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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112

16

2009-Apr

철원 성산성城山城

작성자: [레벨:16]한국의 산하 IP ADRESS: *.208.195.249 조회 수: 8998

성산성城山城

-역사의 구비마다 깊은 시련을 간직한 김화 성산성을 가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도 김화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시리즈 Ⅰ : 성산성 답사

시리즈 Ⅱ : 성산성, 김화읍성, 김화 지역과 관련된 조선시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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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 성산성을 답사하기 위해 서울을 출발하기 전, 인터넷과 문헌을 뒤적이며 성산성에 대한 정보를 찾아 보았다. 삼국시대부터 현재까지 전략적 군사 요충지이며, 조선 임진왜란 당시 제4군 도진의홍이 주둔했다는 것, 그리고 1950년 한국동란 때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는 것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함께 동행한 분들 역시 성산성을 찾는 이유가 있었겠지만, 필자는 조선시대 7년 전쟁(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의 진격로를 파악해 보고자 하는 욕구가 강했다.

군사지역인 동시에 지뢰지대여서 성산성 전체를 답사하지는 못했지만 답사가 끝난 이후 김화 성산성에 대해 자료를 정리 하던 중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부닥쳤다. 필자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던 김화 성산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려 1361년(공민왕 10년) 홍건적 20만이 침입하여 원주 영원산성에서 1차 패배한 뒤 퇴각하다 김화 말고개에서 대패했다는 것, 임진왜란 발발 초기 여주 신륵사에서 일본군의 북진을 저지했던 원호 장군이 김화 하소리에서 전사했다는 것, 그리고 1636년 병자호란 당시 평안 감사(현 도지사 해당) 홍명구와 평안 병사(현 군단장(별 3개, 중장)급, 조선시대는 8도에 1명씩 육군지휘관을 두었음) 유림이 김화 읍내리와 생창리 일대에서 청군을 대패시켰다는 것을 알았다. 성산성 자체만 독립적으로 조사·연구해야 될 사항이 아니라, 연구 범위를 넓혀 김화읍성(관청), 김화 읍내리와 생창리 일대의 지형 등에 대해 폭넓게 연구해야 될 사안이었다.

재답사를 해야 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성산성과 김화읍성을 둘러싼 치열한 격전의 현장을 조금 더 생생하게 느껴보고 싶었다. 성산성 전체를 답사하기 위해서는 국방부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그 일대를 조사하기 위해서는 철원군청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안이었다. 애초 성산성 답사를 국방부에 요청했을 때, 예하부대에 협조요청을 하면 될 것이라 했었다. 그 당시는 지뢰지대를 생각지 못했었다. 예하부대에서 답사를 할 때 안내 장교가 지뢰지대를 답사하기 위해서는 작전사령부의 협조가 있어야 한다고 귀뜸해 주었다.

성산성의 전체 모습과 구조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철원 군청에 자료를 요청했다. 고맙게도 그동안 축적해 놓은 자료를 보내 주었다. 그 덕분에 성산성의 전체 모습을 그릴 수 있었다. 이 기회를 빌어 철원 군청에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달하고 싶다.

시리즈 Ⅰ에서는 성산성 답사와 관계된 사진을 위주로 설명하고, 시리즈 Ⅱ에서는 성산성과 김화읍성, 그리고 김화 일대 주변과 관계된 전투를 설명한다.

   2009년 2월 5일 답사, 4월 15일 정리.

김화읍 주변 지형과 성산성 가는 길

조선시대 때 김화현의 관청은 현재의 읍내리에 있었다. 관청 자리(읍치)에  있는 유림대첩비는 병자호란 때 평안병사로서 이 고을에서 승리를 거둔 평안병사(현, 평안도 육군 사령관에 해당) 유림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고, 충렬사도 이 고을에서 평안감사로 있었던 평안감사(현, 평안도 도지사에 해당) 홍명구를 배향하여 세운 것이다. 충열사 아래쪽에 있는 우관郵館은 많은 역驛을 관장하던 종 6품의 찰방이 머무르는 곳으로서 생창역과 다른 개념이다. 도로상에는 많은 역이 존재하는데, 일정 구역 내의 역 몇 개를 관리하는 관리가 바로 '찰방'이다. 이곳 '우관'은 회양의 은계에 있는 '은계찰방銀溪察訪'이 이곳 생창역으로 옮겨온 것이다. 생창역은 우관의 속역이라 할 수 있다.

▼ 김화읍 주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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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산성 가는 길

위의 사진에 보면, 성산성 오른쪽에 '읍내리'라 쓰여진 마을이 있다. '읍내리' 글씨 바로 위쪽에서 왼쪽으로 들어간 부분(논과 밭)이 있는데, 5번 도로에서 골짜기 방향으로 찍은 전경이다. 조선시대 때 김화읍치(관청)가 있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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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에서 좌측 방향을 찍은 전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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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 방향을 찍은 사진이다. 멀리 성산성이 위치한 성재산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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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산성 주변 지형

▼ 19C 초 광여도로 본 김화현

서울대 규장각에서 소장하고 있는 19C 초 광여도이다. 광여도에는 성산성을 '고산성'으로 표시하고 있다. 검은 색 실선은 도로가 아니라 물길이다. 지도 우측 밑에 '금성, 회양, 함경도'라 되어 있는 곳에 물길이 보인다. 이 물길이 바로 북한 지역에 있는 오성산(1061.7m)에서 발원하는 남대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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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산성과 김화읍성 위치도

성재산에 위치한 성산성의 대략적 윤곽은 철원군청이 소장한 자료를 참고하였고, 김화읍성 터는 위의 지도를 참고하였다. 성산성 전체를 답사하지 못하고 김화읍성 터 역시 답사하지 못한 상태에서 대략적이나마 윤곽을 그려낸 것만 해도 철원군청의 자료와 서울대 규장각이 소장하고 있는 자료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하겠다. '충렬사지', '유림대첩비 터', '전골총'은 병자호란 당시 김화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홍명구·유림과 관련된 유적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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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산성 개념도

성산성의 전체 윤곽은 철원군청이 소장하고 있는 자료에 의거한 것이다. 성산성은 '가등산성', '자모산성' 등의 별칭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가등산성'으로 불리는 것은 7년 전쟁 당시 함경도로 진격한 일본군 제2군 가등청정이 일시적으로 주둔했을 것이라는 추측 때문이다. 가등청정은 함경도로 진격할 때 이곳을 지나치지는 않았다. 가등청정군은 서울에서 개성으로 진격한 뒤 개성 위쪽 평산(부)에서 곡산(군)으로 방향을 틀어 6월 12일 철령을 넘었기 때문이다. 6월 이전인 5월 18일경 제4군 도진의홍과 도진충풍, 그리고 모리길성 부대는 이미 김화에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다음 해(1593년) 함경도에서 서울로 남하할 때에도 이곳을 거쳐 갔겠지만 주둔하지는 않은 것 같다. 성산성에는 왜성의 흔적인 '횡굴지'가 보인다. 왜성을 쌓았다는 것은 일시적 주둔이 아니라 장기간 주둔하기 위한 것이다. 가등청정이 일시 주둔하였다 하더라도 '횡굴'을 만들 수는 없었을 것이다. '가등산성'이라 불리워져 온 것은 '가등청정'에 대한 공포심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 당시 가장 두려웠던 지휘관 중의 한명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자모산성'이라는 별칭이 있는데, 이는 병자호란(1636년) 당시 김화대첩을 이끌었던 홍명구·유림과 관련되어 있다. '자모산성'은 평안도 자산(군)에 있는 산성이다. 그 당시 평양성은 폐기된 상태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평안 감사였던 홍명구가 '자모산성'에 주둔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시리즈 Ⅱ를 참조하면 된다.

성산성은 철원군 김화읍 읍내리 성재산(해발 471m)에 위치하고 있는데, 평강 방향에서 철원·화천·회양으로 가는 길목을 매우 유리한 지점에서 감시하며 방어할 수 있는 곳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성산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현의 북쪽 4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489척, 높이가 4척이다.’라고 나타나 있다.

이 산성은 전체적으로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게 되어 있다. 성벽의 총길이는 982m이며, 높이는 일정치 않으나 잔존부와 매몰부분을 감안할 때 7m 전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은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붕괴되었으나 서남쪽 성벽은 상당히 양호한 상태로 잔존하고 있다. 특히 서남쪽 문터를 비롯한 주변 구간에는 높이 5m, 길이 50m 정도의 성벽이 잘 남아 있다. 성벽은 자연석을 다듬어 사용하거나 성내에서 채석한 성돌을 사용하였는데, 현재 성내 곳곳에 채석하여 사용하다 남은 석재가 남아 있다. 한편 동·서벽에서 중세 일본의 산성에서 흔히 나타나는 횡굴(橫堀)의 흔적이 나타나고 있다. 북벽 동쪽 끝과 북벽 서쪽 끝 2곳에 밖으로 돌출된 치성(雉城)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성문터는 서남쪽 문터와 남문터에 남아 있으며, 이외에 동벽과 북벽 등지에 문터로 추정되는 곳이 3곳 있다. 한편 산성 안의 주로 북쪽과 남쪽 부분에는 주춧돌들과 다량의 다양한 기와조각이 흩어져 있어 건물터가 있었던 곳으로 보인다. 성내 기타 시설로는 우물터, 성황당터, 채석장 등이 발견되었다. 성내에서는 다양한 기와조각과, 청자·백자 등 자기조각, 토기·도기조각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유물이 수습되었다.

이 산성은 축조방식이나 성내에서 수습되는 유물 등을 고려할 때 최소한 통일신라 시기에는 이미 존재하였던 산성으로 그후 후삼국시대, 고려·조선시대를 거치면서 계속 수리되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일본식 성곽구축 방법인 횡굴의 흔적도 있어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주둔하였던 곳으로도 판단되는 산성이다. 성벽이 비교적 잘 남아 있고, 우리나라 산성 및 축성법 연구에 학술적인 가치가 크다(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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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산성 답사

3사단 18연대 CP에서 군용 짚차(K141 레토나)를 타고 군사도로를 따라 성재산 정상부인 1번 지점까지 왔다. 성산성 답사는 노란색 부분만 답사했다. 군사도로 하단 부분은 답사하지 못했다. 지뢰가 뭍혀 있기 때문이었다. 지뢰를 제거하면서 산성답사를 하기 위해서는 해당 군 작전사령부에 협조 요청을 해야 된다고 안내 장교가 귀뜸해 주었다.

성산성 답사는 1번 지점부터 시작하여 5번 지점에서 끝이 났다. 북문지가 있는 북쪽 성벽 지대는 군사보호지역이라 사진촬영을 할 수 없었다. 사진좔영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답사팀은 북문지로 향했다. 먼저 북쪽 성벽을 찾아 보았다. 희미하게 그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아주 가까이 보이는 북한 지역을 바라 보았다. 통일에 대한 생각으로 잠시 숙연해졌다. 그리고 넘을 수 없는 차디찬 철책 앞에서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다. '평화시에 전쟁을 준비하라!'

5번 지점에서 성산성 답사가 끝이 날 무렵에는 안내 장교와도 많은 교감이 있었다. 성산성을 내려 오면서 안내 장교와 군사에 대한 얘기, 전쟁의 역사 등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전략과 전술에 대해서도 해박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선뜻 '전골총'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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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번 지점

① 횡굴지 방향(남쪽, 아래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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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서북문지 방향(북쪽, 위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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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번 지점

① 비탈진 부분(서북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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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서북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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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번 지점

① 무너진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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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기와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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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번 지점

① 성벽(북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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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참호(성벽 돌로 구축한 새로운 형태의 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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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번 지점

① 동쪽 성벽(위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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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동쪽 성벽(아래쪽 바깥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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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골총

① 전골총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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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전골총

전골총과 관련된 논란은 시리즈 Ⅱ에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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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DCN 국방시민연대 전쟁사위원회 연구위원 배용순

■ 미답사 지역(철원 군청 제공 사진)

① 서남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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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우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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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내 장교(3사단 18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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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N 국방시민연대 전쟁사위원회 위원장 권순삼 kwonsanh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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