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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Apr
임진왜란이 남긴 또 하나의 상처, 여주 고달사지
작성자:
한국의 산하
IP ADRESS: *.208.195.249 조회 수: 6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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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남긴 또 하나의 상처, 여주 고달사지 -고려 초기에는 국가에서 관장하는 3대 선원의 하나였다! -폐사지에 남아 있는 역사의 주춧돌은 내일을 살아가는 미래의 거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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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정유재란(7년 전쟁, 1592~1598)은 조선시대 500년 동안 전대미문의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수 많은 인명이 사살되고 경제력이 고갈되었다. 이 뿐만 아니라 조선사회가 면면히 전통을 지켜왔던 과거 조상들의 정신적 유산물 역시 깡그리 수모를 당하게 되었다. 무엇으로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에 살았던 관료들은 비록 임진왜란을 슬기롭게 극복하였다 하더라도 그릇된 정치를 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일말의 변명이 있어서는 안된다. 우리나라에 분포하고 있는 문화재는 거의 모두 임진왜란 당시 화를 입었다. 그 이후 폐사가 된 이후 그대로 현재까지 방치되어 온 문화재도 상당히 많다. 그 중에 여주 고달사지도 포함된다. 그토록 융성했던 고달사가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임진왜란으로 인해 폐사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국보 제4호 고달사지 부도가 있으며, 여러 점의 보물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경기도 여주를 찾는 사람들은 신륵사와 세종대왕릉, 그리고 골프장이 있는 줄은 알지만, 국보와 보물이 숨겨져 있는 고달사지(高達寺址)가 있다는 것을 잘 모른다. 고달사터에 세워져 있는 탑(塔)과 탑비(塔碑)는 원종대사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원종대사는 신라 경문왕 9년(869)에 태어나, 고려 광종 9년(958)에 90세로 입적하였다. 광종은 신하를 보내어 그의 시호를 ‘원종’이라 하고, 탑 이름을 ‘혜진’이라 내리었다.
고달사지는 현재 사적 제382호로 지정되어 있다. 혜목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고달사는 그 전신인 봉황암鳳凰庵으로 764년(신라 경덕왕 23년)에 창건되었는데 절터에서는 당시의 흔적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때는 신라가 한강 유역을 장악했던 시기이고, 남한강의 수로지 배후에 거대한 사원을 건축했다는 설과 맞아 떨어져 신라시대 창건의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국가에서 관장하는 3대 선원의 하나로서 왕실의 비호를 받는 중요한 사찰이었으며, 950년(광종 1년)에 원감圓鑑국사가 중건하였다. 1233년(고종 20) 혜진慧眞대사가 주지로 취임했다. 그리고 1260년(원종 1) 절을 크게 확장하고 중건하였다. 975년에 세워진 원종대사의 비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당시에는 고달원 혹은 고달선원이라고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달사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조선중기까지는 번창했던 것을 알 수 있으나 1799년에 편찬된 '범우고'에는 폐사된 것으로 나타난다.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당시 병화를 입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고달사지에는 부도(국보 제4호), 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보물 제6호), 원종대사혜진탑(보물 제7호), 석불좌(보물 제8호) 등의 유물과 초석, 장대석, 계단석 등이 남아 있어 고달사가 융성했던 시기의 성대한 규모를 추측할 수 있다. 이곳에 있었던 쌍사자석등(보물 제282호)과 원종대사혜진탑비의 몸체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되어 보관하고 있다. ▼ 고달사지 전경 2008년 봄에 신륵사를 거쳐 고달사지에 갔었다. 그 당시에는 한창 공사 중이었는데, 2008년 말에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① 항공사진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에 위치한 고달사지를 항공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우측 위쪽 모서리에 탑이 하나 보인다. 국보 제4호이다. 이 국보 아래 숲길을 내려 오면 우측에 보물 제7호 원진국사혜진탑이 있다. 본 터에는 보물 제6호와 보물 제8호가 있다.
사진 출처 : 다음 카페 고달사 ② 2008년 4월 봄 여행 상교리 입구에서 혜목산(慧目山, 480m, 우두산이라고도 함) 절터로 바라본 전경이다. 사진 우측으로 혜목산 정상이 위치해 있는데, 국보 4호 고달사지 부도는 이 절터에서 혜목산 정상 방향으로 약간 올라간 부분에 위치해 있다. ③ 2008년 4월 이후 단장된 고달사지
사진 출처 : 네이버 블로그 ▼ 국보 제4호 고달사지 부도(高達寺址 浮屠) 고달사 절터를 급히 돌아본 뒤에 곧장 국보 제4호가 있는 지점으로 이동했다. 가는 도중 가슴이 벅차 올랐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 부도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 부도 앞에 서는 순간, 가슴이 내려 앉았다. 이렇게 장엄하면서도 세련미가 묻어나고 우아함을 간직하면서도 대담한 힘이 느껴졌다.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입체적인 사실감 앞에서 또 한번 숨이 멎어 버렸다. 이 부도는 꼭대기의 머리장식이 완전하지 않은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온전히 남아 있다. 이 탑은 8각의 바닥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탑 전체를 지탱해 주는 기단은 상단·중앙·하단 세 부분으로 갖추어져 있다. 문화재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 부도는 전체적으로 신라의 기본형을 잘 따르면서도 각 부분의 조각들에서 고려 특유의 기법을 풍기고 있어 고려시대 전기인 10세기 즈음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① 상단부 고달사지 부도의 지붕 꼭대기는 보개寶蓋가 얹혀져 있다. ② 중앙부 사리는 탑몸돌에 모신다. 사진 정면에 문짝 모양이 보이고, 양 옆으로 사천왕상四天王像이 보인다. 이 탑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은 위의 상단부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꽤 두꺼운 편이다. 각 모서리를 따라 아래로 미끄러지면서 그 끝에는 큼직한 꽃조각을 달았다. 사진 속의 제일 위쪽 지점인 탑몸돌 위의 지붕돌 좌우측을 보면 비천상이 새겨져 있음을 볼 수 있다. ③ 하단부 하단부 표면에는 두 마리의 거북과 그 사이의 네 마리 용, 그리고 나머지 공간에는 구름 무늬를 새겨 넣었다. 두 마리의 거북은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사실감이 느껴진다. 돌에 꽉차게 새겨진 무늬들이 과장되지 않고 세련되어 능숙하면서도 대담한 힘이 느껴진다. ▼ 보물 제6호 고달사 원종대사 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高達寺 元宗大師 慧眞塔碑 龜趺 및 栗首) 비는 아래에서 위로 귀부-비몸-이수로 구성되어 있다. 아래의 사진에는 귀부(받침돌)와 이수(머릿돌)만 남아 있다. 몸통 부분인 비몸(비신석碑身石)은 일제시대인 1916년에 무너져 경복궁 근정전 회랑으로 옮겨졌다. 귀부가 발이라면, 이수는 머리이다. 그래서 귀부를 댓돌 혹은 받침돌, 이수를 머릿돌, 그리고 비몸을 몸돌이라 한다. 탑에서는 아래부터 위로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로 부르며, 탑과 탑비는 명칭만 다를 뿐 위치 개념에서는 동일한 말이다. 비석은 원래 중국에서 장례를 치를 때 무덤 안에 관을 쉽게 내리기 위해 세우는 무덤 앞의 돌기둥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며, 일설에는 주나라 때부터 이미 목비木碑가 있었다고 한다. 한나라 때에는 이 돌기둥에 죽은 이의 행적을 기록했으며 후한시대부터는 비의 머리가 지붕 꼭대기처럼 뾰족하거나 둥글게 만들어지고, 비신碑身의 한가운데에는 구멍을 뚫어 관을 내리던 흔적을 남기고 있다. 또 비의 테두리에는 용龍, 꽃, 사신四神 등을 새겼는데, 현무玄武를 새겼던 아래쪽과 용을 새겼던 위쪽은 각각 댓돌과 머릿돌에 해당하는 귀부龜趺와 이수栗首로 발전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거북돌과 용머리를 갖춘 비석이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부터 등장하고, 당나라 때에 들어서는 일정한 신분의 귀족들이 거북비를 사용했다. 거북의 발톱은 땅을 꼭 누르고 있는 듯 하며, 다리는 마치 땅에 붙박아 있으면서 앞으로 박차고 나가려는 듯 격동적이며 사실적이다. 목 부분은 길지 않아 머리가 등에 바짝 붙어 있어 마치 웅크리고 있는 듯 하며, 머리 부분은 눈을 부릅떠 정면을 노려보고 있는데, 눈꼬리가 위로 길게 치켜 올라가 상대방으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끼게 하고 있다. ① 이수 부분의 제액題額(비의 명칭을 새긴 부분) 글씨 위의 이수 부분을 확대한 것이다. 우측부터 좌측으로 15자가 새겨져 있는데, 혜목산고달선원국사원종대사지비慧目山高達禪院國師元宗大師之碑라고 선명하게 보인다. 이를 통해서 이 절의 원래 이름이 고달선원임을 알 수 있고, 이 비가 원종대사인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절이 위치한 산 역시 혜목산임을 알 수 있다. 이 글씨는 비문에 따르면 수국사신修國使臣 김정언金廷彦이 글을 짓고, 내의승지 장단열張端說이 썼다고 한다. ② 뒷면 거북의 등은 2중의 6각형 벌집 모양이 정연하게 조각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③ 옆면 비몸(비신석碑身石)에 있는 비문에는 원종대사의 가문·출생·행적 그리고 고승으로서의 학덕 및 교화·입적 등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한다. 비문에 의하면, 거북받침돌과 머릿돌은 975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문화재 전문가들에 의하면, 거북의 머리가 험상궂은 용의 머리에 가깝고, 목이 짧고 앞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점, 비머리의 표현이 격동적이며, 특히 소용돌이치는 구름무늬의 번잡한 장식 등으로 볼 때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로 진전되는 탑비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 보물 제7호 고달사 원종대사 혜진탑(高達寺 元宗大師 慧眞塔) 이 부도탑의 건립연대는 원종대사혜진탑비의 비문에 의하여 977년(고려 경종 2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부도탑은 전체적으로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기단부는 4각 형태의 바닥돌을 3단으로 쌓아 올려 놓은 것이 특이한 형태라 할 수 있다. 탑신은 4면에 문門모양이, 다른 4면에는 사천왕 입상四天王 立像이 새겨져 있다. 지붕은 처마가 수평이나 귀퉁이 부분에서 위로 향하였고, 꼭대기에는 지붕돌을 축소해 놓은 듯 한 머리장식이 올려져 있다. ▼ 보물 제8호 고달사지 석불좌(高達寺址 石佛座) 이 석불좌는 불상佛像은 없어진 채 대좌만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보존상태가 거의 완벽하다. 대좌의 크기가 상당한 것으로 보아 불상 역시 매우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받침돌은 위·중간·아래의 3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연꽃잎을 서로 대칭되게 돌려 새겼다. 이 대좌가 사각형으로 거대한 규모이면서도 유연한 느낌을 주는 것은 율동적이면서 팽창감이 느껴지는 연꽃잎의 묘사 때문이다. 문화재 전문가들에 의하면, 이와 같은 연꽃잎의 표현 수법은 고달사지부도(국보 제4호) 아래받침돌과 매우 비슷하며, 가운데 꽃잎을 중심으로 좌우로 퍼져나가는 모양으로 배열하는 방법은 고려시대의 양식상 공통된 특징이라 하며, 절터에 있는 고달사지부도가 고려 전기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대좌도 10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 보물 제282호 고달사지 쌍사자석등(高達寺址 雙獅子石燈) 고달사지 쌍사자석등은 사찰에서 법등을 밝히던 고려시대의 이형(異形) 석등이다. 이 석등은 고달사지에 넘어져 있던 것을 주민들이 수습하여 보관하다가, 1958년 5월 서울시 종로구 종로 4가 동원예식장 뒤뜰로 옮겼다. 그 뒤 1959년 봄 당시 문교부의 주선으로 경복궁 경회루 옆에 옮겨졌다. 그 동안 옥개석과 상륜부를 잃어 버리고 있었으나 2000년 경기도 기전매장문화연구원이 실시한 발굴조사에서 옥개석이 출토되어 2001년 석등의 제 위치에 올려놓았다. 현재 중앙국립박물관으로 옮겨져 보관하고 있는데, 옥개석과 상륜부가 있는 온전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의 쌍사자석등과는 달리 사자들이 서 있는 입상이 아니라 엎드려 있어 간주석이 아닌 하대석의 역할을 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구성은 지대석·하대석·중대석·상대석·화사석·옥개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대석은 직사각형인데, 그 판석板石 일부가 고달사지 옛 석등 터에 남아 있다. ▼ 기타 귀부 고달사지 보물 제6호 고달사 원종대사 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高達寺 元宗大師 慧眞塔碑 龜趺 및 栗首) 옆에는 규모가 작고 표현 양식도 단순한 귀부가 하나 있다. 원종대사 혜진탑비 귀부보다 이전의 것으로 추정되지만,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다. ▼ 도지정 문화재 기념물 198호 여주 상교리 석실묘 이 석실묘는 고달사 절터에서 국보 제4호 고달사지 부도가 위치해 있는 방향에 있다. 고달사지 부도에서 혜목산 정상 등산로를 따라 500m 정도 더 오라가면 된다. 이 석실묘는 위가 4각형이고 아래가 원형인 상방하원 석실묘上方下圓 石室墓이다. 이 고분에서 상감청자 파편을 비롯한 몇 가지 발굴된 유물을 통하여 고려 말기로 추정하고 있으며, 고려시대 묘제 연구에 중요한 자료라 한다. 이 고분은 1983년 11월~12월 한양대 박물관 발굴단에 의해서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발굴 전에 이 고분의 기단부는 완전히 흙속에 묻혀 있었고 기단 2층과 석실 입구 부분의 돌만이 노출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고분 하부의 석실평면은 원형이고 연도羨道(무덤 안으로 들어가는 좁은 길)가 달려있고, 상부는 네모난 방형의 2층기단으로 된 특이한 구조임이 밝혀져 그 구조상의 특징을 살려 「상방하원석실묘」란 명칭이 붙여졌다고 한다. 이 고분의 지상구조는 2층(기단 1층, 기단 2층)으로 되어 있다. 기단 1층의 규모는 동서가 442cm, 남북이 412cm, 높이 46cm로 장방형이며, 기단 2층은 동서가 322cm, 남북이 280cm, 높이는 50cm이다. 기단하부의 석실은 평면원형의 구조이다. ① 석실묘의 상부 상부가 네모난 방형의 2층 기단 구조임을 알 수 있다. ② 석실묘의 하부(석실 내부) 석실평면이 원형임을 보여 주고 있다. ③ 천정 ▼ 고달사지 초입에 서 있는 수령 400년 느티나무 ▼ 답사 자료 정리를 마치며... 숭례문 화재 2008년 2월 10일, 이순신 장군의 유물 경매 논란 2009년 4월, 이런 일들이 왜 일어나는가? 비단 이 뿐인가? 전국에 산재해 있는 문화재 방치가 얼마나 심한가! 물질이 풍족하면 정신 역시 풍요로워져야 하거늘, 선조들이 이루어 놓은 정신과 정신적 유산을 계승하지는 못할망정 쓰레기 취급을 하는 이 세태를 무엇으로 표현해야 하는가! 선진국이 된다는 것은 물질만 풍족한 것이 아니라 정신 역시 고양되어야 한다. 물질만 풍족하고 정신이 퇴보하면 그것이야말로 야만스런 국민이 되는 것이다. 내일이 있다는 것은 오늘이 있고서야 가능한 일이고, 오늘이 있다는 것은 어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역사와 그 역사 속에 면면히 흐르는 정신과 문화를 아끼고 보듬지 않으면 힘들고 어려운 내일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오늘이 힘든만큼 내일은 더 쉬워지는 법이다. 우리 국민이 오늘, 바로 지금, 역사와 문화를 사랑하는 국민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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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N 국방시민연대 전쟁사위원회 위원장 권순삼 kwonsanha@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