달리 마음을 더욱 이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