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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Jul
산청 니구산성(尼丘山城)
작성자:
한국의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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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우의 격전지(?), 산청 니구산성
-여해 이순신, 지위를 박탈당하고 백의종군 길에 어머니를 여의고, 상처를 안은 채 이곳 남사리를 지나가다.
-백의종군 이순신, 칠천량 패전 후 권율 도원수의 명을 받고 남해의 전장을 둘러보기 위해 이곳 남사리를 지나가다.
■ 주변 지형도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에 위치한 니구산성尼丘山城은 남사리에서 20번 국도와 1001번 지방도로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정상에서 서쪽 방향으로 45도 각도로 펼쳐 15km 정도 가면 지리산 국립공원 서쪽 끝자락과 만난다. 또한 덕천강에서 서쪽으로 약 5km 정도 가면 조선중기 때 퇴계 이황 선생과 학문을 나란히 한 남명 조식 선생의 덕천서원이 있다. 7년 전쟁(1592~98,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경상우도(낙동강 서쪽 지역) 의병장들은 모두 남명 조식 문하생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망우당 곽재우 역시 남명 조식 문하생이었다.
이곳에서 북서쪽 방향은 경남 함양군을 통해 전라북도 운봉, 남원으로 통하게 된다. 남쪽으로는 진주시와 지척에 있고(약 15km), 동쪽으로 의령군과 약 30km이다. 동쪽으로 약 2km에는 통영대전 고속도로 단성 IC가 있으며, 단성 IC는 남강 본류(경호강)와 양천강이 만난다. 이곳에는 조선시대 단성(현)이 있어 '현감'(현재의 면장에 해당)이 주재하였다. 단성향교가 보이고, 문익점 선생의 목면시배유지 및 문익점 선생 묘가 눈에 들어온다. 또한 남사리 건너편에는 정철 대종사 생가가 있다.
20번 도로(좌측 하단 덕천강 및 덕천서원~우측 상단 적벽)는 조선시대 때 경남 합천, 의령 방면에서 단성을 거쳐 진주, 하동으로 가는 길이었다. 이 길은 바로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 경로상에 위치한다. 남명 조식 선생의 덕천서원, 남사리의 예담촌은 7년 전쟁 이전에도 이미 있었던 마을이다. 예담촌에 있는 니사재(尼泗齋)는 이순신 장군이 유숙하던 곳이다.
■ 주변 전경
▼ 니구산성에서 예담촌으로 바라본 전경(좌측 정면에 보이는 높은 산이 망해봉이다)
사진 출처 : 산청 남사 예담촌 http://yedam.go2vil.org
▼ 신안면내에서 바라본 단성면내(왼쪽 강이 양천강, 오른쪽 강이 남강 본류인 경호강이며, 이곳에서 두 강이 합쳐진다. 강 건너 우측 높은 봉우리가 망해봉이며, 망해봉 너머에 남사리 예담촌이 있다)
▼ 적벽산에서 바라본 백마산(백마산 기슭은 3번 도로이며, 단성면과 신안면을 이어주는 20번 도로는 단성교를 지나 신안면내에서 적벽산을 돌아 진행된다. 이 두 도로가 백마산과 적벽산 사이에서 만나 3번 도로는 남쪽(진주 방향)으로, 20번 도로는 북쪽(산청군 신안면 위쪽인 신등면)으로 진행하다가 서쪽(의령군 삼가면)으로 진행하여 의령군에 이른다. 신안면과 신등면 경계에서 20번 도로는 서쪽으로 진행하고, 북쪽으로는 1006번 지방도로가 진행된다. 1006번 지방도로를 따라 가면 이순신 백의종군 행로 유적지가 나타난다)
사진 출처 : 남도고을의 산과 길 이야기(다음카페)
▼ 적벽산에서 바라본 단성면내(20번 도로와 단성교가 보이고, 오른쪽으로 단성고교가 시야에 들어온다. 왼쪽 멀리 산 사이가 움푹 들어간 곳이 보이는데, 조선시대 단성읍성이 있던 자리이다. 현재는 거의 사라져 흔적을 찾기가 힘들다)
사진 출처 : 남도고을의 산과 길 이야기(다음카페)
▼ 백마산 백마사에서 바라본 적벽, 신안면내, 단성면내 전경(좌측으로 적벽산과 적벽이 보이고, 단성교, 신안면내가 보인다. 우측 멀리 보이는 산이 망해봉이다)
■ 니구산성은 곽재우 장군의 격전지인가!
니구산성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니구산성이 길이 300m이며, 선조 때 왜구의 침입을 방어할 목적으로 승병들에 의해 축성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또한 홍의장군 곽재우가 조국강산을 지키기 위해 왜적과 격전한 곳으로 기술해 놓고 있다. 승병들에 의해 축성된 것은 사실일 수 있지만, 과연 이곳에서 곽재우가 주둔하여 왜적과 격전을 벌였던 곳이었을까?
누군가에 의해 봉수대를 설치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이 산성은 전략적 요충지에 해당된다고 볼 수 없다. 단성(현) 읍성에서 가장 가까운 전략적 요충지는 바로 백마산성이기 때문이다. 백마산성에서는 적 침투의 사주경계 범위가 넓다. 또한 지휘본부(이 지역에서는 단성읍성)와의 연락이 가능하며, 병력 지원이 가능하다. 백마산성은 둘레가 800m가 되며, 지금도 우물이 남아 있다. 여러 달 동안 주둔할 수 있는 장소이다. 반면 니구산성에는 우물이 발견되지 않았다. 병력이 주둔하기에도 장소가 너무 협소하다. 이곳은 백마산성과 서로 연락할 수 있는 장소는 된다. 전쟁 당시 이 지역의 백성들이 피난하기 위한 피난처로서의 역할을 한 것 같다. 백마산성에 주둔한 곽재우 부대와 피난한 백성들이 서로 연락을 주고 받을 수는 있다. 그리고 피난민들을 위로하고, 명령을 내리기 위해 잠시 방문하였으리라고는 추측할 수 있다.
백마산성에서 곽재우가 일본군과 대치하고 있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조선시대 이전인 삼국시대에 이미 백마산성은 백제와 신라가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기도 한 곳이다. 250m 높이의 동서남 3면은 암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1592년 음력 4월 13일(양력 5월 23일) 부산포를 침입한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조선 8도를 점령하였다. 1593년 봄에 전력 차질이 불가피하여 남하한 일본군은 경상도 남해안 일대에 왜성을 쌓고 주둔하였다. 그해 6월 22일~29일(양력 8월 초)에 제2차 진주성 전투가 벌어지고, 조선군은 진주성에서 괴멸당한다. 조선군의 여러 의병장과 관군이 진주성 사수를 외치며 진주성으로 들어갔지만, 곽재우는 제1차 진주성 전투 때(1592년 10월 4일, 양력 11월 14일)와는 달리 지원을 해 주지 않는다. 일본군의 형세(피의 복수심과 뒤로 물러설 수 없는 독기, 총병력을 집중한 기세)로 보아 궤멸당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진주성으로 달려가는 의병장과 관군들에게 숱하게 만류하였지만, 듣지를 않았다. 그 당시 관군을 이끈 여러 지휘관들도 진주성에 주둔한 의병장에게 철수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제1차 진주성 전투는 명령의 일원화와 지원군의 전투 태세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인 전투였지만, 제2차 진주성 전투는 명령이 여러 장수에게서 나오고 지원군이 없는 상태였다. 경상남도 의령군과 대구 등 최전방에 배치된 조선군은 깊은 계곡과 높은 산으로 후퇴하여 주둔하고 있었다.
진주성을 함락한 일본군은 전라도 구례, 경상도 함양, 산청 등지로 밀고 올라왔다. 9월에는 단성현으로 진격해 들어왔다. 곽재우는 의병을 이끌고 백마산성을 선점하였으나 수많은 일본군에 의해 포위를 당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포위된 곽재우 장군의 항복만을 기다렸으나 장군이 의병들에게 수십마리의 말등에 쌀을 붓게 하였다. 이 광경을 본 왜병은 높은 산성에서 가뭄에 물을 이용하여 말을 목욕시키는 것으로 믿고 더 이상 버틸 수 없음을 알고 퇴각하였다. 이 산성에는 현재 일년 내내 마르지 않는 큰 못이 남아 있다. 말등에 쌀을 붓게 하였다는 것은 경기도 오산(그 당시는 수원부)의 독산성 전투를 떠올린다. 그 전 해(1592년)에 권율은 북상한 일본군을 방어하기 위해 7월 8일 현재의 충청도 금산 이치 고개(대둔산 도립공원 자락, 충청도 금산군에서 전라도 완주군, 전주시로 넘어가는 고개)에서 광주목사(현재의 광주광역시장에 해당) 신분으로 일본군을 대파하고, 동년 12월 전라도 감사겸 순찰사(현재의 전라도지사겸 전시 체제의 최고행정관)의 신분으로 경기도 수원에 있는 독산성으로 진군하였다. 이곳에서 경기도 일원에 주둔하던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게 된다. 이때 성 내의 서쪽 지휘소(서장대)에서 말 위에 쌀을 부어 식수가 끊이지 않음을 보여주자 독산성 주위에 진군한 일본군이 포위를 풀었다. 이 독산성은 권율 장군이 행주대첩을 이끌 때까지 주둔한 곳이다. 1593년 2월, 행주산성 전투가 벌어질때까지 이곳 독산성에 주둔하다가 현재의 서울특별시 금천구 호암산성(호암산, 관악산 서쪽 끝자락)에 선거이 장군(이순신 장군과 막역한 사이)을 남겨두어 지원하게 했다. 그리고는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에 주둔하였다.
■ 이순신, 동산산성에 서다!
여해 이순신은 전라 좌수사(전라좌도 해군 사령관)로 1592년 임진왜란에 옥포, 당포, 한산도(전투 보고서인 장계에는 견내량파왜병장, 견내량에서 일본군을 격파했다는 공문, 이 시기에는 견내량이 알려져 있었음) 등 해전에서 일본군을 궤멸시킨 후 남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하여 일본군의 서해안 진출을 봉쇄하는 동시에 적 보급로를 차단시킴으로써 적 후방을 교란시켜 일본군 지휘부로 하여금 전쟁 전략을 수정하도록 만들었다. 삼도수군 통제사(경상·전라·충청 해군 총사령관)로 승진할 무렵에 전쟁은 교착상태에 접어들고 있었다.
전쟁종식을 위해 정부는 일본과 화친하자는 화의론자와 전투 재개를 통해 일본군을 몰아내자는 전투론자로 갈려 혼란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 당시 전쟁 전략의 요소별로 분석해 보면, 전투론자의 의견이 더 바람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서애 유성룡은 이 시기 화의론자였다. 이것이 종전 후 그를 정보 요직에서 물러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정부 요직에서 물러난 이후 '징비록'을 저술했는데, 징비록의 앞뒤를 세밀히 분석해 보면, 무신 경시 사상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전쟁의 대전략, 군사전략, 작전전략, 전술, 무기 기술적 차원으로 대별하여 분석하는 경우, 많은 부분에 있어 병법에 어두운 것을 알 수 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유성룡에게 보낸 편지글이 남아 있는데, '실수를 교훈삼아서'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것은 아마 '평시에 정부 요직에 있으면서 국방을 등한시 했다는 점과 전쟁 기간 중 화의를 주장했다는 점'이 아닐까 추측된다. 유성룡은 본인과 후대인에게 경계를 심어주기 위해 징비록을 저술했다고 했다. 현재의 우리들이 징비록을 대할 때 그 책 하나만을 놓고 그 안에 담겨진 내용이 훌륭하다느니 하는 평가를 내려서는 안된다. 그 책이 국보 제132호로 지정될 만큼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그 당시의 사람들이 기록한 수많은 서적들을 나란히 놓고 비교 분석해야 한다. 현대인들이 그 책의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때 징비록의 효용성과 가치는 그만큼 떨어지게 된다.
'평상시에 국정 운영을 게을리 하다가, 국토가 초토화되고 백성이 유린된 다음, 이들을 이끌고 승리하였다'고 하여 그들을 추앙한다면, 역사적으로 얻는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현재도 '집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을 자주 언급한다. 그리고 그렇게 한 인물을 사회적으로 질타한다.
'평화를 원하는가! 진정한 평화를 원하는가! 원한다면 지금 당장 전쟁을 준비하라!'
교착상태에 빠진 일본은 국면전환을 꾀하기 시작했다. 국토 할양 및 조선 왕실과 대신들의 일본국 인질 등 7개 조항으로 명국과 외교전을 펼치고 있었다. 조선과 명이 이에 응하지 않자 제2차 전쟁(정유재란)을 일으켰다. 교착상태로 접어든 1593년 겨울부터 정유재란이 발발한 1597년 초까지 경상도 울산~밀양~의령~진주~사천 전선과 사천~고성~견내량~거제도 전선을 사이에 두고 반간계와 방화, 국지적 전투 및 방어가 계속되었다.
이순신이 백의종군(백의종군은 이순신만 한 것은 아님, 그 당시 전쟁초기 전라감사였던 이광 역시 전투 패전의 책임을 물어 백의종군하게 했음, 관직을 떼고 흰옷(일반 백성들이 입는 옷)을 입게 한 다음 군대를 따라다니다 전시상황에 따라 복직 혹은 귀향살이를 하는 것)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단언하기가 힘들다. 그 당시의 정부 기록(조선왕조실록)과 정부 요직에 있었던 인물들의 기록물을 분석해 보면 선조가 이순신을 극도로 미워했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원균이 모함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 하나만으로는 부족하다. 일본의 반간계 등 여러 요인이 동시에 작용한 결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어찌되었든 이순신은 1597년(정유년) 2월 26일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당할 위기에 놓였다. 이때 판중추부사 약포 정탁(1526~1605, 7년 전쟁 당시 66세, 광해 세자의 제2정부를 이끔, 광해세자 경로는 조선왕조실록과 약포집에 실려있는데, 약포집이 더 정확함. 두 기록물간 차이가 있는데, 약포집을 우선으로 해야 함)의 진언으로 겨우 사면되어 4월 1일 출옥하였다. 도원수(그 당시 육해군 총사령관) 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고 4월 3일 서울에서 출발하여 아산으로 내려오는 도중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접하게 된다. 장례를 치른 다음 마무리를 하지 못한 채 아산을 출발하여 6월 2일 경남 합천 초계에 도착하였다. 7월 18일이 되자 조선수군이 일본군에게 완패하였다는 비보를 듣고 권 도원수의 명령으로 초계를 출발하였다.
충무공의 '난중일기'를 보면 1597년 6월 1일 하동 청계역(현, 하동군 옥종면 정수리)에서 출발하여 오후 늦게 단성 박효원(현, 단성면 사월리)의 종의 집에서 유숙하였는데 주인은 정성스러웠으나 초막의 잠자리가 불편하여서 날이 새는 대로 길을 재촉하였다. 그래서 6월 2일 아침나절에 도착한 곳이 바로 이곳 단계천 변(산청군 신등면 단계리)인데 이곳에서 조반을 들었다. 조반 후에 삼가(현)을 거쳐 당일로 권율 도원수 지휘본부에 도착하였다.
합천 초계의 매여실에서 1달 보름(46일)을 머물다가 정부 결정권자(선조 및 대신들)의 압박에 못이겨 해전에 참여한 원균의 칠천량 해전 참패 소식을 듣고 권율 도원수의 명령으로 남해의 전세를 살피기 위해 7월 18일 삼가현을 거쳐서 7월 19일 우중에 단계천 변을 지나 동산산성(현, 산청군 신안면 백마산성)에 올라서 지세를 살피고 단성현에 들려 하룻밤을 유숙하였다. 그리고 이튿날 빗속에 출발하여 하동군 옥종면 강정으로 향하였다.
▼ 백마산성(백마산성은 둘레가 약 800m이며, 인공적으로 만든 우물이 2개 있다. 산성을 따라 바위에 인위적으로 구멍을 내었는데, 약 100여개가 있다. 목책이 아닌가 추정된다)
사진 출처 : 남도고을의 산과 길 이야기(다음카페)
■ 니구산성
▼ 남사리 예담촌에서 서쪽 방향으로 바라본 니구산성
산성이 소재하는 이구산(200m) 은 소괴산(238m)의 남동쪽에 위치하는데, 소괴산에서 이구산으로 연결되는 능선 상에는 마사토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현재 밤나무가 자라고 있다. 절벽이 남쪽 방향이고, 능선이 북쪽 방향(소괴산)이다. 소괴산 정상 바로 밑 움푹 들어간 곳에는 박씨 선조의 재실(현 박계동 국회 사무총장의 문중)이 있다. 사진을 촬영한 위치는 박계동 사무총장 고택이며, 현재는 한옥으로 재단장되어 있다.
▼ 니구산성에서 동북, 동, 남 방향(남사리 예담촌)으로 바라본 전경(세 장의 사진은 동북, 동, 남 방향으로 연속해서 촬영한 사진이다)
▼ 니구산성의 동남 방향 사면 및 산성 모습
① 사면(암벽이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봉하마을의 부엉이 바위를 생각나게 한다)
② 산성 모습(자연석 암반을 성벽으로 활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적송의 붉음은 선조들의 선혈일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일까? 독도 망언을 일삼는 일본의 작태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늘 경계해야만 한다. 역사적으로 우리 한반도는 중국과 일본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서로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전쟁 역시 두 나라와의 긴장에서 빚어진 역사였다. 이 세 나라가 평화적으로 번영의 길을 함께 모색하지 않는 이상, 우리 역시 군비 증강을 모색해야 한다. 적송의 붉음과 푸르름은 열정과 냉철한 판단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 니구산성에서 서쪽 방향으로 바라본 전경
▼ 니구산성의 서쪽 방향 사면 및 산성 모습
① 사면(암벽이다)
② 산성 모습(암벽과 성벽의 흔적이 보인다)
▼ 니구산성의 북쪽 전경
① 소괴산과 니구산 갈림길(북쪽이 소괴산, 남쪽이 니구산, 서쪽이 지리산, 동쪽이 남사리 예담촌 방향)
② 소괴산 전경
③ 니구산성 오르는 길(밤나무 숲길이다)
④ 서쪽 방향(지리산 방향)
⑤ 동쪽 방향(남사리 방향, 박계동 국회 사무총장 고택이 보인다)
⑥ 니구산성 북쪽 성벽 만나기 직전의 밤나무 숲길
▼ 니구산성의 북쪽 성벽
▼ 니구산성의 북쪽 성벽을 지나 정상 오르기 직전(정상에 흰색 표지판이 보이는데, 니구산성 안내 표지판이다.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산 222번지이다)
▼ 니구산성의 정상부 성벽 모습(정상부를 중심으로 동쪽, 남쪽, 서쪽 사면은 급경사여서 막사를 치고 농성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며, 북쪽 사면이 농성할 수 있는 공간이다)
① 남쪽 성벽 끝(암반 위)에서 정상부 방향으로 바라본 산성 모습
② 정상부에서 서쪽 방향으로 가는 길 위의 성벽 모습(참호 형태로 만든 것을 위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다음 3장의 사진은 이 부분을 확대한 사진이다)
DCN 국방시민연대 전쟁사위원회 위원장 권순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